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는 동암2리에 속한 마을로 새로이 터를 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주민은 마을의 지형이 마치 기(基)자 형국이어서 신기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마을은 웃담터, 아랫 담터, 서촌, 떼집, 주막 너머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조선 중엽 마을 입구에 장안이 있어 마을 주위가 흙과 돌을 섞은 담으로 쌓여 있다고 하여 「담래」라고 불렸다 한다. 그 후 해주오씨(海州吳氏)가 터를 닦고 살다가 나주임씨(羅州林氏)가 들어와 합일합병 때 「신규」로 고쳐 부르다가 「신기(新基)」로 다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래 「담터」라고도 불린 이 마을은 예전에 목장이 있어서 「목장안터」라 부르기도 했다. 목장을 둘러싸고 있는 긴 담 안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해서 「담터」라 한 것이라 보인다.
마을형성(입향조)
담터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해주오씨 오처태(영조 대, 자-汝成)이다.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는 오처공(吳處恭)으로 나오나 해주오씨 족보를 확인한 결과 오처태(吳處泰)였다. 공은 함평군 나산에서 거주하였는데 화재를 당해 1730년대에 살기 좋은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한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공은 ‘늘 바른 몸가짐과 어진 행동으로 주변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서촌 마을에는 1600년대에 나주임씨 임심(林沈)이 처음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며 예전에는 10가구가 넘는 여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한 가구만이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초기에는 임씨, 오씨가 주로 거주, 현재는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상 지명 변화는 1789년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현화면 증촌리, 하전좌리, 전좌리 등으로 나온다. 떼로 만든 집을 짓고 살았다 해서 「떼집」이라 했으며, 죽산마을 서쪽에 거주한다 해서 서촌, 신기저수지 주변의 주막 부근에 있다 해서 「주막 너머」 등으로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1912년 자료에는 현화면 동암리, 죽산리, 신기동, 서촌으로 나온다. 1917년에는 망운면 동암리 동암, 죽산, 신기동, 영해촌, 석교촌, 서촌으로 나온다. 1987년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경술국치 때에 ‘신규’로 고쳐 부르다가 ‘신기’로 고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마을 이름이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으나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현화면 신기동(新基洞)으로,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망운면 신기동(新基洞)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는 마을 주변이 울창한 숲이었으나 현재는 개발로 주변이 모두 황토밭이다. 마을 길이 닦여지기 전에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는 밭들이었다.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친목계, 위친계
공동이용시설
신기마을회관, 신기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은 당개산(죽산 마을 뒷산으로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 안산 역할을 하고 있으며 두 차례 간척(일제강점기와 50여 년 전)으로 주민들은 넓은 농토를 갖고 있다. 장안터 주변에 건넷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었다. 전하는 말로는 그 샘은 주민 천호(千戶)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수량이 풍부했다고 한다. 지금은 바위는 묻혀지고 방죽도 메워져 논이 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당시에는 사방에 네 개의 커다란 돌들이 있고 샘 주변에는 선돌이 서 있었다. 주변에 큰 고랑이라 부르는 골이 있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 입구에 말무덤(말맷등, 몰무덤)이 있다. 근래 들어 주민들이 힘을 모아 봉분을 새로 만들고 그 위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예전에는 훨씬 더 큰 봉분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말무덤을 대단히 신성시했다. 무덤에 훼손이 있으면 마을에 큰 재앙이 닥친다고 믿고 있어서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효열부김령김씨지비’가 있다. 원래는 마을 앞에 있던 것인데 옮겨온 것이다. 효열부 김씨는 주민인 오정묵의 처로 젊어서 혼자 되어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아이들을 잘 키워 칭찬이 자자하였다. 주민들과 후손들이 그 기상을 기리기 위해 1940년에 세운 비다.
마을 동쪽 오목한 곳에 「장안터」라 불리는 곳이 있다. ‘장안터’의 지명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목장 안터의 의미가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이곳을 경작하는 주민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기왓장을 볼 수 있었으며, 조금만 깊이 파면 운남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돌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커다란 무덤으로 보이는 봉분이 있었다고도 한다.
목포대학교에서 발간한 《문화유적분포도》를 보면 ‘신기마을 유물산포지’가 나온다. 마을 서쪽에 있는 양곡저수지 주변에 위치하는데 신성들이라 부르는 저평한 구릉에 해당한다. 현재 과수원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유물은 다량의 회청색경질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은 한국전쟁 때 33명의 주민이 피해를 입었던 마을이다. 이른바 운남-운북의 갈등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두곡 원동 마을과 함께 한국전쟁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봤던 마을이다. 이 마을이 그렇게 큰 피해를 봤던 이유는 좌익사상에 물든 주민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계면 사마리 전리에서 누이를 따라 이사 온 사람으로 한국전쟁 당시 군당위원장을 역임할 정도로 핵심 좌익 성향의 사람이었다. 주민들은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사상이 지역 간 갈등에서 피를 부르게 된 것이다.
희생당한 사람들은 돌로 맞아 죽거나 칼과 죽창에 찔려 죽기도 하였으며 생매장당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한 집안에서 6명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당시에는 제일 무서웠던 것이 죽어있는 시체를 보는 것도 아니고, 호랑이나 사자 같은 동물이 아니라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주민 간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 마을 주민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활동적이고 개혁적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연극 등을 통해서 주민들을 개혁시키고자 했고 단결과 협동이 잘 되었던 마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피해가 컸는지도 모른다.
상세 내용은 운남 출신 소설가 김웅이 전 3권으로 쓴 장편소설 『죽창』(세손출판사, 1996)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한국전쟁 당시 10세였던 작가는 소설의 서문에서 당시의 참상을 사실에 근거를 두고 『죽창』을 썼다고 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앞 저수지에 홍련이 자라고 있다.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간척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저수지의 면적은 주민들의 말처럼 백 평 부족한 만 평의 넓이다. 일제강점기 때 목포에서 사법서사를 하던 해주오씨 오경배가 홍련 씨앗을 뿌린 것이 계기가 되어 홍련이 자라는 저수지가 된 것이다. 늦은 봄부터 여름이 되면 빨갛게 피어오른 홍련의 자태가 주민들에게 색다른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