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곡마을은 양매1리에 속하는 마을로 광산김씨 동족 마을이다. 봉대산 맥을 이은 매봉재를 주산으로 속등과 안산을 좌우로 하여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로 와우형의 자리였다. 마을의 주산인 매봉재는 양매리의 1번지가 시작되는 곳으로 1번지는 모충사이다. 이 마을은 특이하게도 한 구역에 두 마을이 붙어있다. 보통 자연마을의 구분이 지형적 특성을 경계로 되어 있는데 반해 이 마을은 한 지형 안에 문중의 사는 거주지에 따라 구분이 되고 있다. 즉 광산김씨가 사는 지역과 파평윤씨가 사는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하면서 매곡과 외분마을로 구분하는 것이다.
지명유래
매곡(梅谷)의 지명 유래는 매곡사당과 함께 한다. 입향조의 아들인 김득남(金得男, 자-선술, 호-매죽헌, 1601~1637)에게 1832년 충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리자 문중에서는 매곡사당과 충열문을 세웠다. 마을이름도 파평윤씨와 함께 살고 있는 외분매와 분리해 매곡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모충사 주변에 커다란 매화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고 하나 모두 고사(枯死)하고 현재는 매곡강당 앞에 한 그루만 남았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고려조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었던 직제학공 김약시의 후손인 광산 김씨 김억창(金億昌, 자-자정, 1585~1646)이다. 그는 경기도 양주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 모두가 배를 이용하여 피난길에 올랐다. 그런데 바다에서 심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어 정착한 곳이 당시 함평현에 속했던 이 마을이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와우(소가 누워있는) 형국
마을성씨
광산김씨, 파평윤씨 등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의 처음 이름은 불무동(佛舞洞)이었다. 입향조가 들어와 바라보니 영광의 불갑산이 아스라이 보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후 마을지형을 본 따 분매동(盆梅洞)이라 하였다. 분매는 마을이 와우형국에 매화가 많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새터에 파평윤씨 윤득열(1574~1642)이 들어오고 뒷골에 윤형은(1647~1707)이 들어오면서 외분매와 내분매로 분리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 외분매동, 내분매동이 나온다. 또한 1912년의 자료엔 해제면 외분매동, 내분매동으로 나오고, 1917년의 자료부터는 해제면 양매리 외분매동, 덕산리 내분매동으로 법정리가 다르게 나온다. 198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매1리가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전형적인 선비 마을이다. 광산김씨 동족마을로서 많은 벼슬아치들을 배출하여 주변에서 양반마을로 인정을 받았다. 해서 해제면의 다른 지역에 살면서도 외지에서 어디에 사냐고 물어보면 매곡에서 산다고 할 정도로 주변에서 인정받았던 마을이다. 이러한 기풍 때문인지 이 마을을 기점으로 1㎞ 안에는 외분의 금성사, 내분의 분매사, 매곡의 모충사 등 세 개의 사당이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정자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길지로 와우형의 자리였으나,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넓은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다. 마을 주산인 매봉재는 양매리의 1번지가 시작되는 곳으로 1번지는 모충사이다. 마을 중앙에는 매화낙지샘이라 부르는 우물이 있다. 다른 마을처럼 여러 개의 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개만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하고 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마을 입구에 당산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현재는 고사되어 없고 새로 심은 한 그루만 자라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봉대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개니라는 지명이 있다. 개니는 개리(開里)에서 비롯된 말로 마을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후일 주민들은 마을이 깨끗하고 주민들이 어질다 하여 가양이라 했다. 마을에서 가양으로 가는 잔등에 일제강점기 시절 견직공장이 있었다. 견직공장은 나중에 간립학교로 변하기도 했다. 회관 앞을 솔대거리라 했다. 입향조 이후 문중의 여러 사람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에서 내분 마을로 넘어가는 길을 개동채라 했으며 이 마을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잔등을 속등이라 했다. 이 등에서는 정월 보름이면 내분 사람들과 불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충절의 역사가 있는 가문의 마을답게 모충사, 칠효열각, 삼강비, 충열문 등 마을 단위로는 드물게 많은 여러 유적들이 있다. 모충사는 상감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본래 순조임금 대에 건립되어 매곡사당(梅谷祠堂)이라 이름 하고, 병자호란 때 순절한 득남(得男)을 배향하던 사당이었다. 그러나 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매곡사당이 훼철(毁撤)되어 매곡단(梅谷壇)을 설단하여 배향하게 되었는데, 1920년 유림의 발론으로 구지의 서편에 방위(方位)를 동향(東向)으로 하여 사우를 복원하고 경의당(景義堂)이라 하여 제사를 모셨다. 이후 두문동 72현 중 한분인 김약시를 주향(主享)으로 하고 매죽헌 득남(得男)을 종향(從享)으로 모시었는데 2년 후인 1922년 중정일에 사우명을 모충사(慕忠祠)로 개액(改額)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건물은 1920년에 복원된 건물이 낡아 위태롭게 되자 철거하고, 유림과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1984년에 재건축 한 것인데,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서 사우 우측으로 ‘매죽헌김득남유허비’와 ‘충정공김약시충절비’가 있다.
부속 건물로 동쪽은 외삼문이 있고 외삼문 밖의 북동쪽에 매곡강당(梅谷講堂)이 있다. 그리고 남서쪽 입구에는 고직사가 있었으나 1987년 셀마태풍으로 소실 된 후 무안군의 유지와 유림회, 그리고 후손들의 헌성금을 모아 2002년 12월에 새로 준공된 슬라브 건물인 경헌사(敬獻舍)가 있다. 경헌사는 현재 문중에 의해서 추진되는 매죽헌선생 기념사업회의 사무실로도 사용하고 있다. 광산김씨칠효열각(1918년 후손들이 건립)은 마을 입구에 있다. 이 효열각은 2가 2간의 팔작지붕으로 6개의 원형기둥과 사방에 홍살을 둘렀고 입구에는 조그마한 정문이 있다. 내부에는 목판으로 된 정려편액(旌閭扁額) 9점이 걸려 있고, 구조는 둥근 주춧돌을 놓고 둥근기둥을 세웠는데 공포의 조각이 특이하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배출한 5효자 2열부의 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한 것이다. 이곳에는 효자 김성흡, 김육연, 김재문, 김종현, 김재철과 열부 양성이씨(김육연의 처), 진주 정씨(김영호의 처)를 모시고 있다. 충의공 득남과 부인인 밀양김씨의 정려각(旌閭閣)인 충열문이 있다. 충열문은 2가 2간의 팔작지붕으로 6개의 원형 기둥과 사방에 홍살을 둘렀고 입구에는 조그마한 정문이 있다. 내부에는 목판으로 된 정려편액(旌閭扁額) 2점이 걸려 있고, 구조는 8각 기둥 모양의 주춧돌을 놓고 둥근기둥을 세웠는데 아랫부분을 보수한 흔적이 있다.
삼강비는 충열문과 칠효열각 사이에 있다. 김득남 밀양김씨 김성?(1728~?), 김육연(1747~1778), 김재문(1786~?), 김종현(1825~1893), 김철현(1800~?), 김성정(1760~?), 진주정씨(김영호의 처), 나주임씨(김준수의 처) 등의 충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1912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75㎝, 두께는 36㎝이다.
상감산 아래 광산김씨 제각인 경모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까지 갖췄다. 여기에 쓰인 재목은 매곡마을에 있었던 모충사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서 와해될 때 그대로 가져와 개축한 것이다. 상감산은 양매리의 주산이면서 광산김씨 문중산이다. 이곳에 입향조를 비롯한 문중 어른들의 묘가 모셔져 있다. 산 입구에는 충의공 매죽헌 김선생 신도비가 있다. 여기에 특기할만한 묘가 있다. 이른바 ‘충노박복지묘’가 그것인데 묘지 입구 한 쪽에 자리하고 있다. 매죽헌공이 철곶(현재 양화대교)첨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화도 싸움에서 청군과 교전 중 전사하자 시신을 끝까지 지켰다. 또한 박복은 이런 사실을 고향에 알리고 시신을 운구하여 매곡마을까지 왔다. 이후 끝까지 매곡에 살면서 광산김문에 충성을 다 해 문중에서 그의 충정을 기려 묘도 쓰고 비도 세운 것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잠와유고집》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근대 인물로는 독립유공자이며 항일의병장이었던 김익수가 있다. 김익수(자-문옥, 호-절당, 1880~1920)는 원래 서울에 살았던 후손이다. 면암 최익현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의병대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김구선생과 교유하며 활발히 투쟁을 하던 중 일본군에게 두 차례나 잡혔으나 모두 탈출하였다. 이 마을에는 1908년에 피신 겸 정착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1909년 일본군의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 때 몽탄면 사창리에서 잡혀 9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이 마을에서 휴양하던 중 일본군의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에 별세하였다. 1980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른바 해제 4선생 중의 한분인 잠와 김용수(1865-1940)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경술국치 때는 단을 쌓고 통곡을 하며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 또한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해제초등학교 설립할 때 부지를 기증하기도 했다. 《잠와유고집》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