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면 연리는 「운남동」, 「저동」, 「양곡」, 「연동」, 「내화촌」, 「자작」, 「비석동」, 「상동」 8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연1리 「운남동」은 운남면을 종단하는 운해로(809번 지방도로)를 면하고 있으며, 운남면 소재지에 위치한 마을로 면에서는 가장 큰 번화가이다. 도로를 따라 일렬을 이루는 상가들과 이 상가들의 뒤쪽으로는 민가와 농토가 형성되어 있다.
지명유래
「운남동」이 지금의 마을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71년이다. 당시 이곳에 운남출장소가 설치되면서 부터인데, 운남지역 소재지가 있다는 의미에서 「운남동」이란 마을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한편 「운남(雲南)」이란 지명은 예전 이곳이 물이 귀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체로 비는 구름이 남쪽에서 몰려올 때 내릴 확률이 높다고 여겨 풍부한 강우를 바라며 구름 운(雲)에 남녘 남(南)자를 붙여 「운남」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1971년 이전 망운면 관할로 있을 당시에는 사람들이 이곳을 「비석거리」로 불렀다.
마을형성(입향조)
「운남동」은 1930년대 중반 연동에 살던 행주기씨 기의여(奇義如)가 이웃한 연리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터를 잡으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에 저동에서 하동정씨, 내동에서 광산김씨 등이 옮겨와 살게 되면서 마을이 커져 현재의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운남동」은 운남면의 중심에 위치하며, 마을은 뒤로 가면서 모양이 좁아져 전체적으로 삼각형을 이룬다.
마을성씨
마을 주민의 주요 성씨는 하동정씨, 광산김씨, 함평모씨, 나주임씨, 전주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으로 현재 복합성씨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원래 「운남동」을 포함한 연리마을 전체의 지형이 연꽃과 같아서 ‘연동(蓮洞) 또는 연리(蓮里)’라고 불렀다. 이후 현재의 「운남동」 지역은 일제강점기에 민중들의 소작투쟁과 염원이 담긴 두 기의 비석에 세워짐으로써 ‘비석거리’로 불렸으며, 1971년에 운남출장소가 세워지면서 분동(分洞)이 되어 ‘운남동’이 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1974년 7월 1일에 연동에서 분동하였다.’라고 주장하며, 2005년에는 상가 커지고 주민들이 늘어나자 809번 지방도로를 기준으로 ‘운남동, 상동, 비석동’ 세 개 마을로 나뉘었다. 따라서 기존의 운남동은 현재의 축소된 운남동으로 남게 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운남동」은 조선시대 《호구총수》(1789)에서는 영광군 망운면 모시촌과 연동리로 영광군에 속했으며, 1910년에는 목포부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14년에는 무안군 망운면 관할지로 바뀌었다. 이후 1971년 망운면 관할지였던 이 마을에 운남출장소가 새로 설치되었으며, 마을은 운남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1983년에는 망운면에서 분면(分面)하여 운남면이 되고 면사무소가 개설되었다. 운남면 소재지인 운남동은 2005년에 다시 운남동, 비석동, 상동으로 분동(分洞)되어 오늘의 「운남동」이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주민들은 주로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스스로 마을 사람들이 온순하고 순박하여 타지 사람들이 이사 와서 거부감 없이 정착할 수 있는 마을이라고 자랑한다. 그렇듯이 ‘올 때는 빈 가방이어도 갈 때는 묵직한 가방을 들고 나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개방된 마을이라고 소개한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다른 지역보다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역동적이고 활기에 차서 젊은이들로 구성된 ‘마을가꾸기 모임’이 결성되어 마을의 궂은일은 물론 친목과 화합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부녀회가 주축이 되어 매년 경로잔치를 개최하여 다른 마을의 귀감이 되었었다고 한다.
비교적 근래 형성된 이 마을은 인구이동이 잦은 편이며, 한때 상가거리가 번성했지만 지금은 쇠퇴하고 있다. 또한 전체 주민 중 절반이 65세 이상의 고연령으로 노령화가 가속되고 있다. 하지만 노인회를 중심으로 주민들 간의 화합이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주민들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마을조직은 행주기씨문계(1925년 창립), 하동정씨문계(1938년 창립) 등 문중계와 마을가꾸기 모임이 있다.
공동이용시설
운남동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운남동」의 주요 농사품종은 마늘, 양파, 쌀, 배추, 콩 등이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운남동」을 비롯해 인접한 「상동」과 「비석동」은 평지를 이루며, 주변도 벌판이어서 주로 논밭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지가 없는 흙땅으로 지하수개발이 잘 되어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1986년 전남대학교 지춘상 교수팀이 운남동에서 들노래를 채록하여 전남의 농요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이 들노래의 내용은 모찌기 노래의 먼들소리-잦은 먼들소리 그리고 모심기노래의 늦은 상사소리-잦은 상사소리, 논매기노래와 장원질 노래(풍장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주민들은 농사짓는 사람이 많지 않아 따로 농요를 전승하지는 않는다.
유물, 유적
이 마을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의 흔적이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와 한국인 마름 사이에서 신음하는 이 지역 민중들의 염원이 담긴 비석이 그것이다. 이 비석은 현재 운남농약사가 있는 자리에 두 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월악마을 입구에 있는 이현장 씨의 창고 아래에 묻혀있다. 관련된 비석 중 하나는 <서인섭주사공적비>이고, 또 하나는 <영세불망비>이다. 일제강점기에 운남면 일대에 커다란 농지를 갖고 있던 일본인 지주 밑에서 관리인의 역할을 했던 한국인 마름이 있었는데, 그가 신안군 압해면 매화리에 살던 서인섭이었다. 그는 이 지역의 소작인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높은 소작료를 징수했는데, 걷는 방법도 일본인 지주보다 더 독하게 걷는다고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리하여 이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무마해 보고자 소작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은 결과, 서인섭의 덕을 찬양하는 송덕비를 세운다면 소작료를 깎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의견을 모았다. 설마 송덕비까지 세워줬는데 모질게 하겠느냐는 소박한 염원이 깃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작인 중에 서인섭이 무엇을 잘했다고 송덕비를 세우냐는 반대 의견이 많이 나오자, 그렇다면 공적비로 이름을 바꿔서 세우기로 했다.(이때 주동자가 이진택, 기자일, 김채연, 김옥태 등 4인이며 천삼문도 참여했다)
그리하여 소작인들이 비석을 세우고 낙성식을 하는데 당시 의분에 찬 운남청년회 회원인 최금옥, 박채진, 기행도, 천옥봉, 김장봉, 김이봉, 박연규 등 7명이 나서서 낙성식에 참여하려고 운남으로 오는 서인섭을 가로막았다. 식장으로 가려는 측과 막는 측의 싸움이 격렬하여 목포헌병대에서 순사들이 달려와서야 멈출 수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낙성식은 열리지 못하고 청년회원 7명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려 감옥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으며 2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리하여 이들 청년회원 중 박채진(자-현앙, 호-국사, 1903~1952)의 공적을 찬양하는 <국사박채진선생공적비>가 팔학에서 면 소재지로 들어오는 입구에 서게 되었다. 비문은 대종사인 청화스님이 작성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두 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길을 비석거리라 했으며 현재의 운남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기 전까지는 '비석거리'로 불려졌다.
이 외에 1937년 망운공립보통학교 운남분교장으로 인가를 받아 1938년에 개교한 운남초등학교 곧 현재의 운남초등학교 설립의 공으로 세워진 <묵헌하동정문명공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