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묘1리에 속하는 「두곡(頭谷)」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망운면 방향으로 1km가량 떨어져 있으며 「두곡」과 「샘건너」, 「꽃회사」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마을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을이 운남과 망운의 경계 지점에 있어서 운남으로 들어오는 첫 마을이라고 하여 「머리실」이라고 부르다가 「두곡(頭谷)」이 되었다고 하며, 두 번째는 마을지형이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을에는 지금도 동각골, 양각동(兩角洞) 등 소의 뿔과 관련된 지명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밀양박씨 박화진(朴華鎭, 자-사여, 호-죽헌, 1777~1852)과 그의 동생 윤진(允鎭, 자-사일, 호-춘성, 1786~1848)이라 한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박화진은 원래 경기도 고양에서 정변으로 인해 안성으로 유배당했다가 후일 다시 전남으로 유배된 뒤 말년에 이곳으로 와 터를 닦고 후손이 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밀양박씨 청제공파의 가승보를 보면 박화진은 증(贈) 사복시정(司僕寺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복시는 말이나 수레를 관리하던 관아인데 그곳의 시정이라면 정3품관을 말한다. 조선시대 이 마을이 목장면에 속했기 때문에 사복시정과의 연관성을 추정해보나 벼슬이 사후에 내려진 승(贈)이어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다. 기록이나 주민들의 말대로라면 1800년대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이미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는 「두곡」이란 마을 이름이 나온다. 이런 사실로 봤을 때 박씨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이지만 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동각골, 양각동(兩角洞) 등 소의 뿔과 관련된 「두곡」이라는 마을의 지명은 물론 옆 마을인 「둔전」이 소가 누워있는 와우정(臥牛亭)의 풍수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 「두곡」마을의 형국은 ‘소의 머리’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를 풍수지리적으로 살펴보면 「둔전」마을의 와우정 형국을 비롯하여 주변의 지형에서, 전체적으로 편안히 누워있는 소의 형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머리' 부분을 담당하는 중요하고 길(吉)한 터라고 해석된다. '머리'는 소의 모든 감각기관인 눈, 코, 입, 귀와 뇌가 집중되어 있는 곳으로, 지혜, 판단력, 리더십, 그리고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상징한다. 또한, 동각골, 양각동처럼 소의 '뿔'과 관련된 지명은 머리의 힘을 더욱 강조하여 강력한 힘, 보호, 방어, 개척정신 등 우두머리의 역할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명칭에 대하여 《마을유래지》에서는 ‘조선 때는 영광군 고잔면으로 첫마을이라 하여 「머리실」이라 불러오다가 6.25 이후 운남면의 첫 마을로 계곡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두곡(頭谷)」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를 문헌을 통해서 살펴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 두곡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와 1917년의 자료에서 망운면 두곡리, 하묘리, 팔학동, 도림동, 금산리, 둔전동으로 나오며 1987년의 자료에서 운남면 하묘리 두곡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고잔면 소속이었으며,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곡리, 팔학동리, 도림동, 둔전동, 금산을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하묘리에 속한 하묘1리 「두곡」마을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이 마을은 벼농사와 함께 고구마, 콩 등의 밭작물은 물론 무안의 주요 특산물인 양파와 마늘을 주 소득원으로 하는 약 300여 명 이상의 주민이 살던 농촌마을이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 당시 운남과 운북의 주민 간 갈등이 촉발되었던 「배나무정」이 동네 초입에 있다. 당시 사람이 많이 죽어서 초분골로 불리는 무서운 곳으로 소문나 있다. 지금은 평화로운 시골마을이지만 아직도 일부 마을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깊은 상처가 내면화되어 있다.
주요시설
마을창고, 가공공장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두곡회관, 두곡경로당, 주민건강관리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양각동」으로 불렸던 곳에 육종연구소인 꽃회사(flower company)를 설립하여 꽃씨를 채취했던 곳으로 지금도 「꽃회사」라는 마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꽃회사’가 설치되었던 자리는 개미허리처럼 잘록한 부분으로 등성이께로 난 도로에서 보면 양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육지의 폭이 좁은 곳이다. 이런 지리적 환경 때문에 꽃을 채집하기에 최적지라고 한다.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재배했던 꽃은 다년생 화초로서 ‘금계국’ 또는 ‘천일국’으로 부른다. 이 꽃은 무안지역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꽃회사마을」 아래에는 황금어장인 청계만이 연결되어 있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하묘마을」에 커다란 포구가 형성되었었다. 이 포구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운남지역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를 비롯한 상당 부분의 화물을 실어 나르는 곳이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동각골, 점등, 신토성, 가능골, 양각골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옆을 지나고 있는 압해-운남 간 도로공사를 할 때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두곡」마을 구간을 문화재지표 조사하였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석곽묘가 나왔으며 삼국시대의 고분, 토광묘, 옹관묘 등을 발굴하였다. 이런 자료들을 모아 <두곡마을 고인돌군>이라 해서 길옆에 부지를 마련하여 전시하고 있다.
그렇듯이 마을 입구 ‘바윗등’이라고 부르는 곳에 3기의 지석묘가 있었다. 예전에 바윗등의 바위 위에서 이 지역의 처녀 총각들이 데이트를 즐겼던 곳이라고 주민들은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7년에 소유주가 묘지 공사를 하면서 고인돌들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또한 배나무정의 파평윤씨 선산에도 5기의 지석묘가 잡풀 속에 묻혀있으며, 그중 하나의 고인돌 위에 <파평윤씨 세장산> 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바다와 인접한 곳에 백자를 구웠던 도요지가 있다. 마을에서는 ‘점등’이라 부르는 곳인데, 서쪽에서 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형성되어 있고 반대편인 동쪽 구릉은 완만하다. 밭으로 개간되면서 요지(窯址)가 파괴된 듯하며, 현재 경작 중인 밭에는 요벽편과 도지미, 백자편 등이 산재해 있다.
목포대학교 박물관 조사에 의하면 ‘마을 입구 도로변 나지막한 구릉 일대에 위치한 유물산포지가 있다.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과 옹관편이 수습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마을 입구에는 ‘열부김해김씨기적비’가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운남은 지리적으로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주민들이 망운지역에 비해 상대적인 소외감을 많이 느꼈던 지역이다. 그러한 소외감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6.25 한국전쟁 때이다. 그때 인민군이 들어와서 약 70여 일간 운남을 점령했었다. 그때 운남사람들은 운북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승리감을 맛보았다고 한다. 그 후 인민군이 물러가고 군경에 의해서 운남지역을 수복하려 할 때, 운남사람들은 격렬히 거부하고 저항하였다.
이러한 저항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이른바 ‘배나무정 싸움’이다. 운남사람들은 10대에서 50대까지 누구도 가릴 것 없이 죽창을 들고 이 배나무정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운남을 지키려고 싸웠다. 군경과 운북사람들은 기관총과 소총 등 현대적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비 면에서는 애초 싸움이 되지 않았다. 우박처럼 총탄이 쏟아지고 수많은 사람이 가을바람에 낙엽 지듯이 총탄에 쓰러져 갔지만 운남사람들은 물러설 줄 몰랐다. 방어선을 지켜내고 망운면을 지나 현경면 파출소가 있는 곳까지 진격했다. 죽창이 기관총을 이긴 것이다. 물론 다음날에는 군경에 포위되어 무너졌지만 그들의 끈질긴 저항과 단결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 싸움을 전후해서 이 마을에서 팔학까지 길을 따라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아픔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기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곳을 지날 때는 운남이나 운북 사람들 모두 그곳에 나무나 꽃을 꺾어서 올려놓아 혼백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나이 드신 주민들은 지금도 그곳을 지날 때면 머리털이 쭈뼛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운남 출신 소설가 김웅의 장편소설 『죽창』(세손출판사, 1996)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마을 출신의 주인공 박기태는 좌익 무안지역 총책임자인데, 평범한 청년인 김용수(원동 출신)가 무안에서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가다가 폭설로 망운 목내에서 차가 막혀, 머리실 곧 「두곡」에 있는 박기태의 집까지 걸어가서 하룻밤 자는 것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된다. 한국전쟁 당시 10세였던 김웅 작가는 당시의 참상을 사실에 근거를 두고 『죽창』을 썼다고 소설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운남과 운북의 경계점에 있는 「배나무정」은 예전에 서낭당이 있었던 곳으로 커다란 돌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봄에 배꽃이 하얗게 필 때는 멀리 청계면 청천리의 맑으내마을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하얀꽃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그렇듯이 「배나무정(梨木亭)」은 이 나무 아래 정자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또한 이곳은 오래전에는 원래 초분골이어서 특히 총각, 처녀의 영혼들이 있을 때는 영혼결혼식을 시켜주는 장소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배나무를 베어 없애버렸다. 참고로 현경면 마산마을 입구에도 「배나무정(梨木亭)」이라는 지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