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화」마을은 운남면 소재지에서 성내리 방향으로 나 있는 운해로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은 앞데미 · 가운데데미 · 아랫물 · 점등 네 영역으로 이루어졌으며, 행정구역명으로는 운남면 연5리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양옆으로 시원스레 소나무가 뻗어 자라며, 마을 길이 곳곳으로 열려 막힘이 없다. 민가의 벽에는 2024년에 그린 벽화가 꾸며져 있다. 예전에는 마을 앞뒤로 바닷가였으나 마을 앞은 1969년 무렵, 마을 뒤 터진골은 1978년 무렵에 간척이 이루어졌고, 비슷한 시기 산지 개간을 통해 현재의 마을모습을 갖추었다.
지명유래
「내화」마을의 지명은 이곳의 지형이 나비가 꽃을 보고 내려앉은 모습과 같다 해서 벗 내(柰), 꽃 화(花) 자를 따서 내화촌(柰花村)으로 불리며, 주민들은 지형이 나비가 두 날개를 펼친 형세라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내화」마을은 입향조는 진주(晉州)강씨 강연한(姜涓恨)으로 알려진다. 그는 전북 고창군 송서면 무송리에 살다 벼슬을 잃고 남행하다 이곳에 와보니, 물 맑고 공기가 좋아 수백 년 안주할 곳이라 여겨 전주최씨 딸을 맞아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제보 姜正禮(강정례), 《마을유래지》, 1986)
하지만 다른 주민은 이 마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400여 년 밀양박씨 박봉금(박봉금, 자-여행, 호-호월, 1681~1733)이고, 이후 진주강씨, 장수황씨 등이 들어왔다 한다.(《마을역사자료조사》, 2017)
풍수지리(마을형국)
나비가 두 날개를 펼친 형세인 나비선공, 즉 ‘호접전시(蝴蝶展翅)’의 지형은 풍수지리에서 매우 길한 지형으로 나비가 우아하게 펼친 양쪽 날개 사이로 길한 기운인 생기(生氣)가 축적됨으로써 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며 이로 인해 학문과 문화가 발전했다고 한다.
마을성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장수황씨 등 복합성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내화」마을은 운남면의 행정구역 변경과 더불어 변천했다. 운남면은 조선시대 《호구총수》(1789) 영광군 망운면(연동, 모시촌)에 속했었다. 1910년 지방관제개정(조선총독부령 제7호)으로 잠시 목포부에 통합되었다가 1914년 면리통폐합(조선통독부령 제111호) 정책으로 무안군 망운면(내화촌 · 양곡 · 연동 · 저동 · 항장리 일부)으로 구획되었다. 이후 1983년에 망운면에서 분리되어 무안군 운남면으로 재편성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얼마 전까지 마을의 앞뒤로 바닷물이 들어와 해안이었으나 근래에 들어서 막은 간척지로 많은 농지를 경작하게 된 마을은 부유해 보인다. 또한 예전에는 마을 주변이 산림지대였는데, 개간되면서 밭으로 변해 양파나 고구마 등을 경작하여 높은 소득으로 농가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은 운남에서 슬라브집이 제일 많은 곳이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또한 한때 이 마을을 포함한 운남면에 돈이 넘쳐나 ‘돈남면’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다. 내화마을 주민회관에는 마을주민위안잔치 행사 사진 외에도 각종 상패와 트로피와 상장이 즐비하다. 청년회, 부녀회, 노인회에서 군면 각종 행사에 참여해 수상한 것들이다. 현재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경작물은 양파, 벼, 배추 등이다.
주요시설
평화농수산산지유통센터
마을변화
이렇게 경제적으로나 자연적으로 여건이 좋은 마을에도 고민이 있다. 그 고민은 냄새 공해 때문인데, 마을 앞 간척지 너머 돈사의 돈분과 지방도로 건너의 양파저장고에서 풍기는 양파 썩는 냄새로 여름철이면 창문 열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현재 주민들은 그보다 인근의 퇴비공장에서 무단으로 폐기하는 폐기물의 악취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외지에서 마을의 풍광과 지형이 좋아 정작하려 했다가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떠나는 일마저 생기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감회공파계(甘會公派契, 1886년 창립), 동갑계(1956년 창립), 부녀회(1969년 창립)
공동이용시설
내화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표지석 양옆, 진주강씨 소유 터에 수령 높은 소나무 13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주민들이 이 소나무 아래 제상을 마련하고 당산제를 지냈다고 하나 지속되지 않는다. 다만 마을 주민(김오순 씨)이 정월대보름이면 개인적으로 간소한 제상을 차려 예전 당산제 명맥을 잇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내화」마을 사람들은 지금 사용하지 않지만, 마을 곳곳의 예전 지명을 기억하고 있다. ‘미동美洞’(바닷가), ‘아랫물’(연리와 성내리가 갈리는 삼거리), ‘불무청(바닷가)’, ‘초장매미(초장깨미: 마을 바로 앞에 있던 바닷가)’, ‘忠忠골(층층골: 층층을 이루며 바다로 이어지는 골짜기)’ 등과 같이 간척 전 마을 앞의 바닷가 특정 공간을 지칭하는 명칭이 여럿 전한다. 이외 ‘터진골(마을 뒤편 간척 전의 바닷가)’, ‘점등’(1920년대 무렵 영암에서 옹기 굽는 사람들이 들어와 가마를 설치하고 옹기를 구웠던 곳으로 한때는 크게 번창하여 터진골에 옹기를 실어나르는 배들이 많았다 한다. 이 점등의 기능은 1940~195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한다), ‘집너머’(마을 뒤 운해로 건너편), ‘방골’(‘집너머’ 건너로 보이는 골짜기), ‘웃주막거리’(운남면 소재 방향으로 있던 주막)와 같은 예전 지명이 전해진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내화」마을에는 2~3년 간격으로 ‘내화마을주민위안잔치’를 열어 서로 간 격려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1992년(또는 1993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데, 마을에 후원금이나 찬조금이 모이면 그 비용으로 행사를 연다. 마을주민회관 벽면에는 행사 사진들을 걸어 놓고 이를 기념하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화산강공대여효행비(花山姜公大汝孝行碑)’(1994)가 있는데, 주인공 강대여는 1880년 오대산 사고 참봉의 첩지를 받은 인물이다. 얼마 전까지 이 비와 함께 ‘행만호강공량수경모비(行萬戶姜公亮秀景慕碑)’(1994)가 있었으나 지금은 상동 보건소 옆으로 이전했다. 또한 마을 안에는 ‘절부고사인박노풍처황씨행실비(節婦故士人朴魯豊妻黃氏行實碑’(1944) 및 석조비각과 비각문이 있다. 비는 기단과 비신, 옥개석(가첨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은 오석, 옥개석은 화강암인데, 옥개석 형태가 근대 신도비 양식을 갖추고 있다. 비각과 정문(旌門)은 후대 조성한 것으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 외에도 마을 앞 운해로 건너에 점등터 옆의 한 민가에는 2~3명이 넉넉히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정도의 넓고 평평한 지석묘가 있다. 예전에는 주민이 지석묘 위에 제사상을 차리기도 했다 한다.(큰 것은 5.3m가 넘는다) 이 점등 옆의 1기 지석묘를 포함해 내화마을에서 15기의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나머지 지석묘는 남평문씨 문중 땅(14기)에 흩어져 있는데, 현재는 그 땅 일부에 남평문씨 납골당이 들어서 있다. 이처럼 이 마을에는 연동에서 이어지는 지석묘군의 능선을 타고 이 마을 바닷가였던 방골로 이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군데군데 고인돌이 있었으나 대부분 밭을 경작하면서 묻거나 깨뜨렸다 한다.
1986년 목포대학교박물관 조사에 따르면 운남면 일대에서 40기(군집 수 7)의 지석묘가 발견되었는데, 해제, 현경의 지석묘군과 마찬가지로 바다가 보이는 구릉 위에 위치하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남북으로 일렬 내지 3열을 이루었다.(《무안군의 문화유적》, 1986)
설화
‘절부고사인박노풍처황씨행실비’의 주인공인 황씨 부인은 황찬욱의 딸로 16세에 밀양박씨 박노풍에게 출가한 후 7년 만에 남편이 몹쓸 병을 얻어 갖은 간호와 치료를 하였으나 효력이 없자, 자기의 살을 베어 남편에게 피를 먹였다. 그러나 그 정성도 아랑곳없이 남편이 세상을 뜨는지라 부인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가눌 길 없어 자결하려 했으나, 마침 뱃속에 태아가 있는지라 차마 남편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예전과 같이 시모를 극진히 모시며 유복자를 낳았다. 시모가 돌아가자 황씨 부인은 묘 앞에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하면서 미망인의 절개를 지켜오다가 그 일생을 마쳤다. (《내고장전통가꾸기》,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