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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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묘3리 운남면 팔학 작성
  • 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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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49세대, 인구 78명(남37, 여41)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마을 형국이 학과 관련이 있는 마을인 「팔학」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77번 국도를 따라 망운 방면으로 1km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형성되었다. 행정구역명은 운남면 하묘 3리 「팔학」마을로 도림동, 팔학, 참삯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마을 이름의 유래는 ‘학이 앉아 있는 모습’이라 해서 「팔학동」이라 불렀다고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다. 예전에는 마을 주변에 아름드리 참솔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그 소나무 위에 학이 살고 있어서 「팔학동」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앞이 학의 목, 마을 중앙이 학의 몸통, 마을 동쪽과 서쪽 주변이 학의 날개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 8마리의 학이 날아와 살고 있었다. 조선시대 영광군 고잔면에 속해 있을 때는 「팔학곡(八鶴谷)」이라 했다가 무안군 망운면으로 편입되면서 「팔학동」이라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로는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 의하면 세 성씨가 나온다. 처음에 나오는 성씨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현재 마을 아래에 위치하는 도림동이라 부르는 곳으로 들어와 처음 정착한 이는 이승주(李承胄, 자-필희, 호-도재, 1647~1710)이다. 공의 조부인 이흥록(李興祿)이 조선 인조 때 이조좌랑과 정주목사를 지내다가 사화로 참화를 당하고 아들인 이휘제(李彙濟)가 전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곳 토착민의 강압이 심해 살지 못하고 1600년대 후반에 이승주가 남으로 내려와 이곳 팔학동의 지세를 보고 자자손손 번성하고 고고한 선비와 문장가가 많이 배출될 것 같아 이곳에 안주하였다. 이승주는 근검과 온공으로서 일생의 신조로 삼고 의방(義方/군자는 항상 삼가며, 깨어 있음으로써 안으로는 마음을 곧게 하고, 밖으로는 불의를 좌시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행동을 결단토록 한다)으로서 후손들을 가르쳤다. 두 번째 입향조는 현재의 팔학동에 터를 잡아서 입향한 영양천씨(潁陽千氏) 천정만(자-하경, 호-수암, 1711~1792)이지만, 원래의 무안 입향조는 천광우(千光禹, 호-遯窩)로 조선 경종 때 세거지였던 충청도 보은에서 홀연히 남하하여 무안 청계면 월선리로 들어왔다. 아버지인 귀경은 장예원 사평이며, 조부인 해(海)는 훈련원 판관으로 충청도 보은에서 오랫동안 세거하였다. 공은 양친을 효도로 봉양하다가 내외상(內外喪)을 연이어 당하니 6년을 시묘살이하되, 옛사람과 같이 하니 주변 사람들이 그의 효성에 모두 감탄하였다. 세 번째 입향조는 조선 영조(1724~1776) 때에 들어온 남평문씨(南平文氏) 문덕화(文德華, 호-사우헌(思憂軒))이다. 아버지 상운은 사마이며, 조부인 가장은 장흥부사를 지냈다. 원래 영암 암장에서 세거하다가 생계의 불리로 인하여 당시 일로면 정동(鼎洞)을 거쳐 살기 좋은 이곳으로 왔다. 공은 지기가 결백하여 이(利)를 꾀하고 의(義)를 배반한 무리를 보면 간곡히 효우(孝友)를 들어 의를 권장하였다.(《무안세적지》 이승조, 천광우, 문덕화 조)
풍수지리(마을형국)
학이 앉아있는 모습이라는 마을의 지명처럼 마을의 형국은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이라고 한다. 이는 풍수지리에서 "평평한 모래밭이나 들판에 기러기 떼가 내려앉는 모습"을 뜻하는 명당 형국으로 걸출한 인물의 배출과 함께 풍족한 식복, 부유한 재복이 넘쳐나는 곳을 말한다. 이러한 지형적인 이유 때문인지 운남면의 여러 마을 중에서 이 마을은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에서는 마을 이름을 딴 8명의 인물을 이야기하고 있다.
마을성씨
한산이씨, 영양천씨, 남평문씨, 광산김씨, 영암정씨 등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영광군 망운면의 두곡리, 둔전촌, 하묘촌으로 나오다가 1912년의 자료와 1917년의 자료에서 망운면 두곡리, 하묘리, 팔학동, 도림리, 금산리, 둔전동 등이 나온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서 망운면과 분리된 운남면 하묘리, 「두곡」, 「둔전」, 「팔학」, 「하묘」, 「신촌」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마을의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 하여 「하묘리(荷苗里)」라고 했으며, 하묘3리 팔학동은 원래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망운면 소속이었다. 이후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곡리, 팔학동리, 도림동, 둔전동, 금산을 병합하여 무안군으로 편입되었다. 1983년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두곡」, 「둔전」, 「팔학」, 「원하묘」, 「신촌」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마을 주민들은 대단히 거칠고 억세서 한때는 다른 마을 주민들이 함부로 마을 앞을 지나지 못하고 혹시 지나가게 되더라도 무척 조심해서 다니곤 했다.”라고 한다. 그만큼 마을의 형세에 따른 위세나 번영이 다른 마을에 비하여 컸다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마을은 60년대와 70년대의 야산 개발 등으로 울창했던 송림들이 없어지고 학들도 사라지면서 희미해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마을에 감나무 단지가 생기는 등 마을 주변에 새로는 숲이 형성되고 있어서, 이제는 학들도 돌아오고 예전처럼 마을이 융성해질 것이라고 주민들은 기대하고 있다.
주요시설
하묘교회, 열매교회(예전 운남교회)
마을변화
현재 마을에서는 운남-망운 간 국도가 마을을 두 쪽으로 분리시켰는데, 이제 다시 새로 놓인 압해도와 연결되는 4차선 도로가 마을 중앙으로 지나가고 있어서 마을이 분산되어 찢어질까봐 주민들은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연결되는 요충지에 있는 팔학마을은 교통의 편리와 함께 최근 마을 건너편의 무안국제공항이 개발되는 등, 향후 개발과 발전이 기대된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팔학마을회관, 팔학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양쪽으로 바다를 두고 망운과 운남을 잇는 이 마을에는 하지만 네 개의 샘이 있었다. 흔히 ‘참새미’라고 부르는 ‘참샘’과 ‘서당샘’ 그리고 ‘도림동샘’과 마을 중앙에 있는 ‘두레박샘’이다. 특히 학골(鶴川)에 있는 참샘은 비가 온 뒤에는 무지개가 어리는 샘으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왔다. 물이 얼마나 잘 나왔던지 아무리 퍼내도 늘 원래의 수위(水位)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변의 논농사는 그 샘물로 인해 어려움 없이 경작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그 샘의 가치를 알고 샘 위에다 주둔군 숙소를 짓기도 하였다. 현재는 샘이 메워지고 주변은 수렁논이 있다고 해서 부르는 ‘스랑골’로 바뀌어 갈대가 자라고 있다. 또 하나는 예전에 서당이 있었던 자리에 있었던 ‘서당샘’이 남아있다. 그리고 《한국지명총람》에는 참샘골 아래에 절터가 있어 절이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중이 식수로 사용했던 샘으로 ‘중샘’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마을 앞에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있을 때는 주민들이 그 나무를 당산목으로 여겼다.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주민들 모두 한마음으로 마당밟기와 줄다리기 등을 하여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였다. 줄다리기를 하고 남은 줄은 그 당산목에 감아서 ‘새옷을 입히고’는 하였다.
유물, 유적
예전에 ‘팔학 지석묘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마을에 송림이 우거져 있을 때는 고인돌이 대단히 많이 있었으나, 산림이 개발되면서 고인돌들을 땅 주인들이 묻어버리거나 깨어서 버려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바우백이’라고 부르는 양파 저장창고인 ‘성내농산’ 뒤에 있는 다섯 개 정도 뿐이다. 또한, 마을의 참샘이 있던 옆자리에 봉분이 하나 있는데, 그 토지의 경작자는 봉분이 고대의 석곽묘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밭을 경작하기 위하여 기계로 땅을 파보면, 커다란 바위가 걸리고 그 위에 흙들이 쌓여 있어 인위적으로 쌓은 흔적들이 보여서 지체 높은 사람의 묘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예전에 도림동에는 큰 스승이 있었다. 이곳에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여 운남 전역에서 서당을 열고 학문을 가르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팔학동이 낳은 8명의 인물인 김여옥, 박영규, 천태홍, 김장봉, 천상륜, 김말룡, 문대식, 천일섭 역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마을회관 거실에는 팔학마을 주민 일동으로 마련한 ‘마을을 빛낸 전몰호국용사’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곳에는 1950년 한국전쟁에서 순국한 천등섭, 천순기, 천성호 등 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결과 마을회관이 신축 이전되기 이전에 있었으며 지금은 확인할 수 없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 때 이 마을은 운남의 중심지였다. 특히 망운파출소의 지단(支團)이 현재 「팔학」마을 버스승강장에 있어서 운남, 운북간 이념분쟁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두곡」마을과 관련되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 마을의 표고가 망운, 운남지역에서 제일 높다는 대박산과 거의 같은 높이라고 한다. 망운면에서 운남면이 분면 될 때 면사무소를 이 마을에 두려고 했으나, 관공서가 들어서면 동네가 시끄러워진다는 보수적인 사고의 어른들이 반대하여 연리로 갔다고 한다.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무안향토문화자료》(무안군, 198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3.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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