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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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학2리 해제면 장성동 작성
  • 장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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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49세대, 총81명(남32, 여49) / 2024. 5. 기준.
자연마을 구성
이 마을은 해제면 소재지에서 무안 쪽으로 1㎞ 가량 오다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만나는 마을이다. 도성과 이방마을 사이에 있으며 학천동과 토치, 일부, 장성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지명유래
장성은 용학2리에 속한 마을로 두 개의 장승이 있다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처음엔 장승마을로 부르다가 차츰 장성마을로 부르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주변에 큰 바위가 많이 있어 장석(長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911년경 마을이름을 개칭할 때 마을 앞 언덕이 성처럼 쌓여있다고 해서 장성(長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이런 사항들을 모르고 있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 신안주씨가 처음 들어왔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주철이 먼저 왔는지 그의 손자인 주연일이 먼저 왔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마을유래지》에서는 “1670년경 신안 주씨 주연일 3형제가 화순 능주에서 거주하다가 바다와 가까운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되어 집을 짓고 살았다. 이후 형은 영광으로 동생은 신안으로 이거하고 주연일만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무안세적지》는 “신안주씨가 입향한 연대는 효종 대로 주연일의 조부인 주철이 나주에서 세거하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입향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무안에 온 신안 주씨의 가계를 보면 신안주씨 삼강비에 나와 있는 주몽룡(朱夢龍, 1563–1633, 자-雲中, 호-龍巖)의 뒤로 주혁달–주봉명-朱 喆(자-明仲, 호 -海山, 효종 代)로 이어진다. 주철은 주몽룡의 증손으로 나주에서 세거하다가 시절이 어지러워 이곳에 정착하였다. 공은 생각이 반듯하고 세속의 이익을 탐하지 아니하며 고기를 잡고 밭을 갈고 책을 읽으며 가풍을 세웠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신안주씨가 주를 이루는 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처음엔 장승마을로 부르다가 차츰 장성마을로 부르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주변에 큰 바위가 많이 있어 장석(長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911년경 마을 이름을 개칭할 때 마을 앞 언덕이 성처럼 쌓여있다고 해서 장성(長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민들은 이런 사항들을 모르고 있었다.
행정구역 변경
이 마을의 지명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과 1917년의 자료에는 장성동(長城洞)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입석을 세울 때는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세운 것이다. 장승은 보통 마을 입구 길을 사이에 두고 서있는 것이 보통이나 이 마을의 장승은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만큼 바닷길이 활성화 됐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실지로 이 마을에는 점등이란 지명이 두 군데서 나온다. 주생산품은 쌀, 고구마, 마늘, 양파이다.
주요시설
용학교회, 해제어린이집.
마을변화
이 마을이름이 된 할아버지 장승과 애기를 업은 할머니 장승은 현재 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장승 사이에 있는 논은 원래 바닷물이 드나드는 바닷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막은 둑 때문에 농경지가 된 것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새마을창고.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장승(할아버지, 할머니), 모래안들,
동/식물
현재 할아버지 장승은 두 동강이 나 밑둥은 당산나무에 둘러 쌓인 채 그대로 있고 나머지 윗부분은 따로 좌대를 만들어 옆에 세워 두었다. 몇 년 전에 택배 차가 후진하면서 장승을 밀어 두 동강을 냈기 때문이다. 원래 할아버지 장성은 높이 2m로 인위적인 작품은 아니나 사람 형체를 하고 당산나무 뿌리에 비스듬히 박혀 있었다. 장승이 당산나무 뿌리에 둘러싸인 이유는 장승 옆에 당산나무를 심어 그 뿌리가 자라면서 장승을 감쌌기 때문이다. 애기를 업은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애기 장성이라 부르는 맞은편의 입석은 높이 82cm로 할아버지 장성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다. 할멈장승이라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아래에 섬등이라고 불렀던 점등이 있었으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안소캐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 큰 옹기가마가 있었다는 것을 볼 때 바다를 통한 옹기 거래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앞들을 모래안이라고 불렀는데 간척의 결과로 모래가 쌓여서 불렀던 지명이다. 안소캐 또는 바닷속 개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개인데 예전에는 그곳에 큰 옹기 가마터가 있었다. 그 외에도 뒷묏간 안산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마을 뒤에 고인돌 2기가 있는데 현재는 김해김씨 문중의 무덤 뒤 치장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신안주씨 삼강비와 제주양씨 열부비가 있다. 삼강비는 충신 주몽룡(1563–1633), 효자 주중식(1866-1918), 열부 제주양씨(1888-1952) 등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1920년 후손들이 건립한 비다. 주몽룡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무열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주중식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하늘에 닿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제주양씨는 남편이 금강산 구경을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금강산까지 가 시신을 거두어 고양에 안장했으며 죽을 때까지 개가를 하지 않았다. 마을 입구 용학교회 주변 신선등이라고 부르는 곳의 밭에 3기의 몰무덤이 있었다. 밭 경작자의 말에 의하면 밭을 개간하면서 무덤을 파 보니 비교적 반듯한 석판이 몇 개 나왔으며 두께도 상당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등잔 주전자 그릇 등 생활용기 등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현재는 없다
설화
예전에는 명절 때 할아버지 장성 애기 장성 큰샘 순으로 농악을 치며 당산굿을 치뤘으나 현재는 마을 굿은 지내지 않고 개인이 간소하게 제를 지내고 있다. 장승과 관련된 전설을 안고 있는 장승 밑의 논들은 드물게 보이는 상답이었다. 아무리 가물러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장승을 마을의 질병 예방과는 관계없이 계선주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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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11.0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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