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동」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약간 떨어진 「운남동」 뒤로 난 저동길의 오른쪽 ‘저동마을’ 표지석을 따라 내려가면 닿는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성한 작은 저수지가 있으며 망운면 송현을 바라보는 바다 쪽으로는 저동 제방이 있어 바닷물을 막고 있다. 두무골(감나무골 또는 시목동), 다리 건너(진천동 또는 참샘골), 저동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옆으로는 둔전-신월 간 2차선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감나무골은 이 시대의 큰 스님인 청화스님이 출생한 마을이다.
지명유래
「저동」마을은 형성 당시 갯벌로써 모시가 많이 자생하였기 때문에 ‘모시가 많은 갯벌’이란 뜻으로 ‘모시개’ 또는 ‘모시울’ 등으로 불렀다. 또한 약 400년 전부터 마을 전체가 모시풀을 재배하여 ‘모시지’라 불렀으며 이후 ‘저동(苧洞)’이라고 불렀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원래 평산신씨(平山申氏) 터였으나 이들은 현재 동암리 신기마을로 이거하고, 숙종 대 하동정씨(河東鄭氏) 정시철(鄭時哲, 1704~1786)이 늘어오면서 하동정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정시철 선생은 함평 자풍에서 세거하다가 1700년대 중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에 정착하였다. 그는 부모와 마을 어른들을 극진히 모셨고, 부모님 사후에는 3년 동안 시묘생활을 하여 주변에 효성의 본이 되었다. 후에 군자감정(軍資監正: 조선시대 군량미 등 군수품의 저장·관리·출납을 맡아본 군자감에 두었던 정3품 관직)에 제수되었다. 정시철 공은 저동의 충효단에 배향된 2충7효 중 1인이다. 이후 이 마을에 함평이씨, 광산김씨, 진주강씨 등이 들어와 살고 있다. 참고로 무안에서 하동정씨 집성촌은 이 마을을 포함하여 동암4리 영해촌이며 현경면 평산리 평산마을에 몇 가구가 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원래 이 마을이 ‘대나무와 소나무가 2중으로 둘러싼 아늑한 분지형국으로 소쿠리형이었다’라고 함은, 대나무의 푸른 기상과 생명력 그리고 소나무의 변치 않는 강인함과 장수를 상징하는 의미가 이중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으로, 풍수지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 하나인 ‘장풍(藏風)의 길지’임을 뜻한다. 또한 이를 통해 분지형을 이루어 지기(地氣)가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혈(穴)자리이며, 이에 더하여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전형적인 촌락을 이루었다는 형국은, 풍수지리에서 물(水)은 곧 재물(財物)을 상징하는 ‘수주재(水主財)’라고 하여, 재물이 유입되어 축적되는 풍요로운 마을이었음을 나타낸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모시가 많이 자라 ‘모시개’, ‘모시울’, ‘모시지’라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모시울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모시촌(毛時村)으로 불렸던 마을 이름은, 일제강점기 이후 아예 한자 뜻으로 바뀌어서 ‘저동(苧洞)’으로 표기되어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변경
조선시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지금의 저동은 영광군 망운면 모시촌(毛時村)으로 등장한다. 모시(毛時)는 모시의 음차(音借)로 추정되며, 1912년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과 1917년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에는 저동(苧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들어와 지금의 저동으로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동은 운남면의 행정구역 관할 변천에 따라 영광군 망운면(조선시대)→무안군 망운면(1914)→무안군 운남면(1983)의 순으로 변화하였으며, 현재는 운남면에 속한 연리 8개 마을의 하나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운남에서는 드물게 양반촌으로 문장가가 많이 나왔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른바 똑똑한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입어서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 실제로 광복 이후 불거진 운북과 운남의 이념 갈등으로 이 마을에서는 20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하루 해방’이라고 부르는 날에 좌익세력에 의해 운남지역에서 대규모의 살상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당사자들이 타계하고 후손들은 서로 화해하고 화합하면서 평화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현재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벼농사를 비롯하여 양파, 마늘, 배추 등의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전통적인 농촌마을로써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저동마을은 여타 시골마을과 같이 노령화가 진행되어 현재 약 10여 가구만 농사를 짓고 있다. 여기에 젊은 후계농 서너 세대에 더하여 귀농귀촌을 한 네댓 세대가 비교적 젊은 층으로 마을에 활력을 넣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하동정씨문계
공동이용시설
저동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예전에 대나무와 소나무가 2중으로 둘러싼 아늑한 분지로 소쿠리형태를 이루었던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는 개간되어 현재의 마을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마을 앞에는 ‘참샘골’이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로 물이 좋아서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물 걱정을 하지 않았다. 특히 주민들이 모두 이용했던 ‘들샘’은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주변 마을사람들은 물이 풍부한 이 마을을 대단히 부러워했다. 마을 앞의 저수지는 일제 말기에 막기 시작하여 해방 후 완공되었다. 얼마 전까지 그 저수지 밑에서는 유리의 원료인 규사와 도자기의 원료인 점토를 채취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서 채취가 중단되었다.
동/식물
마을 이름으로 정할 만큼 풍부하게 자생했던 모시는 이제 저동에서 재배되지 않는다. 간혹 수풀 사이에서 자생할 뿐이다. 또한 민가 사이로 군데군데 군락을 이룬 대숲이 예전의 무성한 대숲을 연상시킨다. 다만 예전부터 존재해온 저동저수지가 남아있어 수생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허천개, 지작골, 신남골, 샘사골, 사랑, 저 건너, 안산, 언재, 영골, 채분골, 생가골, 몽장골, 각골, 삼각골, 산지등, 안밭, 진골, 거룽, 중샘께, 저건너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저 건너’는 절터였던 자리로 중이 마시는 샘이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예전에 당산나무에서 당산제를 지냈으나 당산나무가 고사하면서 사라졌다.
유물, 유적
저동마을에는 무안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충효사(忠孝祠)가 있다. 이곳은 1906년에 김씨‧기씨‧정씨‧이씨 등 4성씨 6인이 모여, 선대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에서 충효단을 세운 데서 시작되었다. 그 주인공들은 충신 김숭조(金崇祖,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문신) ‧ 정기린(鄭麒麟, 1570~1593)과 효자 기응세(奇應世, 1539~1585) ‧ 김상경(金相慶, 자-익충, 호-수신제) ‧ 기우성(奇偶星, 자-양운(良運), 호-연동옹(烟洞翁)) ‧ 정시철(鄭時哲, 자-세용(世用), 호-운천(雲泉)) ‧ 김필홍(金必弘) ‧ 김성태(金聲兌) ‧ 이이계(李以桂) 등이다. 이른바 이충칠효(二忠七孝)로 저동 및 인근 마을에서 충효의 모범을 보인 2인의 충신과 7인 효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를 지냈던 곳이다.
충효사는 삼문을 지나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시멘트 기둥의 맞배지붕이다. 바로 밑에는 강당인 청절당(淸節堂)이 있는데 내부에는 8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이중에서 ‘충효당팔경운(忠孝堂八景韻)’이라는 현판에는 주변의 경치를 읊은 ‘군유만세, 승달천년, 진천모우, 취엽청풍, 연당야월, 송현장춘, 호남낙조, 학동귀운’의 시구가 걸려있다.
이곳에 향사되어 있는 충신 정기린은 선조 때 임란 공신으로서 이 마을 입향조의 5대조이다. 함평 자풍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으나 후손들이 이곳으로 모셔와 충효사에 향사했다. 또한 이 마을 입향조인 효자 정시철의 위패도 있다. 매년 2월 26일에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낸다.
이처럼 이 마을에 사당이 세워졌던 것은 이 마을 출신 유림들의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운남에서는 ‘저쪽(저동)에 정선생, 동쪽(죽산)에 배선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선생이 중심이 된 서당이 운영되었다. 또한 주민들의 교육열이 높아 이 마을 출신 공직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지역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주민인 정문영 선생은 운남초등학교 건립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또한, 충효사 앞의 ‘충효단비명(忠孝壇碑銘)’은 1916년에 세운 것으로 기우만(奇宇萬)이 찬했으며, 충효단비명의 양 옆면과 뒷면에 이 인물들에 관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현재 비명의 하부가 시멘트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다. 위패를 모신 단칠(丹漆)의 사우(祠宇)는 1981년에 개축하였으며, 충효사 옆에 사는 하동정씨 후손(정삼길 씨)이 사당을 관리하고 있다.
설화
저동마을에는 《마을유래지》(1987)나 주민들의 구전을 통하여 특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즉 ‘마을에 수령 700~800년 되는 오래된 팽나무가 있었는데 어른들 기준으로 네 아름이 훨씬 넘는 크기였다고 한다. 그 나무 중간에 구멍이 생기면서 물이 고였는데, 그 물을 마시면 오줌소태, 태산붕알 등 낫기 어려운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이 전해졌다고 한다. 또한 이 나무로 인해 전염병이 마을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관리 부족으로 1967~1968년 대한해(大旱害)때 말라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약수를 떠 가는 주민들은 나무 앞에 복전을 바치고 예를 표하면서 물을 떠갔다고 한다. 특히, 이 나무가 신월, 원동 등에서 망운장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쉼터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현재 팽나무는 없어지고 경작지로 바뀌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충칠효(二忠七孝)의 한 사람인 정기린(鄭麒麟, 1570~1593)은 함평군 수호리 출신 무관으로 하동정씨 정만주(鄭萬珠)의 아들이다. 1585년 16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좌부장(左部將)을 거쳐 사복내승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발발 후 고경명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모집하여 고경명의 막하로 들어갔다. 고경명의 의병부대와 함께 금산으로 갔지만,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의병들이라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어 참패하고 거의 전원이 전사했다. 이때 살아남은 정기린은 순국한 의병들의 영령에 제사를 올린 후 의병을 다시 불러 모았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달했다. 정기린은 이들을 이끌고 김천일의 진영으로 들어가 활동했다. 그가 백의대검(白衣帶劍), 기백마(騎白馬), 건백기(建白旗) 삼백(三白)으로 호국의 뜻을 나타내니 선조 임금은 ‘백자장(白字將)’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성이 함락될 때 탈출에 성공했으나 나중에 순절했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으며, 1649년(인조 27년)에 정려와 함께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청화스님(淸華, 1923~2003)은 무안군 운남면 연리 저동출신으로 한국 불교의 존경받는 수행자이자 대종사이다. 1947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40여 년간 하루 한 끼(일종식)와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이어왔다. 특히 1985년부터는 전남 곡성의 태안사를 중창하였고, 해외와 국내에서 불법(佛法)을 전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을 지냈다. 일생 동안 철저한 수행과 자비 정신으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거처/생가/묘소
청화스님 생가터, 하동정씨세가묘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청화대종사의 생가터는 자작마을로 넘어가는 와우로길 86번지에 있는데, 경상도를 비롯한 전국의 불자들이 생가 답사를 많이 온다. 그런데 생가터 옆에 축사가 있고 좁아서 불편하기 그지없으니, 군에서 대책을 마련해주었으면 한다.
또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충효사는 저동마을의 중요한 문화자원인데 현재 담벽이 무너지고 사당 지붕이 닳아 누수되는 등 전반적인 보존상태가 열악하다. 주민들은 마을이 자긍심인 이곳에 대한 공적관심과 적절한 대책마련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