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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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암1리 운남면 원동암 작성
  • 원동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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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31세대, 인구 53명(남31, 여22) / 2025.12.기준.
자연마을 구성
「동암리(東巖里)」는 운남면 소재지에서 동남방향으로 3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청계만을 마주하고 있다. 원래 무안군 현화면 지역으로 큰 바위가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암」이라고 불렀다. 이에 속한 동암1리 「원동암」은 운남면 소재지에 이르기 전에 좌측으로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 왼쪽에는 모래산, 오른쪽에는 ‘상투머리’라는 독특한 형상의 부리가 자리하였고, 앞으로는 청계만 바다가 펼쳐진 배산임해(背山臨海)의 지형이다. 또한 마을에는 1771년에 건립된 「무안 동암묘(務安 東岩廟)」가 있어서 자연의 지형적인 특색과 유서 깊은 역사를 같이 간직한 마을이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의 기록으로 보면 ‘처음에는 「전자리」라고 부르다가 이후 동쪽에 있는 바위라고 하여 「동암(東巖)」이라고 하였으나, 다시 「원동암(原東巖)」이라고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라고 한다. 하지만 《호구총수》에는 「전자리」가 「하전좌리」, 「전좌리」 등으로 나오는데, 훨씬 전에 기록된 《호구총수》(1789)의 지명을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에서 오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김해김씨 김준희(金俊希)로, 선조 대에 대대로 살아왔던 영암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영산강변에 왜군의 출몰이 잦은데다가, 이러한 연해(沿海)의 왜적을 토벌하려는 관군의 출입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이주한 곳이 이 마을이라고 한다.(《무안세적지(務安世蹟誌)》 김준희(金俊希) 조) 이러한 김해김씨 이외에도 여러 성씨들이 이거해서 살고 있으나 그들의 입향 유래는 자세히 전하고 있지 않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원동암」마을은 뒤로는 주산이 받쳐주고 앞으로는 풍요로운 바다가 펼쳐지며, 좌우로는 특색 있는 지형이 마을을 안전하게 감싸서 안아주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배산임해 명당으로 풀이된다. 이에 유서 깊은 역사유적까지 더해져 주민들의 안정과 건강은 물론 풍요로운 산물과 문화적인 번영까지 약속하는 매우 길한 터전이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 명칭은 원래 「전자리」라고 부르다가 이후 동쪽에 있는 바위라고 하여 「동암(東巖)」으로, 그리고 「원동암(原東巖)」으로 불렀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현화면에 속한 중촌리, 하전좌리, 전좌리 등으로 나오며, 1912년의 자료에서는 현화면 동암리, 죽산리, 신기도, 서촌과 함께 동암리로 지명이 변경되어서 나온다. 이어 1917년에는 망운면으로 관할이 바뀌어서 망운면 동암리의 동암, 죽산, 신기동, 영해촌, 석교촌, 서촌으로 나온다. 1983년에 망운면과 운남면으로 분리되면서 운남면 동암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톱머리 간척사업이 완공되기 전에는 마을 앞바다와 갯벌 등에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어업을 할 수 없어서 아쉬워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1980년대 창포만이 막히면서 마을환경은 많이 변했다. 왼쪽의 모래 산이 없어지고 마을 앞의 백사장이 사라지면서 아늑했던 마을은 삭막한 풍경이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봄철과 가을철에 주민들이 잡았던 낙지가 잡히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는 하루 저녁 3시간 정도 낙지잡이를 하면 보통 30~40마리를 잡아서 농사 및 가용으로 사용하였다. 요즈음엔 5~6시간을 잡아도 5마리 잡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최근에는 낙지를 거의 잡을 수 없다. 마을 앞에는 양과 같이 생긴 밈섬(맨섬, 또는 소지도(沼池島))이라는 섬이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원동암경로당(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원래 마을 뒤로는 병풍처럼 산이 감싸고 있었으며, 왼쪽으로는 모래산이 오른쪽으로는 상투머리라는 부리가 있어 자연환경이 전후좌우가 잘 짜진 마을이었다. 더구나 마을 앞으로는 2km가 넘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있고, 해당화가 피어 있어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마을 뒤에는 ‘궁게들’이라는 간척지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물길을 막으면서 형성된 들인데 들의 모습이 갯가의 ‘궁게’를 닮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궁게’라는 게는 없고 ‘남게’를 ‘나무에’로 풀이하듯이 ‘궁게’가 ‘구멍에’의 뜻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궁게’는 일반 ‘게’의 의미를 지닌 지명으로 보인다. 여기서 생산되는 쌀은 밥맛이 최고여서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이 마을에서는 ‘사도세자당제’ 또는 ‘당제’라 해서 제를 모셔왔는데, 먼저 동암묘에서 제를 지내고 마을의 중앙에 있는 당산나무에 가서 다시 제를 지냈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음력 정월보름 밤에 상위신(上位神)인 사도세자와 하위신(下位神)인 당산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심, 현재는 음력 2월 15일에 지냄’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현재는 당산나무가 말라 죽어버린 관계로 동암묘에서 ‘사도세자당제’만 지낸다. 제사를 지낼 때는 비린 음식을 먹었거나 상가에 조문 갔던 사람은 ‘동티난다’라고 하여 참석할 수 없으며, 또 그달이 산달(産月)인 임신부는 다른 마을에서 아기를 낳고 오도록 하였다. 또한,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일주일간 몸조심, 말조심, 마음조심을 하였다. 또한, 제사 사흘 전부터 샘을 가두었다. 이 말은 샘에 금줄을 쳐서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황토를 뿌려서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에 사도세자당 옆에 한 무당이 집을 짓고 기도하며 산 적이 있었다. 기도를 열심히 올리며 치성을 드리던 그녀는 얼마 후에 마을을 떠났다. 떠나면서 ‘사도세자당의 기운이 너무 세 감당할 수가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떠난 것이다. 같은 유래와 성격을 지니는 당제가 신안 수도의 ‘장조단’에서도 지내고 있다.
유물, 유적
이곳에는 ‘사도세자당’이라고 일컫는 특별한 사당인 ‘동암묘(東巖廟)’가 있다. 주민들은 이 마을에 사당이 들어선 것은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춘 데다 마을 주변의 풍광이 아름다워서 생긴 것이라 여기고 있다. 동암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건물 내의 바닥에는 중앙에 오석(烏石)으로 된 장조황제 위패가 놓여 있다. 또한 묘실 좌우로 ‘동암묘중수기’ 등 4기의 편액이 걸려 있으며, 사우 입구에는 수령 100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있고 좌측에 ‘장조황제동암묘비(莊祖皇帝東巖廟碑)’가 세워져 있다. 향토문화유산 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설화
이 사당은 현재까지 네 번의 변화를 겪었다. 1777년(정조 1년)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바로 그 해에 이 마을의 촌로인 성(成), 이(李), 박(朴)씨의 꿈에 한 귀인이 나타났다. 마을 앞에 배 한 척이 나타나더니 한 귀공자가 내려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를 보러 모여든 마을 사람들에게 “나는 선왕(先王)의 세자이니라. 원한이 뼈에 사무친 채 나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이곳에 이르렀느니라. 이곳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내 영혼이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니 그리 알라” 하고는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튿날 주민들이 모여서 서로 지난밤 이야기를 하던 중 세 사람의 꿈이 같은 내용인 것을 알고는 어떤 의미가 있는 줄 몰라 궁금해하면서 헤어졌다. 밤을 맞은 세 사람에게 또다시 세자의 혼령이 나타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다음 날에 다시 모인 세 사람은 똑같은 현상에 놀라워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고 있었다. 다음날 ‘바다에 뭐가 떠내려온다’라는 주민의 외침에 나아가서 살펴보니 까만 궤(櫃) 하나가 바다에 떠 있었다. 그제야 이틀간의 현몽이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정성스럽게 모셔 와 제단을 쌓고 모시니 이것이 ‘동암묘’의 첫 번째 단이었다. 그러다 폐서인이 되었던 세자가 그의 아들 정조에 의해 복위되면서 제단을 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도세자가 다시 촌로들의 꿈속에 나타나고 마을에 재액이 생기자 인근 유림들과 함께 다시 사우를 세워 제사를 모시니 1874년(고종 11년)이다. 제단이 두 번째 변화를 겪은 것이었다. 이후 1899년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조황제로 추존되면서 단을 훼철하였다. 이후 다시 1918년 사당을 세워 면민들이 모시니 세 번째 변화인 사당이고, 1971년 현재의 모습으로 동암묘를 중건하여 군수가 제주(祭主)가 되어 모셔오다 현재는 마을 주민만의 제사가 되니 네 번째 변화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기존 조사 자료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이 마을을 중심으로 진행된 6.25 한국전쟁 시기의 마을간 이념 갈등과 혼란으로 피해가 적지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운남면 출신 소설가 김웅 선생이 쓴 장편소설 『죽창』(세손출판사, 1996)에는 소설의 주인공 박기태(두곡 출신)의 내연녀 개똥어멈과 암암리에 좌익들에게 물자를 공급했던 정동출이 이 마을 출신이고, 망운으로 가는 교통 길목인 「팔학」에서 근거리이며 외져서 발각되지 않고 양식 보급에 용이한 곳이 이 마을이기 때문이다. 소설 『죽창』에서는 이 마을에서 개똥어멈과 정동출이 준비한 식량을 등에 지고 좌익들의 은거지인 보평산까지 이동하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이번에 이를 자세히 조사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는 불편한 일이었다. 6.25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운남지역의 갈등 상황과 이로 인한 민간인 피해 등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되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뒤로 병풍처럼 산이 감싼 마을의 앞으로 트인 청계만을 통해 목포의 유달산에서 광주의 무등산까지 바라보이거나 느껴지던 동암마을의 인문지리적인 풍경을 한시로 노래한 <동암8경(東巖八景)>이 전한다. ‘明沙海棠 밝은 모래 위로 해당화/ 漁村落照 어촌으로 퍼지는 노을/ 桃茂果樹 곳곳에 성한 복숭아 나무/ 僧達歸雲 승달산 돌아오는 구름/ 木浦儒山 목포의 유달산/ 光州瑞山 광주의 무등산/ 遠浦歸帆 먼 포구로 돌아오는 배/ 江湖漁大 무안강의 성한 고기잡이 -東巖八景(동암8경)’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1. 《마을유래지》(무안군, 1987) 2. 《마을역사자료조사》(무안문화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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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03.2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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