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면 성내1리 「남촌」마을은 운남면 남쪽 끝자락 바닷가 마을이다. 땅앞로가 마을 앞을 가로지르며 놓여있고, 마을 뒤에는 계당산이 있다. 마을 앞에는 돌고지(돌꼬지)라 부르는 둔덕이 있다. 이 마을 앞바다는 예전 영산강과 서남해안의 무역항로였으며 목포에 닿는 뱃길이었다.
마을 진입로 방향 바닷가의 누정 옆에는 2012년에 세운 통합기준점(평탄지에 설치되어 측지, 지적, 수준, 중력 등 다양한 측량 분야에 통합 활용할 수 있는 다차원·다기능 기준점. 경위도(수평위치), 높이(수직위치), 중력 등을 통합 관리 및 제공하는 국가측량기준점이다) 표석이 있다.
지명유래
계당산 남쪽에 있다 하여 남촌(南村)으로 불렸다. 《호구총수》(1789)에 「남촌」마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다경진성내(多慶鎭城內)’와 ‘다경진성외(多慶鎭城外)’로 구분되어 있다. 다경진성을 경계로 성안과 성밖으로 성내리 일대의 마을을 나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 자료(《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조선총독부, 1912)와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조선총독부, 1917))부터는 망운면 남촌으로 나온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자세한 입향유래나 입향조는 알 수 없다. 《마을유래지》(1987)에 따르면, 맨 처음 낭주최씨(朗州崔氏)가 들어왔고, 다음으로 창녕성씨(昌寧成氏)가 창녕에서 나주, 함평을 거쳐 지금의 남촌에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 가장 많은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이들 성씨보다 뒤늦게 들어와 살았다고 구전된다. 한편 《마을역사자료조사》(2017)에 부연된 내용으로 창령성씨 성기인(成己仁, 1584~1645)이 나주에서 살다 이 지역의 광산김씨와 혼인하면서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한다. 그의 후손 성몽룡(1604~미상)은 항장마을로 들어갔다. 또한 1970년대 30호에 달했던 전주이씨는 1600년대 말 이중민이 연리에서 들어와 자리잡았다 한다. 이외 《마을역사자료조사》(2017)에서는 남촌마을의 입향조의 다른 축을 설명하고 있다. 즉 낭주최씨와 광산김씨 그리고 계당산 행주기씨 등이 각각 입향조로 일컬어진다. 이중 어느 성씨가 입향조인지 알 수 없으나 입향유래는 일치하는데, 거명되는 입향조 모두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다 순절했다는 것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남촌마을 뒤에는 대박산의 맥을 이은 뒷산이 있다. 이 산은 ‘계당산(鷄堂山)’, ‘계당산(桂堂山)’, ‘개당산(個當山)’, ‘저당산’ 등으로 각각 다르게 불리우며, 주민마다 다르게 알고 있다. 《마을유래지》(1987)에서 산의 지형에 대해 ‘뒷산의 모습이 닭의 형국이다’라고 기술하였는데, 다른 주민들은 이 산을 ‘저당산’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조사에서 마을노인회장을 비롯한 주민들은 무안군 《마을유래지》(1987)의 ‘닭의 형국’에서 비롯된 계당산(鷄堂山)이란 산명(山名)에 견해를 같이 하고 있었다.
마을성씨
전주이씨, 광산김씨, 밀양박씨, 낭주최씨, 임씨 등 복합성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성내리 「남촌」마을은 1910년에 목포부로 편입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면리통폐합정책으로 무안군 망운면 관할지로 바뀌었다. 이후 1971년 망운면 관할지에 운남출장소가 새로 설치되었고, 1983년에는 망운면에서 운남면으로 분면(分面)되었고 면사무소가 개설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10여 년 전만 해도 남촌마을 입구 길에는 새우잡이 그물이 좌우로 널려있고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이 잽싸게 손을 놀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마을 앞 바다에서 준치파시가 형성될 만큼 많은 생선이 잡혔으나 새우가 조금 잡히는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을 주민은 어업에서 거의 손을 떼고 있으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소수의 주민만이 어업과 병행하고 있을 뿐이다. 주요 작물은 양파, 벼, 배추 등이다.
주요시설
남촌선착장(땅끝선창), 해안둘레길, 통합기준점표지석
마을변화
남촌마을은 성(城)이 있어 「성안」이라고 불렸다. 성(城)은 1895년에 폐진(廢鎭)되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1531)과 《동국여지승람》(1481)에 기록이 있어 이미 그 이전부터 성이 축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과 마을의 형성시기가 일치한다고 할 수 없지만 이곳의 역사는 깊다할 수 있겠다.
조선 후기 기록인 《호구총수》(1789)에서 성내리 자연마을은 성내(城內)와 성외(城外) 2개 지명뿐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의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1917)에서는 이기촌(耳機村) · 남촌(南村) · 항장리일부(項場里一部) · 현화면도원촌(玄化面桃源村) · 대박산동(大朴山洞) · 학례동(學禮洞) 6개 마을의 명칭이 등장해 그간 행정구역의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을유래지》(1987)에서는 남촌 · 성내 · 농장 · 항장 · 학례 · 대박 · 도원 · 이기촌 등 8개의 자연마을을 들고 있다. 하지만 40여 년 전 「이기촌」마을과 「성내」마을이 통합됨으로써 현재의 7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이로써 성내리는 다경진성(多慶津城)을 중심으로 지역상황에 따라 변화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洞契, 1970년 창립), 부녀회, 노인회
공동이용시설
남촌마을회관, 마을우물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남촌」마을 앞바다는 갯벌로 이루어져 해양생태계가 풍부하게 전개되고 있다.
동/식물
마을 중간께 민가 뒤로는 거대한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뿌리가 깊어 확실하지 않으나 아랫부분이 세 갈래로 나뉘어져 세 그루가 한 몸을 이루듯 기세 좋게 뻗어 있다. 수령도 높고 귀해 보이지만 현재 마을사람들은 이 나무에 대해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청룡고지’는 「남촌」마을 진입로의 급커브를 이루는 지점이다. ‘돌고지(돌꼬지)’는 마을 앞에 있는 둔덕이다. ‘양남계(양낭게)’는 마을에서 선창방향의 둔덕으로 마을과 땅끝의 경계이다. ‘땅끝’은 마을의 땅앞로 끝으로 선창이 있다. ‘짱뚜리 섬’은 선창 앞에 있는 작은 섬이다. 전주이씨 소유로 섬의 정상에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그 사이에 한 기의 무덤을 쓸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한다. 어느 지관이 그것을 보고 그 섬에 무덤을 쓰면 후대에 그 집안에 쌍둥이가 많이 나오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곳에 무덤을 쓴 전주이씨 집안 후손에 다섯 쌍둥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돌섬’은 선창과 짱뚜리섬과 선창 사이에 있는 작은 섬으로 물에 드러난 널찍한 바위이다. 이 돌섬 위에 상석과 비석이 놓여있다. 짱뚜리섬에 무덤을 쓴 전주이씨 집안에서 놓은 것으로 섬으로 건너가기 어려워 건너지 않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라 하며 신기하게도 바닷물이 밀려와도 물이 상석을 넘지 않는다 한다. 현재 짱두리 섬의 묘는 이장한 상태이다. ‘지새미’는 땅끝선창에서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막다른 언덕이다. ‘송엣살’이라고도 한다. ‘선장몰’은 행주기씨들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엉건너’는 선창의 땅앞로에서 마을 쪽의 지점을 가리킨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패총지대’: 선창에서 지새미 방향으로 향하는 해안가 밭둑에서 패총이 발견되었다. 주민들이 ‘지새미’(또는 ‘송앳살’)라 불렀던 이곳은 바닥이 바위층이고 그 위에 흙이 쌓여 언덕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바닷물에 흙이 쓸려나가면서 묻혀 있었던 패총이 발견된 것이다. 현재는 파도에 쓸린 패류들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패총이라 할 규모는 아니다. 목포대학교박물관 발굴조사보고서 《무안군의 문화유적》(1987)에서는 패총과 함께 선사시대 유물인 돌도끼, 돌칼, 삼각형석도편, 경질토기편 등이 발견되어 이 지역이 당시 중요한 생활 근거지였음을 확인해주었다.
‘도산사(桃山祠)’는 무안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1931년 남촌마을 뒤 계당산에 세워진 사당이다. 개백군인 기효근(임란때 선무공신) ‧ 만전당 기자헌(광해군때 정승이며 개백군의 당질) ‧ 수허당 기종헌(개백군의 아들로 병자호란때 공을 세워 행원군에 봉해짐)을 모신 곳으로 매년 음력 2월 15일 제사를 지낸다. 사당입구에 ‘쌍전문(雙全門)’이란 편액이 있는데, 쌍전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을 비유한 것이며, 이들이 지나는 문이란 의미이다. 기자헌은 문관, 기효근과 기종헌은 무관이므로 붙여진 별칭이다. 사당 명칭인 도산(桃山)은 운남면 성내리 행주기씨 집성촌인 도원(桃源)마을의 도와 계당산(鷄堂山)의 산(山)을 따서 붙인 것이다. 도산사 옆에는 현재 4기의 비(신도비 ‧ 기효근비 ‧ 기종헌비 ‧ 장성서씨비(기효근의 부인))가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신도비는 광해군이 하사한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왕족, 정2품 이상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망자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로, 이 신도비는 앞면에 비명만 있고 사적은 생략되어 있다(《마을역사자원조사》, 2017) 하지만, 현재의 육안으로는 비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또 도산사 뒤로는 자연묘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수 기의 봉분이 안치되어 있다.
‘마을우물’: 남촌마을에는 마을 형성시기에 조성된 이 우물이 아직 남아있다. 음용수로 사용하지는 않으나 여전히 수량이 풍부해 주민들이 허드렛물로 사용하고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이종필(李鐘弼, 신명여상 교장), 이종열(李鐘烈, 망운중학교 교장), 이혜나(전남도의원)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김헌문(金憲文, 1555~1592)’은 광산김씨 입향조로 임진왜란때 김천일 장군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으며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기효근’은 행주기씨로 임진왜란의 선무공신에 오른 충신이다. ‘최봉일’은 낭주최씨 입향조로 다경포진의 진교(鎭校)로서 다경진을 지키다 순절했다. 마을 뒤에 있는 낭주최씨 문중묘지에 ‘진교최봉일의사비’가 있다.
거처/생가/묘소
행주기씨세장산, 전주이씨세장산, 창녕성씨세장산, 광산김씨세장산 등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 앞에는 바닷가를 따라 산책할 수 있는 해안둘레길이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땅끝선창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안지역의 감시초소를 비롯한 5개의 감시초소 중 하나가 배치될 만큼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특히 1970년대 신안의 한 섬에 무장공비가 출현하여 비상이 걸린 적도 있었다. 또한 땅끝선창은 흑산도나 자은, 압해 등 신안 사람들이 육지로 나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로 서남해안 포구 중 꽤 중요한 길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