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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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풍1리 해제면 신만 작성
  • 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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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5세대, 총56명(남27, 여29) / 2024.5.기준.
자연마을 구성
「신만」은 만풍1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유래지》에는 ‘처음 마을이 이루어질 때는 마을 북쪽에 있는 심양과 함께 형성되어 ‘시만동’이라 부르다가 이후 자연 마을인 심양, 비성굴, 염전 마을을 합하여 ‘신만’이라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명유래
주민들은 「신만」이라는 지명 유래는 장래에 십만 석의 부자가 나올 수 있는 마을, 또는 앞으로 십만 호의 인구가 살 수 있을 정도의 마을이다’라는 등의 의미를 가졌다고 하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다.비성골은 만풍리와 오류리의 경계지점에 있는데 그곳에 큰 비석이 있었다 해서 비석골로 불리다가 점차 내려오면서 현재의 비성골로 불린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김해김씨 김종이다. 김종〈(金琮), 1558~1622, 자-용손(龍孫), 호-호은(湖隱)〉은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선비로서 영광군 육창면에서 세거하다 임란 이후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공의 행적에 대하여 김해김씨 족보를 보면 ‘임진란에 벼슬을 버리고 집안에 칩거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 다시 서울로 가지 않고 오로지 경서를 섭렵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뒤 승무동에 김해김씨 선산에 공의 묘가 있다. 하지만 《마을유래지》에는 ‘김해김씨 김경원이 1440년경 김해에서 거주하다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는데 유배 기간이 끝난 뒤에도 자연환경이 좋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해김씨 족보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영조 때 밀양박씨 박경방(朴慶邦, 자-길보, 호-만성)이 들어왔다. 함평군 나산면 추동에서 세거하다 공의 친한 친구가 역도로 몰리자 공도 그 화를 입을까 봐 이 마을로 피난 와서 터를 잡았다. 공은 자손들에게 벼슬에 뜻을 두지 말라 하였으며 후손들 교육에 힘썼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니성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산맥, 서쪽은 바다에 임해있는 동고서저 형
마을성씨
김씨, 박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명칭은 원래 《마을유래지》에 나오듯이 마을 북쪽에 있는 심양과 함께 형성되어 「시만동」이라고 부르다가 이후 자연마을인 심양, 비성굴, 염전을 합하여 「신만」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이를 문헌으로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신만」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고 대신 외진목, 내진목. 신풍리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의 자료에서 처음으로 「신만」이라는 지명이 나오며,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신풍리, 신덕리, 진목동, 신만동, 심양리를 통합하는데, 여기에서 신만동과 신풍리의 이름을 따서 만풍리라고 하였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백제시대에 도제현이었던 곳으로, 고려 때 영광, 조선시대에는 함평에 속했다가 1900년초에 무안군으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으로 나오며 「신만」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다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잠시 목포부에 속한 해제면의 「신만동」으로 나온다. 이후 1914년의 행정구역 대개편에 따라 신풍리 등 5개 마을을 통합한 무안군 해제면 만풍리에 속한 「신만」이 된다. 이후 무안군 해제면 만풍1리 「신만」마을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해제에서 김해김씨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마을이다. 해제에서 동쪽에는 김(金)씨, 서쪽에는 전(田)씨가 있다는 ‘동김서전(東金西田)’이란 말이 전해 오는데, 신만마을은 그 김 씨들의 터전이다. 그리하여 주민들은 달이 뜨는 김 씨의 ‘월편쪽’과 전 씨의 ‘서편쪽’으로 분리하여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을 주민들은 원래 부지런했기 때문에 지금의 간척지를 조성하기 전에도 노는 시기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물론 농토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천성이 근면하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마을 앞에 둑이 막히고 많은 농토와 염전이 생겼지만 지금도 부지런한 그 기질은 그대로 남아있다고 입을 모은다.
주요시설
해제동초등학교(현재 폐교), 해제순복음교회.
마을변화
원래는 이 마을을 포함하여 진목, 심양, 노문래 등이 모두 한 마을로 해제에서 제일 큰 마을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분리되어 지금은 비성골과 함께 만풍1리를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원래 간척지와 평야 지형 덕분에 넓은 논이 형성되어 있다. 주로 벼농사 이외에 양파·마늘·고구마 같은 밭작물 재배도 활발하여 농업 소득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또한, 일부 주민은 축산업이나 소규모 어업을 병행하기도 하지만 주된 생업은 여전히 농업에 집중되고 있다. 그리하여 여타의 시골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의 급격한 도시 유출과 고령화로 마을은 고령층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로 경로당과 마을회관이 주민 교류의 중심이며, 마을의 새로운 지향과 발전계획이 시급한 상황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및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니성산(尼城山, 김해김씨 족보에는 移成山, 移城山으로 나온다)의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앞에는 안산이 있다. 뒤에는 마을 뒤에서 심양을 거쳐 진목 마을로 연결되는 한복산(삼복지산)이 있다. 니성산은 일제강점기 때 금광이 개설되었으며, 해방 후에도 강원도의 삼중광업소에서 금을 10㎏ 정도 채취했다고 한다. 이 산에는 지금도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당시 채굴되었던 굴 터가 4~5개 정도 남아있는데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는 굴도 있다. 1963년에 마을 앞 갯벌을 막아 간척지를 조성해 염전을 비롯한 넓은 농경지를 소유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소금도 나오고 황금도 나오는 마을이었다고 하겠다.
동/식물
금광을 캐던 탄광이었던 니성산의 동굴에는 현재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다. 이러한 황금박쥐는 우리나라에서 ‘붉은박쥐’라고도 불리며, 멸종위기 야생생물 Ⅰ급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희귀종이다. 몸 전체가 선명한 오렌지색 털을 지니고 있어서 황금빛으로 보이며, 현재 전국적으로 약 500여 마리만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니성산 동굴에 서식하는 황금박쥐는 멸종위기 야생생물로서 생태계 균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귀한 동물이다. 해충을 억제하는 자연의 조절자이자, 희귀성과 아름다운 외형으로 인해 생태적·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서식지 보존과 환경 관리가 필수적이며, 마을 주민과 지역사회가 함께 보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시급하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에 전해오는 지명으로는 ‘소로지’, ‘저막금’, 척박한 골짜기를 뜻하는 ‘마문골’, ‘서낭쟁이’, ‘승무동’, ‘수먹골’, 물이 귀한 ‘망골 귀양다리’ 그리고 김씨들이 들어와 터를 잡았던 ‘안터’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박성래공적비(1998년)가 있으며, 니성산 기슭에 절이 있었는데 현재는 불타 없어졌고, 그 절터에는 금동좌불상이 묻혀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설화
비성골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내용인즉 ‘옛날에 어떤 사람이 해가 저물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 고개에서 예쁜 색시가 앉아서 바느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람은 색시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 다가갔다. 그런데 색시에게 다가서면 사라져버리고 물러서면 색시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곳에다가 돌을 던져보았다. 그러자 이때까지 있던 색시가 사라지고 그곳에 비가 하나 있는 것이었다. 이후에 알고 보니 그 비석은 시집을 못 가고 죽은 처녀의 무덤 앞에 있는 비석이었다’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비석골을 지나던 한 총각이 이 재를 넘다가 예쁜 색시를 보고 상사병에 걸려 죽었다는 말도 있다’(《내고향 해제고을》)고 한다. 이처럼 처녀비와 총각비에 관한 흥미로운 전설을 주민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이 마을 출신의 가수 김보성은 「고장난 벽시계」, 「마음먹기 달렸더라」, 「진또배기」 등 여러 히트곡을 불렀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주민들은 6.25한국전쟁 때 좌익들에게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한국전쟁 중 함평 손불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빨치산들이 해제 각지에서 식량을 구해 도리포항에서 배로 실어 갈려고 하는 중 도둑을 맞았다. 수소문 끝에 이 마을 주민들이 가져갔다는 것을 알자, 인민재판을 열어 주민 3명을 즉결처분했다. 하지만 즉결처분에서 죽지 않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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