사양동은 망월2리에 속하는 마을로서 일로읍에서 남쪽으로 영산강을 향해 5㎞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호구총수에 노촌면 士良洞里로 나오는 士良洞 지명의 유래는 마을에 어진 선비가 많이 살았고 앞으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될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때는 사양동의 음을 빗대어 새앙동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마을을 둘러싸고 군데군데에 묘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봄이되면 새앙(時祭를 모시는 것)을 지내느라 날마다 사람들이 북적였기 때문이다.
새앙을 지내서 새앙동이라는 말은 맞지않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망월동이 훨씬 새앙을 많이 지냈고 이 마을은 작은 동네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골짜기 동네로 망월동 아이들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이 마을에서는 걸어다녔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주민들이 자세히 모르고 있으나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망월1리에서 전주이씨 이찬보가 1736년에 분가하여 이곳에 이주하면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망월리는 이 마을을 포함하여 망월동 비로촌 등 3개 마을이 전주이씨 수춘군파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주산인 望母山(전주 이씨 족보에는 望每山으로 나온다, 이 산에는 두 개의 굴이 있다)은 소포 나덕명(1551~1619)과 관련된 산이다. 나덕명은 기축옥사로 인하여 벌을 받다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한 충신이다. 말년에 일로에 머물면서 영산강을 막아 간척지를 조성하기도 하였던 그는 그 어버이를 이 산에 葬事하였고 날마다 무덤 앞에서 拜哭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문집에도 구구절절 부모를 그리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후에 주변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감탄하여 그의 부모가 묻혀있는 산을 望母山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산에는 정상부에 하나의 기암이있는데 그 바위를 望父라 한다. 또한 호랑이굴이 있는데 이 굴이 지하로 연결되어 영산강의 상사바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망모산의 호랑이굴은 사람이 포도시 들어갔다 나오기도 할 정도였고 쌍굴로 큰 바위에 굴이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마을성씨
현재는 여러 성씨가 산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실지로 이 마을은 망모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앞에는 영산강이고 주변에는 산비탈 뿐이어서 논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해서 대대로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한 부분이기도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목포에 사는 미야끼가 오오까상이란 일본인에게 사양동 마을 앞 뻘밭을 인수 받아 장자등과 이 마을의 긴섬(장도)를 연결하여 제방을 쌓고 30여 정보 규모의 봉곡농장을 형성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주민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어 밥을 먹고 살 수 있었다. 해서 이 마을 주민들이 일로장에 가면 장터 상인들이 ‘뻘등인간’들이 왔다고 했다. 밥 먹고 사는 마을 사람들이란 소리이다. 당시 소작 농가는 180호였는데 광복 후 300평 규모의 2필지씩 주민들에게 불하되었고 ‘농장’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하지만 농장에 참여하지 못한 많은 주민들은 밭에다 목화를 재배해서 연명을 하였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목화를 심고 베를 짰지만 먹고 살게 된 지금도 베짜는 이야기만 나오면 할머니들은 예전의 험난했던 생활이 생각나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68년 한해 이후 저수지를 준설하였고 이 후에 밀가루를 구경하였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새끼를 꼬고, 덕석을 말고, 나무땔감을 하고 살았다고 한다.
목화는 손으로 작업하거나 일로 공장으로 보내기도 하고 집에서 직접 하기도 하였다. 활로 탔다고 표현하였다.
마을에는 다른 마을에 비해서 젊은이들이 많다. 간척으로 인한 농지가 많아 기계영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특히 쌀이 귀했던 일제강점기에 쌀을 구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이 베를 가지고 충청도 등 윗 지방으로 팔러갈 때는 일본인에게 들킬까 봐 옷으로 교묘하게 위장하여 가지고 갔었다. 또한 베를 팔아 쌀을 사서 가져 올 때도 일본인들의 눈에 걸리지 않게 온갖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을 견뎌 온 마을 할머니들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물레 노래나 둥당에 타령은 이 마을 주민들에게 먹고 사는 것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 그리고 청년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현재는 장흥에서 식수가 온다. 저수지 물이 스며들어 샘에 모이면 샘물을 마셨다 가물때는 비린맛이 나서 배앓이를 하였다고 한다. 지하수가 나지 않아서 식수난이 있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서 이뤄지는 당산제는 풍물을 치며 샘제 달집태우기 거리굿 등을 하면서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한다. 이 샘은 얼마 전까지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하였는데 현재는 버려져 있다.
당산나무는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낸다. 보름 앞 뒤로 15일 정도는 보름 분위기였고 당산나무에 모여서 새끼를 꼬아서 줄다리기를 했다고 한다.
보름 또는 보름이 아닐 때도 당산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들독으로 힘겨루기를 했다. 샘도 시원해서 모여서 살았다고 한다.
동/식물
이 마을에도 매년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내는데 현재는 마을 중앙에 있는 꼴샘에서 이루어진다. 예전에는 마을 입구 당산나무에서 이루어졌다. 둘레가 4미터 40이 넘는 이 당목은 느티나무 수종으로 ‘깔따구나무’로도 불렸다. 날이 따뜻해지면 항상 깔따구가 시커멓게 붙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깔따구는 간척지 주변에서 많이 서식했는데 밭에서 김을 메거나 풀을 벨 때 얼굴에 시커멓게 달라붙어 사람들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그러나 해방 후 농약이 보급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한때는 이 나무가 배를 매는 말목으로도 활용되었다.
샘 옆에는 아름드리가 넘는 구수나무가 있었는데 오래 전 태풍에 쓰러져 죽고 대신 2세 구수나무가 자라 샘을 지키고 있다. 샘 옆에는 주민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들독이 놓여 있다.
마을 주민이 말하는 당산나무는 원래 팽나무였는데 고사한 후 구슬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느티나무 당산은 개인집에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절골이 있다. 마을의 왼쪽 운골에 자리하고 있는데 고려시대에 지어진 절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도 주변을 파보면 기왓장이 나온다. 또한 진섬이 있다. 사량동에서 망월동으로 가는 고개를 광대치라고 하며 청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말등재라고 한다. 그 외에 골샘, 바난골, 안고랑, 서당골, 진등, 강져태(강옆에), 깔찌기(구룡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진섬, 엄상골, 잔등, 안산, 외목짜리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깔찌리는 지명으로 아파트가 들어선 곳으로 오룡지구를 말하며 예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망월리 사람들이 농사만 지었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이금수씨 댁에서는 1774년에 기록된 호구단자와 교지 등을 볼 수 있었다. 호구단자에는 초시를 했다고 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생가만 있다.
마을에는 돌담이 그대로 있다. 망모산에서 돌을 가지고 와서 쌓았는데 담돌이 두 개이다. 이는 마을 개량사업을 하지 않아서라고 한다. 오래된 기와집의 뻘기와도 볼 수 있었는데 예전에는 무안군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물레노래와 둥당에 타령이 전해오는데 기억하는 어르신은 없어서 노래를 들어 볼 수 없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한국전쟁 때는 주민 7-8명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현재 전남도청이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삼향읍 남악리에 들어서면서 개발 이익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다. 주민들은 예로부터 전해오던 ‘영산강에 갈대가 많이 나야 이 마을이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새삼 새기고 있었다. 즉 마을 앞의 갯벌이 간척지가 되어 갈대가 솟아날 때 주민들이 편히 살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는 영산강 하구둑이 막히면서 마을 앞의 갯벌이 농지가 되어 주민들이 양식 걱정을 않고 살게 되었으며 도청 이전으로 인한 地價 상승 등의 이익을 기대하고 있다.
봉곡농장 형성 전에는 뻘에서 어업을 하였는데 봄에는 숭어, 운저리, 모찌, 장어, 칠게를 잡아서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맛은 목포로 많이 팔러 다녔고 뻘이라 바지락이나 조개류는 많이 안나왔다고 한다.
오룡지구는 망월리에서 땅에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농림부땅을 전라남도에서 샀다고 한다. 충청쪽 간척지 농사팀이 와서 물을 빼고 농사를 지었는데 자기 구역을 선점해서 농사를 지었다. 경지정리 없이 사용했다고 한다. 외부쪽은 불하를 해주었는데 어업권이 있는 사람들에게 불하해주었고 그 시기를 영산강 막을 때 80년도 쯤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고기를 잡아 먹었는데 봄에는 숭어, 운저리, 모찌, 장어 칠게를 많이 잡아서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맛은 목포에 많이 팔러 다녔다고 한다. 뻘이라 바지락이나 조개류는 많이 안잡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