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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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묘4리 운남면 원하묘 작성
  • 원하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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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3세대, 인구 47명(남24, 여23)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원하묘(元荷苗)」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망운 쪽으로 2km가량 가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나오는 마을로 바다와 접해 있다. 작은마을과 큰마을로 불리는 두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의 역사를 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 하묘촌으로 처음 나온다.
지명유래
「원하묘」는 하묘4리에 속하는 마을로 하묘리에서 처음 형성된 마을이라 원하묘라 하였다. 하묘라 부른 것은 마을의 지형이 연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운남면에서는 연(蓮)과 관련된 지명이 두 군데 있다. 연리와 하묘리다. 연은 물이 있어야 자라는 특성처럼 물과 뗄 수가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연리와 하묘리는 물길이 좋았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채(蔡)씨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에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이후에 들어온 성씨가 평산신씨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를 보면 ‘현경면 평산리에 살던 평산신씨 신창서(申昌瑞, 미상~1583, 자-문규, 호-둔암)가 수원이 풍부하고 농사짓기에 좋은 터를 찾아나서 정착한 곳이 지금의 원하묘마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신씨들의 족보를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신촌마을의 부수막골에 평산신씨들 문중산이 있는데 그곳에 신창서의 비가 있어 입향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입향조를 확인할 수 있는 성씨는 강릉유씨다. 강릉유씨 입향조는 유세생(劉世生, 미상~1702)이다. 원래는 고창군 고사면에서 대대로 살았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경남 고성군으로 옮겼다. 공은 형인 이용(以用)과 경남 고성에서 1600년대 후반에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무안으로 왔다. 이용은 현경면 용정에서 자리를 잡았고 세생은 이 마을로 옮겨온 것이다. 현재도 강릉유씨들은 이 마을에 많이 살고 있다. 망운면 용교에도 유씨들이 살고 있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의 중간에 이 마을 출신 강릉유씨 조상들을 모신 봉안당이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형국이 조리형이다. 작은마을과 큰마을이 있는 데 사이에 조산이 있었다. 현재 마을회관 뒤쪽이다. 이 조산(造山)은 풍수적으로 허한 곳에 비보(裨補)의 뜻을 담아 인공적으로 쌓은 산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높이가 있는 큰 봉우리여서 한국전쟁 때 신안군 고이도의 왕산과 이 마을의 조산과 망운면의 조산에 봉화가 올라 통신수단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참고로 둔전마을에도 조산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망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전쟁 때 운남면 좌익들의 통신수단은 아니었느냐고 물었으나 주민들은 아니라고 한다. 지금 조산은 소유주가 팔아버려 산이 없어지고 밭이 되었다. 주민들은 이 산이 허물어진 것을 대단히 아쉬워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민들 놀이터였고 마을의 허함을 보존해주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성씨
평산신씨, 강릉유씨 외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지명(地名) 변경을 보면 1789년의 문헌인 《호구총수》에 영광군 망운면 하묘촌으로 처음 나온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는 무안군 망운면 하묘리, 1917년엔 망운면 하묘리 하묘마을로, 1987년엔 운남면 하묘리 하묘마을로 나온다. 현재 이름처럼 하묘 앞에 ‘원’을 붙인 것은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
행정구역 변경
조선시대에는 영광군 망운면 소속, 1910년 목포부에 편입, 1983년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두곡, 둔전, 팔학, 원하묘, 신촌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이 마을은 망운면에서 손꼽히는 부자 마을이었다. 망운 운남 어느 지역보다 물이 풍부해 농사짓기에 좋은 터였을 뿐 아니라 주거 환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산이 개발되고 마을 주변에 울창하게 자라던 소나무들이 없어지면서 마을이 황폐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는 마을 주민들이 갖는 정신을 상경하애(上敬下愛)라 나타내고 있다. 즉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한다는 정신이다. 주민들이 검소하고 근면하다. 인정이 넘치면서 화합이 잘돼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자랑이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 입구는 압해 현경 간 4차선 도로가 나 있다. 원래 옆 마을인 신촌 마을과 같은 행정구역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리되었다. 야산이 개발되기 전에는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많이 있어서 마을이 아늑한 모습이었다. 마을이 조리 형국으로 제법 규모를 갖추었지만, 현재는 개발이 되면서 마을 주변의 나무들이 남아 있지 않아 삭막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저축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경로당, 마을창고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지금처럼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 이 두 곳에서는 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특히 일본인들이 만든 독샘은 주변에서 명물이었다. 해서 이 마을들은 물이 없어서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다른 마을과 비교할 때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마을 앞에 바닷물을 막았던 원둑이 있는데 그 끝에 포구였던 해지기가 있다. 해지기는 상당히 큰 포구로서 망운의 압창포와 다경진이 있는 성내리 포구와 함께 망운 운남에서 생산되는 물산을 목포 등 도시로 나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큰 돛배와 중선배가 다녔을 때는 주막도 있었다. 주변에 옹기를 구웠던 점등이 있었으며 당산나무가 있는 밭에는 쇠를 다루었던 대장간이 있었다. 해지기에서 점등으로 신촌을 거쳐 두곡으로 나 있는 길은 영해촌이나 죽산 동암에서 망운장으로 가는 큰길이었다. 해서 한때는 번화한 길로 마을이 번성했으리라 여겨진다. 주변의 들을 해지깃들이라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뒤 능선에 아름드리의 큰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마을 앞에 두 그루의 팽나무가 있었다. 수령은 200여 년이며 둘레는 3.5m가 넘는다. 원래는 세 그루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예전에는 줄다리기, 샘제, 걸궁 등 당산제를 걸게 지냈으나, 지금은 사람들이 없어 지내지 못하고 있다. 팽나무 옆에는 조그마한 선돌이 수풀 속에 자리하고 있는데 해지기포구에 정박한 배를 메기도 했다 한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인바위 전설>이 있다. 압해면 고리왕산에 적왕이라는 삼형제가 살았다. 그들은 통신수단으로 성(城)을 쌓아 고이리 왕산, 원하묘 조산, 망운면 조산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위를 상징하는 인장을 연리 연동의 뒷바위, 둔전 와우정의 바위, 망운면 두모아 장제 사이의 바위 밑에 숨겨두고 도망갔다는 인바위 전설이 전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한국전쟁 때 운남-운북의 갈등으로 주민 한 명이 죽었다. 그 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바로 옆 마을이 한국전쟁 기간에 좌익들의 거점이었던 팔학과 두곡마을이 있었음에도 큰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무안향토문화자료 제1책》(무안군, 1987) 2.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3.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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