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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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7리 운남면 비석동 작성
  • 비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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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59세대, 인구 96명(남47, 여49)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비석동」은 2005년에 새로 생긴 마을로 비교적 평지를 이루며 운해로의 상가와 뒤편의 경작지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운남면 소재지 일대는 「운남동」이었으나, 2005년에 운남동, 비석동, 상동으로 분동(分洞)되면서 현재의 마을이름이 되었다. 이처럼 비석동이 속한 연리(蓮里)는 시간순에 따라 마을의 수가 늘어 마을이 커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영광군에 속했던 조선시대《호구총수》(정조 13년, 1789)에서는 모시촌과 연동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에서는 연동, 저동, 내화촌만 나오며,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조선총독부, 1917)에는 연리, 내화촌, 양곡동, 연동, 저동, 항장(일부)만 표기되었다. 그리고 현대 무안군의 《마을유래지》에는 운남동, 저동, 자작, 양곡, 연동, 내화 등 6개 마을이 나온다.
지명유래
「비석동(碑石洞)」은 운남동에서 분동(分洞)되기 전, 운남동의 예전 이름인 「비석거리」에서 따온 것이다. 비석거리 유래는 이곳에 2기의 비석이 있었기 때문인데, 비명은 ‘서인섭주사공적비’와 ‘영세불망비’이다. 두 비석은 현재 존재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영세불망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서인섭주사공적비는 서인섭이란 인물에 대한 비석으로 근대사의 애환이 담겨있다. 그 사연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지주 밑에서 마름을 하던 조선인 서인섭(신안군 압해면 매화리)이 지역 소작인들에게 가혹한 소작료 징수하자, 소작인들이 서인섭을 위한 공적비를 세워주면 소작료를 낮춰줄까 하여 ‘서인섭주사송덕비’를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송덕비는 과하다는 반대의견이 있어 공덕비로 고쳐 세웠다 한다. 이 반대의견의 주동자들은 이진택, 기자일, 김채연, 김옥태, 천삼문 등이었다. 한편 소작인들이 비석을 세우고 낙성식을 한다고 하자 당시 의분에 찬 운남청년회원인 최금옥, 박채진, 기행도, 천옥봉, 김장봉, 김이봉 등 7명이 낙성식에 참석하러 오는 서인섭을 가로막아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일로 낙성식은 열지 못했고 청년회원 7명은 일본인 관헌에게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혀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으며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한다. 여하튼 서인섭의 공덕비는 세워졌고, 이 일을 계기로 비석이 세워져 있는 길을 비석거리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통용되는 지명이다. 위의 청년회원 7명 중 박채진은 후진양성과 지역발전 특히 교육계 업적이 컸으며, 제8대 망운면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업적을 기린 ‘국사박채진선생공적비(菊史朴采珍先生功績碑, 1995)가 현재 운남보건소 측벽에 있다. 한편 또 다른 청년회원인 천옥봉은 양곡마을에서 간이학교 교사를 지냈다고 한다. 양곡마을 이의철 씨의 증언에 따르면 ‘서인섭주사공덕비’와‘영세불망비’ 2기의 비석은 이현장 씨 창고 아래 묻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매몰장소는 알 수 없다.
마을형성(입향조)
비석동(운남동, 상동 포함)은 1930년대 중반 연동에 살던 행주기씨(幸州奇氏), 기의여(奇義如) 혹은 기자화 씨이며, 이웃한 연동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부터로 알려진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행주기씨(幸州奇氏) 이주 이후에는 저동에서 하동정씨(河東鄭氏), 내동에서 광산김씨(光山金氏) 등이 차례로 이주했다고 전한다. 현재는 김씨, 강씨, 박씨, 유씨, 성씨, 모씨, 손씨, 정씨 등 복합성씨를 이룬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971년 운남출장소가 설치되면서 「운남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2005년 행정 편의상 운해로의 운남초등학교에서 운남복지회관까지 운해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운남동」, 남쪽은 「비석동」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운남복지회관 위로는 「상동」으로 구분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비석동은 시대가 내려오면서 영광군(조선시대)→목포부(1910)→무안군부 망운면(1914)→무안군 망운면 운남출장소(1971)→무안군 운남면 운남동(1981)→무안군 운남면 비석동(2005)의 순으로 관할행정지명이 변경되었다. 즉, 상동을 포함한 이 일대는 조선시대까지 영광군에 속해 《세종실록지리지》(1454) 영광군조에는 망운향(望雲鄕)으로 되어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영광군조에는 망운도(望雲島)로 나온다. 이후 《호구총수》(1789) 영광군조에서는 망운면 모시촌(毛時村)과 연동(蓮洞)이었다. 이후 1910년에 일제에 의해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무안군부 망운면 관할지역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71년 망운면 관할지역으로서 현재의 운남면에 운남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83년에는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분면(分面)하면서 운남동이 되었다. 하지만 인구가 늘고 마을이 커지면서 행정편의를 위해 2005년 운남동은 다시 상동, 운남동, 비석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비석동 주민의 생업은 상업과 농업이며 상업인구는 60%, 농업인구는 40% 정도이다. 주요 농작물은 양파와 마늘이다.
주요시설
운남파출소, 운남동경로당, 무안군장애인협회운남면지회, 운남의원, 에덴지역아동센터, 하나로마트, 농협주유소
마을변화
현재 운남면 소재지에 속해있는 이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은 7~8세대로 주로 벼와 양파 등의 작물을 기르고 있다. 또한 실제로 상업을 하는 상인은 약 5~6세대 정도로 많지 않은 편이며 외지에서 일을 하는 인구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타의 시골마을과 달리 주민들이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금년 2025년 10월 초에 운남면번영회와 함께 주민들이 나서서 처음으로 진행하는 <돈세고 놀자 축제>라는 이색적인 마을축제 역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여자경로당, 노인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비석동」은 평지를 이루며 주변도 벌판이어서 주로 논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지가 없는 흙땅으로 지하수개발이 잘 되어 수자원 활용이 원활하다. 하지만 원래는 물이 귀했었다. 운남면의 운남이란 지명에도 비를 바라는 주민들의 열망이 담겨있었다. 비는 대체로 구름이 남쪽에서 몰려올 때 내리는 확률이 높아 구름 운(雲)에 남녘 남(南)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 마을은 운남면의 마을 중에서 드물게도 상수원 시설이 없고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하수개발의 구체적시기에 대해 주민들은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하며, 다만 예전에 연동이 아랫마을과 웟마을로 나뉘었을 때는 샘이 윗마을 한군데 밖에 없어 물 때문에 주민들 간에 싸운 적도 많았다. 그리하여 1970년대까지도 몇 곳의 우물에서 물지게를 지고 물을 퍼 날랐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2025년부터 비석동, 운남동, 상동이 있는 운남면 소재지 일원에서 <돈세고 놀자 축제>를 시작하였다. 이 지역의 특산물인 돼지, 세발나물, 고구마에서 따온 축제명이다. 이 행사는 지역특산물의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관광명소화를 위해 주민들이 나선 축제이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강성현(현대건설 여자배구팀 감독)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비석동 일대는 본래 가뭄이 심했으나 1980대 무렵 지하수개발로 풍부한 수량을 활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송전설로가 건설되었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무안향토문화자료》(무안군, 198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3.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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