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면사무소 앞 삼거리에서 양금로를 타고 2km가량 남하하면 「양곡」마을에 닿는다. 도로변에서 내려다보이는 비스듬한 지형에 형성된 양곡마을은 사방이 트여 볕이 잘 든다. 양곡저수지를 사이로 서쪽은 「양곡」마을, 동쪽은 위아래로 신기마을과 죽산마을이 있다. 「양곡」에는 청동기시대 유물이 존재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의 「양곡」마을이 형성된 것은 17세기 중엽이다. 그렇듯이 마을의 형상을 보면 지금은 야산 개발로 황량한 느낌을 주지만 예전에는 소쿠리 형국으로 소나무와 숲이 둘러싼 아늑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축원, 동아시, 뒷맷등, 웃골, 터진골 등 5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양곡」마을은 400여 년 전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 다섯 가지 색으로 된 빛깔이 마을을 비추어 「어오지(於五指)」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망운중학교를 지나 뻗어온 한 줄기 맥이 마을에 이르러서 5개의 골짜기를 형성해 내리 뻗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을 ‘늘오지’ 또는 ‘늘어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주민은 마을 앞 공지인 간척지가 형성되기 전 바닷물이 길게 늘어져 들어오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였다. 현재의 「양곡(陽谷)」이라는 마을 지명은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햇볕이 잘 드는 마을’이라고 일제강점기인 1930경에 개명되었는데 「볕실」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형성(입향조)
「양곡」마을의 입향조는 함평모씨(咸平牟氏)로 모언수(牟彦守, 1635~1713)이다. 그의 조부는 모한룡(牟漢龍, 1543~1642, 자-광운(光雲), 호-송암(松菴))인데, 《입향시조와 성씨자료》 및 《무안지망집》 등의 <송암모공묘표망운면양곡함평모씨입향조(松菴牟公墓表望雲面陽谷咸平牟氏入鄕祖)>에 따르면 모한룡은 모순(牟恂, 1373~1459)의 8세손으로 함평에서 세거하다 조선 중기에 현경면 모촌으로 이주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닷가의 섬으로 일시 피해 있다가 압해면 고이도(古耳島)에 정착하였다. 송암 공은 성품이 착하고 부모를 섬김이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부모가 돌아가시자 생존해 계시는 것처럼 모셔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송암 공의 손자로는 모언수와 모언봉(牟彦鳳)이 있으며, 조선 후기인 17세기 중반에 모언수(牟彦守, 1635~1713, 자-군수, 호-죽헌)가 「양곡」으로 이주하면서 모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모씨촌(牟氏村)으로 불렸으나 무송유씨(茂松庾氏)가 들어오면서 복합성씨 마을이 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양곡」마을의 옛 지명인 ‘어오지리(於五指里)’ 또는 ‘늘어지’, ‘늘오지’는 마을의 형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운남면 소재지에서 뻗어온 한 줄기 맥이 마을에 이르러 5개 골짜기를 형성하고 내리뻗었기 때문이며, 또한 마을 앞 간척농지가 형성되기 전에 바닷물이 길게 늘어져 들어오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마을의 형상이 원래 소쿠리형국으로 소나무와 숲이 둘러싸고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주는 다섯 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이 마을은, 재물이 쌓이는 길지(吉地)로서의 ‘소쿠리형국’으로 소나무와 숲이 둘러싸인 아늑함과 생기(生氣)의 응집과 보호를 받는 형국이다. 또한, 다섯 개의 골짜기를 통해 형성된 다섯 개의 마을은 오행(五行)의 조화로부터 비롯되는 오복(五福)의 축복을 뜻함은 물론, 예로부터 길게 늘어져 들어오는 바닷물은 그대로 재물을 끌어들이는 좋은 마을의 형국이라고 하겠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명칭은 《호구총수》(1789)에서 무안현 현화면 「어오지리(於五指里)」로 기재되어 있고, 사람들도 마을 이름을 「늘어지」 또는 「늘오지」로 불렀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양곡(陽谷)」으로 바뀌었다.
행정구역 변경
「양곡」마을은 조선시대에는 무안현 현화면에 속해 있었으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서는 현화면 양곡,《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칭일람》(1917)에서는 다시 망운면 연리에 속한 「양곡」으로 바뀌었다. 이로 봐서 1914년 조선총독부의 ‘부군면 통폐합(府郡面 統廢合)’정책에 의해 현화면에서 망운면으로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양곡」마을의 주민은 거의 모두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작물은 벼, 마늘, 양파 등이다. 한국전쟁 당시 ‘무조직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이 마을의 주민들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아서 주민들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요시설
양곡마을회관, 운남제일교회
마을변화
「양곡」마을 앞의 바다를 면한 논밭경작지는 3차례의 간척으로 형성되었다. 지금의 「영해」마을에서 둑을 쌓아 바다를 막았는데, 최초 간척은 일제강점기에 개성사람이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압해면 부자인 정남진 씨가 간척지를 사들여 경작을 시작하였는데 넓이 55정보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훗날 마을 주민들이 직접 농지를 경작하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대부분의 주민들은 벼, 배추, 양파, 양배추 등의 농작물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부 주민들이 축산업을 운영하며 마을환경을 저해하는 축사를 승계하여 확대하려는 시도로 인해 주민 간 갈등이 유발되고 있다. 특히, 노령층 확대에도 불구하고 수려하고 안전한 주거환경으로 외지의 이주민들이 이거해 와서 빈집이 거의 없는 마을의 좋은 상황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있다.
이처럼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려는 주민들은 마을의 자연환경은 물론 미풍양속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을이장은 물론 부녀회 주관으로 매년 어버이날과 한여름 복날 등에는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서 대접하는 등 주민들의 화합과 안녕을 도모하고 있다.
「양곡」마을은 유신시절의 무분별한 야산개발로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예전에는 다섯 골짜기가 모여드는 소쿠리형국으로 소나무와 숲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유한만 씨(마을이장)에 따르면 「양곡」마을은 현재처럼 평지가 아니라 굴곡이 많았는데, 유신시절에 언덕을 평지로 개간하여 택지와 농경지를 일구었다고 한다. 현재 양곡저수지에는 수생식물과 곤충류가 풍부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으며, 양곡저수지와 「양곡」마을 사이에 소나무와 팽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또한, 마을 어귀에 대나무 군락지 한 곳이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양곡」마을은 축원, 동아시, 뒷맷등, 웃골, 터진골 등 옛 지명으로 이루어진 5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축원’은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언덕으로 예전에 간이학교가 있었지만 지금은 축사가 운영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마을의 노인회장은 예전의 간척지라고 한다. ‘동아시’는 ‘뒷맷등’ 아래 마을 왼쪽에 있으며 샘이 한 곳 있었다고 한다. 또한, ‘뒷맷등’은 현재 지석묘군 자리이며, ‘웃돌’은 「양곡」마을에서 면 소재지 방향에 있으며, ‘터진골’은 마을 북서쪽으로 양금로 너며 현재의 농장자리이다. 이외에 양곡과 관련된 지명이 더 존재한다. ‘독간’은 독(돌)을 채취했던 곳으로 돌이 거의 없는 평야지대인 운남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곳이다. 이곳의 돌을 채취해 저수지를 막고 간척지의 제방을 쌓았다. ‘조산등’은 마을 뒤에 있었던 3기의 커다란 봉분으로 주민들이 능(陵)이라 부를 정도로 커다란 무덤이었는데, 밭으로 만들면서 살펴보니 부장품은 없었다고 한다. ‘공수둠벙’은 간척 이전 주민들이 목포 등 외지로 나가는 배를 타던 조그만 포구이다. ‘진골들’은 양곡 서쪽에 있는 들이며, ‘양곡제’는 양곡 동북쪽에 있는 못으로 양곡저수지이고, ‘깔끄막’은 현재의 마을을 두르고 있는 양금로를 가리킨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현재 「양곡」마을의 뒷맷등에 2기의 탁자형 지석묘와 지석묘 파편을 포함한 13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마을에는 고인돌이 많아 한 주민에 따르면 고인돌을 밟고 마을 둘레를 돌 수 있을 정도로 널려 있었다고 한다. 2017년 《마을역사자료조사》에서도 뒷맷등과 남평문씨 선산 주변 등 20여 개를 언급하였다. 원래 고인돌은 마을 입구에서부터 마을을 둘러싸고 곳곳에 있었으나 길이 나고 개발이 되면서 몇 개만 뒷맷등이라고 부르는 곳을 옮겼을 뿐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렇게 많았던 고인돌들이 없어진 것은 농지를 좃성하기 위하여 세 차례의 간척지를 조성하면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마을길을 내면서 깨버리거나 묻어버리기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망운중학교 앞에도 원래 고인돌이 있어서 ‘바윗재’라고 불렀다.
한편, 이처럼 오랜 고대로부터 사람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을에는 유물산포지가 많았다. 1986년 목포대학교박물관은 「양곡」마을에서 12기의 지석묘를 조사한 바 있으며, 2006년 목포대학교박물관에서 시행한 《문화유적지표조사보고》에서, 「양곡」마을과 운남면사무소에서 망운중학교를 지나는 양금로 좌우에서 선사시대 토기와 지석묘를 조사하였다. 이외에도 터진골에서 ‘회청색경질토기편’과 ‘옹관편’을 수습하였고, 양곡저수지 너머에서는 ‘석실고분’이 발견되어 발굴이 이루어졌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무성유씨 양곡묘원, 행주기씨 납골묘 등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주민들은 청년창업지원제도를 통해 「양곡」마을에 젊은이들이 유입될 수 있는 정책이 펼쳐졌으면 한다. 또한 농산물을 대량 보관할 수 있는 저온창고와 냉장창고와 같은 공동시설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