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마을은 연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운남면 소재지에서 월악리 방향으로 와우로를 따라 2km가량 가면 우측으로 보이는 마을이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으로 농지가 개간되기 이전에는, 마을 뒤의 산으로 둘러싸이고 앞으로는 바다를 마주한 지형에 여러 개의 작은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다. 진천동과 작은자작골(수항동-수경동, 큰 도로 너머 마을), 감나무골(시목동, 저동 방향), 자작동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가장 먼저 마을이 형성된 곳은 진천동으로 추정된다. 진천동은 《장흥고씨족보》에는 진천동(眞泉洞)으로 나오고,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현화면(玄化面) 진천동(眞川洞)으로 나와서 한자 기록이 각각 다르다.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장흥고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조선 말기에 진천동에서 현재의 자작동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진천동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지 않지만 장흥고씨 선산이 있고, 주민들은 ‘구터’ 또는 ‘구기’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구터나 구기란 지명은 월악마을 입구 주변의 물목 너머 고씨들 땅에서 비롯된 지명이 있으며, 그곳에서 현재 자리로 이주했다는 의견도 있다.
지명유래
「자작」마을은 마을 둘레가 숲을 이루어 까치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사람들이 길조로 믿어온 까치의 번성을 바라는 마음으로 마을 이름을 ‘자작(滋鵲)’으로 하였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장흥고씨 고학거(高鶴擧, 1612~1696, 자-덕휘, 호-월곡)이다. 학거 공은 무안의 장흥고씨 입향조인 고영호의 후손으로, 고영호(高榮豪, 자-사걸, 호-쌍괴, 선조 대)는 영광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을 피해 해남으로 가서 살다가 외간상(外艱喪, 밖에서 부친상을 맞음)을 당해 편모를 모시고 청계면 연동에 정착하였다. 쌍괴당 공은 총명이 절륜하여 효우로 처세하였으며 학문의 도저함이 주변의 자랑이 되었다. 아들 평서는 주부이며 손은 봉거(鳳擧), 학거(鶴擧), 홍거(鴻擧) 3형제를 두었는데, 맏이 봉거는 청계면 남성리에 남고, 학거는 운남면 연리의 진천동에서 자작동으로 옮겼다. 홍거는 작은자작골(수항동-수경동)에서 시목동을 거쳐 자작동으로 왔다. 이들이 자작동에 자리를 잡은 것은 1600년대 중반이다. 《마을유래지》에서는 두익을 입향조로 소개했으나, 그것은 잘못 정리된 것으로 두익은 학거의 아들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주변을 숲이 감싸고 있어 까치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자작(滋鵲)」마을은 조리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주며, 주변이 개간되기 전에는 숲이 성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대단히 좋은 지형이었다. 또한, 마을 옆으로는 서해바다가 펼쳐져서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여러 생산물이 풍요로웠던 자작마을의 풍수지리적인 의미는, 우선 길조인 까치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자손의 번창과 평화, 축복의 의미를 띠고 있다. 그리고 숲이 성처럼 마을을 둘러싸 아늑한 느낌을 주는 것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안정된 마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을성씨
마을 주민의 성씨는 김해김씨, 순흥안씨, 파평윤씨, 행주기씨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성씨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둘레가 숲을 이루어 까치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다. 길조로 믿어온 까치의 번성을 바라는 뜻으로 생긴 ‘자작(滋鵲)’의 한자어로 표기된 마을 이름은 원래의 의미와 다른 ‘자작(自作)’으로 쓰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마을 이름을 정리하면서 자신들 편의로 표기했기 때문에 나타난 폐해이다. 무안에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오기된 마을 이름이 수십 개이다. 이 마을도 그 중 하나로 바른 표기인 ‘자작(滋鵲)’ 또는 ‘자작(孶鵲)’으로 써야 한다.
행정구역 변경
「자작」마을은 연리에 속한 여러 마을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망운면에 속해 있다가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으며, 1912년 무안군 망운면 연리로 재편되었다. 다만 지금의 자작이란 마을 이름은 1912년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에 「자작동(自作洞)」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1917년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다가, 1987년 《마을유래지》에 운남면에 속한 연6리에 자작(自作)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요 농경작물은 고구마, 마늘, 양파 등이다. 마을에는 텃세가 없어서 어떤 사람이 들어와 살아도 주민 간에 갈등이 없다. 또한 서로간의 협조와 양보를 미덕으로 삼는다. 이런 마을성격으로 인해 운남과 운북이 격돌했던 한국전쟁 당시 이 마을 주민들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밑반찬봉사회(2023년 창립)는 마을여성회원 7명이 주축인 모임으로 마을의 독거노인들을 위해 밑반찬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과 누정이 있으며, 현재는 재건축 중이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을 숲이 감싸고 있어 까치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자작(滋鵲)」마을은 조리형으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주변이 개간되기 전에는 숲이 성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고 또한, 마을 옆으로는 서해바다가 펼쳐져서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여러 생산물이 풍요로웠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둑을 쌓아 농지를 만들었다. 간척으로 조성된 들판을 ‘채경들’이라고 불렀다.
예로부터 운남에는 세 개의 샘이 유명했는데 「팔학동」의 ‘참샘’, 「연동」의 ‘우물샘’, 그리고 「자작동」의 ‘단쟁이샘’이다.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까지 이용되었던 이 샘들은 항상 물이 고여 샘의 바닥을 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동/식물
마을의 왼쪽에는 건해풍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당산목을 심어 마을을 보호했다. 당목은 세 그루의 소나무로 두 아름드리가 넘을 정도로 큰 나무였으나 둑을 허물어 농지로 만들면서 말라 죽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자작」마을에는 예전의 자취를 알 수 있는 지명들이 남아 있는데, ‘모랭이’는 마을 앞의 둔덕이며, ‘단쟁이 샘’은 마을 앞에 있던 우물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왔던 우물인데 지금은 매립해 경작지로 바뀌었다. ‘집건너’는 마을 앞에 있던 산이름이며, ‘뒷뫼똥(니매똥)’은 마을 옆에 있던 이씨 선산이다. ‘불랑코쟁이’는 모랭이 오른쪽에 있는 둔덕이며, ‘쇄쟁이’는 마을 뒤에 있던 거친 토양의 논으로 대장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채경들’은 마을 앞의 트인 전망으로 멀찍이 저수지가 있었고, 채경들 옆에는 수령 300년의 소나무가 있어 마을사람들이 휴식처로 삼았다 한다. 그러나 소나무는 1980년대 무렵부터 서서히 고사하였고, 지금은 그 자리에 다른 나무가 자라고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의 왼쪽에 있던 세 그루의 당산나무에서 정월 보름이 되면 줄다리기를 하는 등 당산제를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회관 앞에 광산김씨 열부각 ‘증승정원좌승지고제옥처정부인광산김씨열비 상왕 계사 명정(贈丞政院左丞旨高濟玉妻貞夫人光山金氏㤠碑 上王 癸巳 命旌)’이 있다. 이 비석은 마을 주민 고제옥(高濟玉, 1845~미상)의 처로 1893년(고종 30년)에 나라에서 명정(命旌)을 받고 1920년에 마을 주민들이 추렴하여 열부각을 건립하였다. 열부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내부에 비가 있다. 예전에는 정려각 주변에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문도 있어 규모를 갖추었었다. 현재는 2009년 무너진 담장을 세우고 주변을 깔끔하게 보수한 상태이다. 비석은 대석과 비신, 옥개석(가첨석)이 모두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석 용마루의 날렵한 곡선과 지붕 위 정면을 향한 돌출 장식, 지붕아래의 부연과 서까래의 이중표현, 비신을 끼우는 받침부분의 우물정(井)자 행태의 새김 등이 정교하다. 목조건축의장을 나타낸 것이다. 이 열부비와 유사한 형식의 비석을 연리 내화와 연동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시기가 올라간다.
설화
‘증승정원좌승지고제옥처정부인광산김씨열비(贈丞政院左承旨高濟玉妻貞夫人光山金氏熱碑)’의 주인공 광산김씨는 출가 전에도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하는 등 효행이 좋았는데, 출가 후에도 시부모 봉양과 남편공대를 잘하였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중병을 얻으니 갖은 정성으로 치료하였으며, 운명 직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했으나 끝내 숨지자 남편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그러나 늙은 시부모 생각에 차마 죽지 못하고 공경하였다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마을 뒤 삼거리는 신월과 운남의 교차점으로, 운남지역에서 교통의 요지로써 일제강점기에는 주막과 대장간 그리고 당골이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