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永海)」 마을은 하동정씨 집성촌으로 감태미(하전자리), 자막골, 영해촌으로 이루어졌다. 이후에 김씨, 서씨들이 들어와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영해 마을은 행정구역상 동암4리에 속하며 운남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4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바다 맞은 편으로 대섬을 가운데 두고 구로리와 마주보고 있는 어촌마을이다.
지명유래
지명 유래는 ‘영원히 바다에 있는 섬마을’이란 의미로 영해라 했다고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으나, 주민들은 자세히 모르고 다른 기록도 없어 확실치 않다. 마을 입향조인 하동정씨 족보에는 영호(永湖)라고 나오는데, 간척사업을 하기 전에 물이 들면 마을 안쪽에 거대한 호수가 형성되어 이것을 보고 영호(永湖)라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입향조를 하동정씨 정예홍(鄭禮弘)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나 《입향시조와 성씨자료》를 보면 정선일(鄭宣日, 1654~1692, 하동인, 호-쌍류당)로 나온다. 정선일의 선조들은 나주 금안동에서 세거하다가 함평의 감방산 아래 금곡으로 이거하여 문호를 이루었다. 정예홍은 정선일의 부친으로 무안에서 거주한 일은 없다. 단지 후일 그의 무덤을 후손들이 이 마을 자막골로 옮겨온 것이다. 한 주민은 연리 저동의 입향조와 이 마을 입향조는 형제였다고 하지만 족보를 통해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자료에 따르면 정선일은 ‘덕을 기르고 숨어 살고자 함평의 금곡을 떠나 바다로 들어와 영해촌에 입향하였다’고 한다. 공은 재질이 밝고 총명하여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으며 영욕을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하동정씨, 김씨, 서씨 등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현재 주민들은 창포만 간척으로 물살의 흐름이 변해 피해를 많이 보고 있다. 특히 골프장 운영으로 거르지 않는 오염물질이 그대로 방류되어 영해만을 오염시켜 피해가 막심하다고 한다. 해양 생태계의 변화로 낙지, 김, 석화 양식에 피해를 많이 보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피해 보상을 청구하였으나 보상이 되지 않고 있다.
마을에서는 1976년에 전기를 끌어오기 위해 융자를 받았던 융자금을 지금도 내고 있었다. 이른바 ‘농어촌융자금’이란 명목으로 전 주민들에게 징수하고 있었다. 이는 마을이 섬이었을 때 정부에서 마을까지 전기를 넣어주지 않고 이웃 마을인 죽산리까지만 전신주를 연결하였다. 그러자 주민들 스스로 돈을 갹출하고 융자를 받아 전기를 시설하면서 생긴 빚이다.
주요시설
영해공원, 영해교회, 영해축산, 풀비치펜션
마을변화
원래 이 마을은 하루에 두 차례씩 썰물일 때 육지와 연결되는 섬이었다. 물이 들 때는 마을이 섬으로 변하여 영해도라고도 하였다. 육지와 연결된 것은 서울 사는 이창손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과 대박산 마을을 연결하는 사업을 했으나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1970년대에 구일산업에서 완성시켜 육지가 되었다.
섬으로 있을 때 가장 큰 문제가 아이들의 학교 문제였다. 물 때(밀물과 썰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때)에 맞춰야 해서 마을 초등학생들은 항상 등하교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10시에 등교했다가 저녁 8시가 넘어 하교하기도 했다.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여 늘 위험하기도 했다. 그러다 한 학생이 밀물 때 노두길을 건너 등교하다 물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주민들이 아이들의 안전을 위하여 분교 설치를 무안교육청에 강력하게 건의하여 1958년 교실 두 개의 운남영해분교가 설치되었다. 비록 교실 두 칸의 복식수업을 하는 작은 학교였지만 1999년 폐교될 때까지 이 마을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던 학습의 전당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4학년까지만 가르치고 5학년이 되어서는 운남 본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학생들을 가르쳤던 정찬백 선생께서는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여, 2023년 92세로 별세하였다. 현재 영해분교 터는 정찬대 씨 가족 소유물로 주택으로 개조하여 부인과 아들이 거주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정씨문중계, 동계
공동이용시설
영해마을회관, 영해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청계만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 앞에는 세 개의 섬이 보인다. 하나는 청계면 구로리 앞의 대섬이다. 다른 하나는 마을 바로 앞의 젖섬 또는 젓둑이라 부르는 유도(乳島 )다. 이 섬에는 나주김씨의 묘가 있다. 또 하나는 섬이 길다고 하여 띠섬이라 부르는 모도(茅島)가 있는데 모두 무인도다.
이 섬들 사이에 썰물이면 모습을 드러내는 바위가 있다. 강중내바위 또는 주네 바위라 부르는 이 바위는 간척이 되기 전에는 이 마을 주민들에게 육지로 갈 수 있는 알림이 역할을 했다. 즉 이 바위가 썰물로 모습이 보이면 육지로 연결된 노두가 보이기 때문에 운남에 가려고 하는 주민은 집을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마을의 남쪽에 있는 개로 「갓등개」가 있다. 마을의 서쪽에는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의 「용계이산」으로 부르는 지명이 있으며 그 너머를 「망넘이」라고 한다. 또한 산이 소라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소라골」도 있다. 하동정씨 선조 묘들이 있는 「자막골」이 있으며 죽산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한아지」란 지명이 있다. 이곳에는 마을 주민들이 전부 이용했던 「한아지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었다. 수량이 풍부했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고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는 둘레 2m 50cm가 넘는 오래된 팽나무인 당산나무가 있다. 목포대학교에서 나온 자료에는 이 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입향조가 심었으리라 짐작되는 아름드리가 넘는 구수 나무가 있었으나 태풍 때 가지가 부러지고 넘어져 고사했다.
유물, 유적
마을 앞에 1941년에 세워진 「광산김씨효열비」가 있다. 광산김씨는 하동정씨 가문에 시집와 19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절하며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해 주민들의 귀감이 되어 후손들이 세운 비석이다. 현재는 비석이 넘어져 있어 후손들은 다시 세우려 하고 있다. 2025년 9월 재조사 시 넘어졌다는 비석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고 노인회장도 비석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자막골에 「영해공원」이 들어서 있다. 낚시터와 해수욕장을 갖추고 있어 오래전부터 관광지 개발이 예견되었다. 일출과 일몰을 다 볼 수 있어 주변 경관이 수려하다. 매년 운남면 사회단체들 중심으로 1월 1일 해맞이 행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