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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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마 2리 청계면 하마정 작성
  • 하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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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마을의 세대수는 65세대이며, 총인수는 89명 (남37, 여 52)이다.
자연마을 구성
하마정 마을은 청계면 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쯤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청계면 상마2리 하마정인데 현재는 용마 마을로 불려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마을은 잔등을 사이로 하마전과 용계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지명유래
주민들이 용계의 ‘용’자와 하마전의 ‘마’를 따서 용마 마을로 고쳐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형성 시 龍의 형국을 한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고 물이 풍부한 곳이라 하여 하마전, 두동리 마을과 함께 ‘龍溪’라 했다‘고 하나 주민들은 龍의 지형이나 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마정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관리인 송감사와 관련된 것에서 비롯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 하마정 마을 입구에 해당하는 죽림 지역에 송감사라는 관리가 살고 있었다. 주변에는 솔대가 서 있었고 그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마을을 지나갔다가 상마정이란 곳에서 말을 다시 타고 지나갔다’고 한다. 즉 말에서 내려 걸어 간다고 해서 ‘下馬亭’ 그리고 다시 말을 타고 간다고 해서 ‘上馬亭’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上마田’과 ‘下마田’으로 나온다. 또한 1982년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에서는 ‘상마리를 마전 위쪽이되므로 웃마전, 상마전 또는 상마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의혹이 이는 것은 현재의 지명이 주민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아니고 원래 삼밭[麻田]이 있어서 윗마을은 상마전, 아랫마을은 하마전으로 불리다가 일제시대 때 바뀌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의혹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규명해보겠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송감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송감사가 살았다는 죽림지역에는 지금도 밭을 갈 때 쟁기 날을 버릴 정도로 많은 쪽기와(구운기와)와 기왓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송감사가 이곳에 살았다는 자료나 기록은 없다. 또 하나 불당골로 불리는 곳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송감사의 묘라는 큰 봉분이 있었는데 그 묘 앞에 서 있었던 석인 두 기는 예비군 훈련 때 예비군들에 의해서 현재 청계 중학교에 옮겨져 있다. 여산송씨의 족보에서 송감사와 관련된 기록을 보려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계열의 송씨가 살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알 수가 없다. 구전에 의하면 여산 송씨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고 하는데 기록이나 흔적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관련된 송씨들도 살고 있지 않다. 현재는 한양 조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조상은 기묘사화의 화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아온 사람들이다. 즉 조선 중종 때 조광조로 인한 기묘사화의 변을 당한 한양 조씨들 중 일부가 감방산의 줄기인 돗재(무안읍 매곡리 도산 주변)에서 숨어 살다가 살길을 찾아 신안군 압해면 가란리로 옮겼다.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어 살면서 120여년 전에 이 마을로 조귀철(자-행직, 호-승곡. 1863-?)이 처음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그때 이미 송씨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시골 농부들이 논밭에 재를 재송쿠리형이라 한다
마을성씨
현재는 여산 송씨, 강씨, 한양조씨,무안박씨, 풍천임씨등 복합체의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양파, 벼, 마늘을 주오 생산하고 있다.
주요시설
에덴원, 무안군요양원, 마을회관이 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용계 마을의 왼쪽은 붓단산(불당산)으로 부른다. 또한 앞산에는 한새꼬빼기라는 지명이 있다. 한새는 황새를 가리키는 말로 앞산의 지형이 황새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산의 입구가 황새 코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곳을 매장등이라고도 한다. 현재 에덴원이 있는 자리를, 이유는 모르지만 도독골이라 부른다. 또 밤작골이 있으며, 하마정 마을 뒤를 서그태라 한다. 청계에서 하마정으로 들어오는 곳에 배다리가 있고 그 아래에 가매배다리라는 지명이 있다. 예전에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는데 청계쪽으로 나가려면 건네야 하는 다리로 함평 고막원의 다리처럼 커다란 돌로 정교하게 쌓았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가매배다리에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다. 옛날에 신혼의 단꿈을 안고 가마를 타고 가던 신부가 가마에서 내려 개울을 건너다 발을 헛디뎌 빠져 죽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소살봉이 있다. 현재는 보살봉으로 부르고 있지만 주민들은 어느날 갑자기 봉우리가 솟아올랐다 해서 소살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 뒤에는 달바위가 있으며 마을 앞에는 ‘땅 솟은 산’이라는 지명이 있다. 에덴원 쪽에 도골지라는 저수지가 있다.
동/식물
마을앞에 팽나무가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학계에 확인되지 않은 선사시대를 비롯한 고대의 고분들이 주민들에 의해서 발견되거나 도굴꾼들에 의해서 파헤쳐진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30여년 전에 용계 마을의 왼쪽에 있는 서당골에서는 전문 도굴꾼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의하여 수십 점의 백자와 수저, 젓가락 그릇 등이 발굴되어 무단으로 가져갔다. 40여년 전에도 이 마을 주민에 의해서 분무골 또는 분모골이라 부르는 마을 뒷산 정상에 있는 옹관묘가 큰 옹관을 중심으로 작은 옹관들이 여러 개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현재도 가서 발굴해보면 많은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학두봉이라고도 하고 깃대봉이라고 하는 산의 정상에선 석곽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이미 발굴된 흔적이 있었다. 또한 주변에는 土器로 보이는 상당수의 그릇들이 발견 되었으나 현재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설화
참고로 주민 들 사이에는 송감사 가문이 멸문한 이유를 전설로 간직하고 있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어느날 피곤하고 배고픔에 지친 중[僧]이 송감사 집에 시주를 하러 왔었다. 다른 집에서는 불쌍하고 짠하다 해서 정성으로 시주를 했는데 송감사 집에서만 어떤 이유에선지 중을 기둥에 묶어놓고 벌을 주었다. 중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송감사에게 제안을 하였다. 나를 풀어주면 이 집안이 대대로 부귀하고 장수할 수 있는 명당을 잡아주겠다는 것이다. 잡아준 명당이라고 하는 곳은 생선의 지형을 가지고 있는 땅이었다. 그곳에 조상을 옮겨 모신 송감사 댁은 한동안 잘 나갔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그 지형이 반토막이 나면서 송감사 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해서 주민들은 중을 못살게 굴어서 벌을 받은 것이라 여기고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평온한 마을, 굴곡이 없는 마을이라 이잔님이 자랑하고 있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임갑재(용산서방서장), 강대연(전 도보건과장), 박석진(기획예산실장), 조윤석(보성등기소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마을길이 너무 좁은 골목길이라 길을 넓히는 것 을 원하고 있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얼마 전까지 이 마을에는 우리 지역에서 주민등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 중 최고령자가 살고 있었다. 당시는 103세의 강순애 할머니이시다. 그때는 기력도 정정하고 총기가 있어서 상당기간 살 수 있겠다고 여겼다. 1950년대 이후 각종 선거 때마다 불법 선거운동으로 어느 지역에서나 홍역을 치른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선 지금까지 사전 선거 운동이나 부정 선거 운동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마을의 규모는 작지만 집집마다 공무원들이 있어 부정 선거 운동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 마을은 공무원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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