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은 천사촌을 안고 있다. 천사는 거지들을 이르는 말로 걸인들이 이곳에집단으로 거주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에 걸인들이 모여들었던 것은 한해(旱害)가 크게 들면서였는데, 이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후하여 가뭄의 어려움에도 걸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자 이것이 소문나면서 모여들었다고 한다. 물론 걸인촌이 이곳만이 아닌 영산포나 해남에도 있었지만 없는 자들의 아픔과 한을 예술로 승화시킨 곳은 이 마을 사람들이다
지명유래
小池 마을은 장잿등을 안고 있으며 일로읍에서 청호리로 가는 길목인 인의산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품바 발상지인 의산리 888번지를 안고 있는 마을로 행정구역명으로는 일로읍 의산6리 소지 마을이다. 원래는 山頭 마을과 함께 의산2리에 속했으나 1987년 독립하여 의산6리로 分里되었다.
마을 뒤에 있는 무전산은 원래 ‘황우등’ 또는 ‘평정골’이라 했는데 후일 이 산에 통신과 관련된 송신탑 등이 건립되고서부터 ‘무전산’이라 했다. 무전산에 많을 때는 21개의 송신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4개밖에 없다.
小池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주민 중 최해월씨의 마당에 있는 조그만 못[池]에서 비롯된다. 현재는 밭으로 개간되어 예전의 모습을 찾을 길은 없으나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 못이 마르면 씨가 말라 자손 번창이 되지 않고 마을에 우환이 생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마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연못이다. 예전에 이 연못은 여름이면 목욕탕이 되기도 했다. 물이 차갑고 수량이 많기 때문에 주민들이즐겨 이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못의 모습이 여자의 생식기를 닮아 있어, 큰길 가 언덕에 있는 남자 성기를 닮은 바위(일명 불알바위)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마을임을 나타내는 어른들의 지혜에서 비롯된 지명이라 생각된다. 풍수지리상 ‘게(바닷물에 살며 옆으로 기어다니는 절지동물)통’의 형국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마을 이름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고, 마을을 소지가아닌 소재라고 부르고 있으며, 큰길을 소재잔등이라 하는 것을 봤을 때 지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 마을의 아래가 황소가 앉아있는 형국인 황우동(월암1리)이라는 마을이고, 마을 위에 있는 산두가 단순히 인의산 들머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의 머리를 나타낼 수도 있어 ‘소재[牛峙]’라고 부를 수도 있어 마을 이름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 유래지에 따르면 350여년 전 밀양박씨와 김해김씨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서 살았다고 하나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가 없다.또한 주민들도 어느 성씨가 먼저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장잿등에서 우무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한 주민의 말처럼 마을 길이가 1,200m에 달할 정도로 체육중학교 앞 무전산에서 마을이 시작되어 인의산 입구의 큰 길 너머까지 길다랗게 형성되어있다. 무전산을 주산으로 하고 인의산을 안산으로 했다. 현재는 도청에서 혁신도시까지 가는 4차선 도로가 마을을 두 동강내고 건설되고 있다.
우리 지역의 역사자료인 면성지에서는 인의산이란 이름에 대해서 ‘산자루가 북두처럼 左로 비키었고, 오룡산 무수장막은 右로 둘렀으니 만천가지 승상이 일신의 정신을 불러 일으켜 추연히 빼내고 엄연히 섰으니 완연히 인의군자가 중립하여 기울어지지 아니한 기상과 같으므로 인의산이라 이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영화농장과 소포들 그리고 자방포 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장엄하게 보이기도 한다.뿐만 아니라 의산리의 주산인 인의산은 무안의 4대 명당 중 하나이다. 즉 승달산 山頂穴인 ‘胡僧禮佛’과 몽탄면 죽전리 마을 뒤편에 있는 ‘飛鳳歸巢’, 그리고 청계면 수월동에 있는 ‘雲中囚月’과 이 마을의 뒷산인 인의산의 梅花落地가 그것이다.주민들은 아직도 매화낙지의 혈이 어디로 뻗어나갔는지 모르고 있다.
마을성씨
현재는 박씨 성이 가장 많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자료인호구총수에도 나오지 않고 일제강점기 때의 자료에도 마을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추정컨대 1925년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로 벼농사를 짓는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소지 마을은 예전에는 가난하였으나 현재는 영산강 간척지의 영향으로 대부분중농 이상의 경제력을 갖춰 마을회관을 짓는데,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세대당 많은 희사금들을 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이 살아나고 있다. 다른 마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강한 기운을 체감할 수 있다. 아마 주민들의 열정과 지도자의리더십이 빚어내는 조화로운 감응이라 여겨진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고 동계를 한다.
공동이용시설
마을에는 교회와 사찰이 공존한다. 주민들간 또는종교간 갈등이 없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품바발상지 표지석이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이 마을에서 태동한 품바는 일인극으로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중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품바의 주인공은 천장근이라는 사람인데 본명은 천팔만으로 알려져 있다. 천장근은 목포에서 부두노동자 파업에 참여하였다가일본 경찰에 수배를 받자 걸인행세를 하면서 일로에 피신하였다. 이때부터 천장근은 이 지역에 모여들기 시작한 걸인패를 조직하여 지배하였다. 6.25 이후, 한때는 사회질서를 위해 경찰이 조직하고 상이군경회에서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천장근은100여명이 넘는 걸인들의 지배자로서 이들을 통솔, 뒷바라지 하여오다가 1972년 타계하였다.
이러한 각설이들의 애환과 일상적인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가 김시라다. 김시라는 이 고장 출신으로 1978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고향의 학문과 예술을 보급하기위하여 ‘인의예술회’를 조직하여 걸인들의 생생한 증언과 생활을 극화하여 일로읍공회당에서 품바공연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끈질긴 밑바닥 민초의 삶을 살았던 천사촌 사람들의 모습이 김시라에 의해 ‘품바’로 탄생하였으며, 이후 품바는 우리나라 연극 역사상 최장기 공연으로 한국기네스북에도 오르게 될 정도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2017년 제1회 품바축제를 했고 마을회관도 만들었다. 마을 내 품바의 계승자는 없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 마을에 많은 인물이 나타났다. 현직 법관이 2명이나 되고 경찰서장이 1명 있으며 그 외에도 고위직 사무관들이 많이 있다. 의산리 내에선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한 마을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의 큰길 가(또는 소재잔등)에는 품바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원래 천사촌은 우무골이라 부르는 표지석 아래인 밤나무골 공동묘지 주변이었다. 지금은잡초만 우거져 한때 이 땅의 서러운 사람들이 恨을 다스리기 위해 또 서러움을 다독이기 위해 불렀던 민중예술의 발상지답지가 않다. 처음 군청에서 이 돌을 세울때는 이곳 주민들의 반발이 심하여 애를 먹게 하였으나 현재는 ‘품바’가 걸인들의이야기만이 아니라 이 땅의 민중이 갖는 한을 예술로 승화시킨 상징으로서 자리해,현재는 주민들이 자랑이 되어가고 있다.
한 주민은 마을을 자랑하면서 ‘월출산에 해가 뜨면 아침을 먹고 인의산에 해가걸치면 새참을 먹으며 오룡산에 해가 가리면 점심을 먹는다. 이어 승달산에 해가넘어가면 저녁을 먹는 곳이 이 마을이다’며 무안에서 가장 중심 되는 마을이 바로일로읍 소지 마을이라고 주장한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기와공장이 있었는데 논에서 뻘을 캐서 뻘기와를 만들었다. 논에서 뻘을 캘 때는 2삽 밑에 흙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