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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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4리 운남면 연동 작성
  • 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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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58세대, 인구 89명(남48, 여41)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연동」마을은 운남초등학교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연동」마을은 연리의 여러 마을과 마찬가지로 본래 주변이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바닷가 지형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간척이 이루어졌는데, 비석동의 ‘서인섭주사공적비’ 주인공인 서인섭 씨가 일군 간척지로 알려진다. 해방 후 농촌진흥청 주도로 추가 간척이 이루어져 경지를 넓혔으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전기가 들어오면서 지하수를 개발하고 산간을 평지로 개간하는 등의 변화를 거쳐 현재의 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지명유래
「연동(蓮洞)」은 연꽃마을이다. 이는 연꽃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을의 지형이 연꽃을 닮아서 생겨났다고 한다. 마을을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내리와 성내리 팔학동 등으로 나있는 길의 모습이 마치 연꽃잎이 퍼져있는 모습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연동」마을 최초 입향조는 창녕조씨 조수(曺燧, 1634~1684, 자-금권, 호-묵제)이다. 《무안의 성씨자료》에 따르면, 조수 공은 나주 영산포 봉산리에서 세거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망운면 송현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후손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잘못된 기록으로 난(亂)을 피해 「연동」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조수 공은 성품이 순후하고 영리를 일삼지 아니하며 공손함과 검소함으로 사람을 대하고 몸을 다스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한편 창녕조씨 입향 시기 후인 영조년간(1725~1776)에는 행주기씨 기우성(奇偶星, 생몰연대 미상, 호-연동옹(烟洞翁))이 경기도 고양에서 은거할 곳을 찾다가 선대(先代)인 기수실이 해남 화원으로 귀양을 받아 이곳으로 정착하였다. 우성 공은 효성이 지극하였던 사람으로 부모상을 당한 후에는 시묘살이를 하며 밤낮으로 통곡하니 눈물이 잔디에 젖어서 잔디가 다 말라 죽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큰 흉년을 맞이해서 전토를 팔아 주변사람들에게 베푸니 그의 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연동」마을은 ‘연화부수(蓮花浮水)’ 즉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형국이다. 연꽃의 봉우리는 운남초등학교 자리이고 마을로 통하는 8개 길은 연꽃잎 사이사이를 연상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연화부수지형은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귀(貴)하고 길(吉)한 길지(吉地)로 여겨진다. 더구나 연꽃봉우리에 학교가 있어서 단순한 부(富)를 넘어 고귀하고 덕망 있는 인물이 많이 태어나고 마을의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는 곳으로 해석된다. 또한, 8개의 길이 연꽃잎 사이사이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좋은 입지임과 아울러 '8'이라는 숫자는 부(富)와 번영, 무한한 발전을 상징하는 길한 숫자이다.
마을성씨
행주기씨, 김해김씨, 진주정씨, 광산김씨, 경주김씨, 창녕조씨 등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연동」마을은 마을의 지형 자체가 연꽃의 모양을 따라서 만들어진 지명이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줄곧 같은 명칭을 유지해왔다.
행정구역 변경
연동은 운남면의 행정구역 변경과 더불어 변천했다. 운남면은 조선시대의 《호구총수》(1789)에 따르면 영광군 망운면(연동, 모시촌)에 속했다. 1910년 지방관제개정(조선총독부령 제7호)으로 잠시 목포부에 통합되었다가 1914년 면리통폐합(조선통독부령 제111호)정책으로 무안군 망운면(내화촌, 양곡, 연동, 저동, 항장리 일부)으로 구획되었다. 이후 1983년에 망운면에서 분리되어 무안군 운남면으로 재편성되어서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작물은 고구마, 마늘, 양파이다. 김희문 씨(마을 이장) 구술에 따르면 본래 벼나 고구마 위주 농작이었던 연리에 현재의 양파, 마늘 같은 작물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은 양곡마을 간척지에 <구일산업>이 들어와 돈사를 운영하면서부터라 한다. 돈사에서 배출되는 돈분을 왕겨와 섞어 비료로 사용하면서 마늘과 양파와 같은 작물을 경작하게 되었고, 또한 연리에 돈사가 많은 것도 <구일산업>의 유입이 계기가 되었다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1980년 창립), 청년계(1933년 창립), 친목계(1972년 창립)
공동이용시설
연동마을회관, 수련마을쉼터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에 있던 ‘우물샘’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샘물로 운남에서 제일 좋은 샘물로 기억되며, 지하수 개발 전에는 운남초등학교 1,5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식수로 사용할 정도로 수량이 풍부했다고 하나 지금은 매립하여 경작지로 바뀌었다. 이처럼 「연동」에는 바닷물이 빠진 갯벌에서 맑은 물이 솟는 샘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며, ‘스랑샘’도 그 중 한 곳으로 마을공원으로 활용되었으나 지금은 마을 끝자락에 그 터만 남아있다. 주민들은 다시 샘을 살려서 샘 주변에 연(蓮) 관련한 수생식물들을 심어서 마을의 상징으로 가꾸고자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
동/식물
마을 앞 서당터 옆에는 수령이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여러 해 전에 태풍으로 쓰러져 죽었지만, 다시 같은 자리에 자라난 두 그루의 당산나무가 그대로 자라고 있어서 신비로움을 전해주고 있다고 한다. 당산나무 아래에는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인데, 그곳에서 지하수를 파다가 배를 고치던 ‘구지(배못)’를 여러 개 발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바닷물이 들어오던 이 자리는 주민들이 쌀을 실어 나르거나 목포로 가는 배를 띄웠던 포구였다. 마을 앞의 들판은 비석거리의 주인공 서인섭 씨가 막은 간척지이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바우재’는 마을 위쪽 도로가 놓이기 전에 있던 고인돌과 봉분이 놓여 있던 자리이다. 개간 당시 크고 넓적한 4기의 고인돌은 파쇄되거나 묻혔으며, 봉분도 파헤쳐졌는데 옹기 등 부장품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취장골’(초장골)은 마을 앞쪽의 골짜기 지형으로 초분(草墳)을 지냈던 곳이다. 초분은 송장을 풀이나 짚으로 덮어 두는 장례법으로 3~10년 동안 그대로 두었다가, 살이 다 썩은 후 뼈를 골라 시루에 쪄서 땅에 묻는 장례법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당산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당산제를 지냈을 것이지만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유물, 유적
마을에 효자각과 열녀각이 있다. ‘고효자연정기공정연행실비(故孝子蓮汀奇公貞衍行實碑)’은 기정연 효자각으로 그의 행적사실을 기록하고 기리기 위하여 1926년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또한 행주기씨의 입향조인 기우성은 효성이 지극해 이웃인 저동마을에 있는 충효단에 향사하고 있다. 충효단은 1906년에 주변 마을의 김씨, 기씨, 정씨, 이씨의 ‘4성(姓) 6인’이 선대의 충효정신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단을 세우고 ‘2충 7효’를 모셔서 유림이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열녀각은 효자각 아래에 있는데 예전에는 관리가 소홀해 대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각은 썩어 무너져 내렸으나 지금은 보수가 되어 열녀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제각 안에는 ‘파평윤씨열행실적비(坡平尹氏烈行實蹟碑)’가 있다. 비석의 주인인 윤씨는 젊어서 혼자 되었는데 끝까지 재가하지 않고 아들을 키우며 열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후손들은 이러한 윤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0마지기 가량의 논을 팔아 기금을 마련해서 1946년에 세운 것이다. 공사 기간만 해도 1년이 걸릴 정도로 정성을 다해 지었다고 한다. 효자각과 열녀각 사이에 ‘유안당창녕조공유허비(遺安堂昌寜曺公遺墟碑)’가 있다. 이 비는 원래 1944년에 세웠는데 낡고 오래되어서 1986년에 다시 세웠다. 마을 입구에도 이 마을 행주기씨 입향조인 연동옹기유허비(烟洞翁奇公遺墟碑)’(1973)가 있으며 이외에 ‘외와기선생행적비(畏窩奇先生行蹟碑)’(1975) 등의 비석이 있다.
설화
예전의 마을 위쪽에 망운면 강씨들의 묘가 있었는데, 묘 밑에 있는 집들이 하나같이 폐허가 되어서 주민들은 이 묘가 마을 발전을 저해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또한, 마을 앞에는 취장골(초장골)이 있어서, 이들 강씨묘와 초장골이 마을의 기운을 막아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졌고, 현재 주민들도 예전의 인식일 뿐이라며 개의하지 않는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운남은 비록 지리적으로 무안군 외곽이지만 주민들의 교육열이 높아서 일제강점기 운남의 여러 마을에서는 뜻있는 사람들이 ‘사립학교’를 세워 주민들을 교육했다. 「연동」마을도 현재 마을회관 자리 뒤에 ‘나인석’ 선생이 개인적으로 사립학교를 세워 주민들을 교육했다. 나중에 이 마을학교는 터가 좁아 신월리 농장의 산기슭으로 옮겼는데, 해방 후 이 학교를 해체하여 운남초등학교의 임시교실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운남면에는 지식인들이 많았고, 좌우 이념대립이 첨예했던 6.25 한국전쟁 때 운남면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피해를 많이 보았다. 당시 이 마을에서는 인민군 1개 소대가 훈련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연동」마을에서는 15명의 목사가 배출되었으며 운남면에서 두 번째로 교회당이 들어서기도 했다. 현재 ‘운남중앙교회’는 현경면 평산에서 이주한 ‘박석주’ 선생이 개척한 교회이다. 박석주는 ‘청운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숙직실에서 포교활동을 할 정도로 열성적인 전도활동을 하였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2. 《무안향토문화자료》제3책(무안문화원, 1996) 3. 《무안향토문화자료》제4책(무안문화원, 1997) 4.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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