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전」마을은 하묘2리에 속하는 마을로 운남면 소재지에서 망운면 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은 동아실, 산중, 새터, 둔전, 와우정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지형은 태극혈로 물과 산이 태극 모양으로 조화를 이루며 마을을 감싸며 돌고 있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에 ‘조선 중엽에는 「금산(錦山)」으로 불렀으나 지형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라 하여 「와우정(臥牛亭)」이라 부르다 그 후 「구스통(들생)」, 「장오래(쇠고예)」라 불러오다 지금은 「둔전(芚田)」이라 부르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소가 먹는 풀밭이란 의미의 「둔전(芚田)」과 함께 마을 주변에는 소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있다. 앞에서 「구스통(들생)」은 소가 물을 먹는 샘인 갈샘을 뜻하는 ‘들샘’의 오기로 읽히며, 이외에도 마을에는 소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있다. 소의 고삐를 끌고 가는 형국인 ‘장오래’는 물론 동편에 나있는 소의 뿔이라는 ‘동각동’ 등이 있다. 이외에 마을지명의 다른 유래는 「와우정」을 「왜우정」이라고도 하는데,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비를 만난 곳이라고 해서 「왜우정(倭雨亭)」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이 변하여 「와우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는 원래 이씨(李氏)들이 살았다고 하나 이후 남원에서 살던 김해김씨 김상경(金相慶, 자-익충, 호-수진제, 1574~1646)이 부친의 묘를 이곳에 잡으면서 김해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김상경은 아버지 김치인(金致仁)과 함께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켜 낙안전투에 참여하였다. 왜병과 치열하게 싸우던 중 부친이 전사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부친의 시신을 거두어 남으로 피난 도중, 「둔전」에 머물려 부친을 장사 지내고 삼 년간 시묘 생활을 하며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견도 있는데, 《김해김씨 삼현파 수진재 세보》에는 부친인 치인 공(致仁 公)의 묘가 남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무안지망집》에서는 이때 김상경의 형인 김발경(金潑慶, 1573~1641)도 함께 피신하여 정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좌우든 이때 김상경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하였던지 상석 앞의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는 두 개의 구덩이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김상경은 천품이 뛰어나고 외모가 탁월할 뿐 아니라 조선조 대학자 하서 김인후의 제자로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고 한다. 자라서는 경서와 군서를 섭렵하여 지략에 막힘이 없었고 식견이 풍부하여 말에 있어서 논리가 분명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동마을에 있는 ‘충효사’에 배향되고 있으며 무덤은 마을 뒤 송하산(松下山)에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둔전」마을은 풍수지리로 봤을 때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소와 관련이 깊은 마을이며, 또한 마을의 지형 역시 태극혈로 물과 산이 태극모양으로 조화를 이루며 마을을 감싸며 돌고 있다. 이러한 와우형국(臥牛形局)은 소가 편안하게 누워있는 형상을 뜻하는 길한 명당으로 농경사회에서 부지런함, 인내, 끈기, 그리고 풍요로운 생산성과 넉넉한 부(富)를 상징한다. 여기에 더하여 풍수지리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강력한 혈(穴) 중 하나로 꼽히는 태극혈이 마을을 감싸고도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지형은, ‘산(山)은 바람을 막아 생기를 감싸안고, 물(水)은 생기를 모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생기가 마을에 가득한 것을 의미한다.
마을성씨
김해김씨 집성촌이었지만 지금은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해 지명의 변천을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 「둔전촌(屯田村)」으로 나오다가 1912년에 무안군 망운면 「둔전동(芚田洞)」으로 나와서 현재에 이른다. 여기에서 특기할 사항은 조선시대에는 마을 이름이 「둔전(屯田)」이고 일제강점기에는 「둔전(芚田)」으로 한자 표기가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 차이를 주민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여기에서 둔전(屯田)이란 예전에 나라나 군대에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마련한 밭을 의미한다. 즉 관인들이 직접 경작하거나 민간인에게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아 군량미 등으로 사용한 것을 말한다. 따라 「둔전(屯田)」마을은 과거에 이러한 둔전이 있었던 곳, 혹은 그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마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하지만 「둔전(芚田)」마을은 자연적으로 풀이나 나무가 무성한 밭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마을 이름을 몰역사적이며 무의미한 내용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행정구역 변경
조선시대에 영광군 고잔면 소속이었으나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곡리, 팔학동리, 도림동, 둔전동, 금산을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 운남면으로 분리되며 운남면 하묘리에 속한 하묘2리 「둔전」마을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의 지형지세가 그렇듯이 마을은 대체로 부촌이었다. 전통적인 벼농사보다는 주로 무안의 특산물인 마늘, 양파, 고구마 등을 비롯한 밭작물과 함께 마을 주위의 풍부한 해산물을 채취하는 어업을 병행하여 풍요한 생계를 이루어왔다. 또한, 이에 주민들이 근면하고 서로 협조를 통해 마을의 어려운 일들도 잘 풀어나갔다. 그리하여 아직까지 주민들의 소리가 마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하며 서로 얼굴을 붉힌 일도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는 천수를 누리는 노인들이 아직도 바깥나들이를 하고 있으며, 90세 이상의 노인들은 물론 80세 이상 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장수마을이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이 마을은 운남 망운에 걸쳐서 최초의 교육기관인 ‘둔전사립학교’와 선진문화의 첨병 역할을 했던 교회인 ‘하묘교회(1929 설립)’가 설립될 정도로 교육, 문화적으로 앞서가는 마을이었다. 당시 운남에서는 이 마을 사립학교가 최초였으며, 이후 내리, 성내리, 영해촌 등에도 사립학교가 들어섰다. 이 마을의 사립학교는 고등공민학교로 이어졌다가 후에 ‘운남초등학교’로 통합되었다. 또한 교회 역시 서양인 전도사가 들어와 와우정에서 예배를 보면서 처음 개척했다고 한다. 이후 마을 중앙으로 왔다가 다시 현재의 쓰레기장 주변에서 잠시 예배를 본 다음 주민들이 힘을 모아 마을 입구에 번듯하게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곳에서 50여 년이 넘게 말씀을 전하다가 지금은 팔학마을로 이전했다.
현재 학교터는 밭이 되었지만, 그때 학생들의 수업시간에 시작과 끝을 알리는 종은 지금도 마을회관에 남아 있다. 사진을 남기려고 김용복(86세) 어르신께 종을 보자고 하니 회관에 보관 중인 종을 꺼내주신다. 입구 계단에 놓고 사진을 찍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처음에는 일본어만 배웠으나 나중에 야학 형식으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에는 지식인들이 많아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좌익인사들이 많이 있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둔전마을회관, 둔전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호박내, 너븐통, 각골, 저동마을과 사이에 있는 절터, 팔학마을과 중간에 있는 참샘골 그리고 불등, 갯동치 등 많은 지명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공항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망등’(마을 단위의 봉수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주변 마을의 안위를 살피는 높은 대, 이곳을 지키는 망지기도 있었음) 또는 ‘조산등’이라고 부르던 마을의 관방시설이 있었다. ‘망등’은 흙을 쌓아 올려 멀리까지 살필 수 있게 만든 인위적인 동산으로, 현재는 등의 흙을 많이 퍼 가버려서 옛날의 높다란 모습을 볼 수 없지만 그 흔적은 남아있다. 그런데 이곳의 흙을 파낼 때면 옛날의 그릇이나 자기 파편 등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여기 망등에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 5개가 있다. 그리고 마을창고 옆에 2개, 보건소에 1개 등 모두 8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망등에 있는 고인돌은 주민들이 ‘범바위’ 또는 ‘장군바위’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1918년에 세운 ‘광산김씨열부비(光山金氏烈婦碑)’가 있다. 열부비의 주인공은 김해김씨인 김재광의 부인으로 젊었을 적에 남편이 병을 얻자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놓고 병이 낫기를 기원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정성도 보람 없이 남편은 세 살짜리 아들과 칠순의 노모를 남겨둔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연이어 큰 집의 조카도 고아가 되자 부인은 이들을 모두 거두어 길렀다. 아들에게는 농사를 짓게 하고 조카인 종손은 글을 읽게 하여 큰 선비로 길렀다. 후일 부인이 세상을 뜨자 종손과 주변 사람들이 뜻을 모아 비각을 세워 그 정성을 기렸다.
설화
일각에서는 예전의 마을 이름이 「금산동(金山洞)」이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60~70년 전에 잠채업자가 마을 이름을 보고 들어와서 마을 앞의 논을 파헤쳐 금을 채굴해가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망운에 공항을 건설할 때 유독 이 지역의 사람들이 일본인들에 의해서 혹독한 부역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는 뭐라고 꼬집어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주민들은 다른 지역보다 바른 소리를 많이 해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다.
기록물, 문헌
이 마을을 비롯한 하묘리 일대에서는 자기(瓷器)와 도자기 파편들이 많이 발견된다. 예전 마을조사에서 주민인 김지용 씨(당시 74세)가 밭을 갈다가 발견한 도자기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자기였으며, 토기가 같았으나 자세히 보니 윗부분에 유약을 바른 흔적 등이 보여서 ‘초기 청자’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마을 옆 방하교(防河橋) 주변을 파보면 지금도 한 수레가 가득 찰 만큼 많은 파편들을 모을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 의하면 두곡마을, 공두뫼들 등 두 군데의 유물산포지가 있다.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과 옹관편 등이 수습되었다.
이에 일제강점기에 서남부 지역의 도자기 문화를 정리했던 일본인 산전만길랑(山田萬吉郞)은 그의 저서 『삼도쇄모목(三島刷毛目)』에서, 무안지방의 도자 출토품 중 신라식 무유토기가 운남면 일대에서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내리 원동마을의 가마터는 신라 시대에 지어진 가마로 생산품은 무유토기였으며, 토기 중 자연 회유(灰釉)로 인해 아름다운 청색 빛을 띠는 것도 소량이지만 확인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무유토기 가마터는 해안가에 매우 많이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망운면(운남면 포함) 해변에 3~4개소의 가마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김창근(농악, 무안국악원 원감)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 기간에 이 마을도 예외 없이 많은 주민이 피해를 봤다. 약 10여 명 이상의 주민들이 죽었다고 한다. 당시에 ‘방죽골’이라는 곳에서는 여러 기의 무덤들이 만들어져 치열했던 그때의 흔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