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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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풍4리 해제면 노무내(노문래) 작성
  • 노무내(노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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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45세대, 총75명(남38, 여37) / 2024.5.기준.
자연마을 구성
노문래(老文來)는 만풍4리에 속하는 마을로 1986년 신만마을과 분리되었다. 그래서 입향조나 마을 유래 등 상당부분이 신만 마을과 같다. 신만 마을에서 잔등을 넘어 남쪽에 자리한 노문래는 처음에는 ‘너머내’라고 불렀다. 그러다 한자로 옮기면서 현재의 노문래가 되었다.
지명유래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는 ‘동으로 한복산은 문필봉이요, 남에는 매가 있어 일자문이 분명하니 이런 데는 고서에 노문성이 비쳤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노문 마을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주민들은 ‘마을 뒤편의 산모양이 병풍형이고 마을 앞 새길이 일자(一字)로 되어있어 이런 지역을 노문성(老門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어떤 사람이 지명을 노문래라 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현재까지 노문래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주민들은 예전에 이 마을을 문헌방이라 부를 정도로 학문이 있어서 노문래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김해김씨 김종<金琮, 1558 -1622, 자-용선(龍孫),호-호은(湖隱)>은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선비로서 영광군 육창면에서 세거하다 임란 이후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공의 행적에 대하여 김해김씨 족보를 보면 ‘임진란에 벼슬을 버리고 집안에 칩거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 잡았다. 이후 다시 서울로 가지 않고 오로지 경서를 섭렵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뒤 승무동에 김해김씨 선산에 공의 묘가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산모양은 병풍형이고 마을 앞 새길이 일자(一字)형
마을성씨
김씨 외 여러성씨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외진목 내진목리 동정리 신풍리 등으로 나온다. 1912년에는 해제면 신만동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만풍리, 신풍리, 신덕리, 진목동, 신만동, 심양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에는 만풍리, 신만, 진목, 신풍, 노문래로 표기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풍리, 신덕리, 진목동, 신만동, 심양리를 합하여 신만동과 신풍리의 이름을 따서 만풍리라 하였다. 원래는 신만, 진목, 신풍, 노문래 4개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신만, 진목, 신풍, 노문래, 심양 등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니성산 기슭을 뒤로하고 함해만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앞의 드넓은 토지와 갯벌에서 나온 소득은 다른 마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안겨줬다. 마을 앞 간척지를 조성하기 전까지 이 마을 주민들은 노는 때가 없었다. 농토가 부족해서도 그랬겠지만 천성이 근면하고 부지런했기 때문이다. 둑이 막히고 많은 농토가 생겼지만 지금도 부지런한 기질은 그대로 남아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은 처음에 안터라 부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자 잔등 너머 현재의 신만 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정자와 농기계 보관창고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에 펼쳐져 있는 바다에 두 개의 섬이 있다. 대섬과 엄섬이다. 이중 엄섬은 송장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송장섬을 보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을 앞에 나무를 심어 이 섬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식물
이 마을 뒷산에는 할미꽃이 많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 옛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그릇을 구웠다는 슴은골 용산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소로지 보통골, 개양다리, 번답, 큰골, 세정골, 버든 등이 있으며 다복다복 농사지어서 부자 되라는 따복고랑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당산제는 당산나무도 없고 마을이 분리되기 전까지는 신만 마을에서 같이 지냈기 때문에 지금도 지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어버이날 행사는 크게 치른다. 주민들의 말로는 해제면에서 가장 크게 어버이날 행사를 치른다는 것이다. 내용을 보면 1년 동안 마을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추진한 사람에게 주민들 이름으로 상을 주고 효자 효부를 발굴하여 시상도 하고 나이가 70세에 이른 어르신들을 찾아 칠순잔치도 열어준다. 이러한 경비는 출향인사들이 대부분 협찬을 해준다고 한다.
유물, 유적
마을 뒤 김해김씨 선산을 승무동 또는 할무덤산(할무덤살이)으로 부른다. 예전에 이곳은 도굴꾼들이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곳이다. 동자석상을 비롯하여 사자상 등 각종 비석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당시 외부인들이 검침봉을 가지고 산을 뒤지고 다녀도 주민들은 무엇을 하러 다니는지도 몰랐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니 문화재를 도굴하러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마을 앞에는 2,000년에 세운 남양홍씨효열비가 있다.
설화
주민들은 마을에서 송장섬을 보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마을 앞에 나무를 심어 이 섬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주민들은 한국전쟁 때 좌익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중 함평 손불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빨치산들이 해제 각지에서 식량을 구해 도리포 항에서 배로 실어갈려고 하는 중 도둑을 맞았다. 수소문 끝에 이 마을 주민들이 가져갔다는 것을 알자 인민재판을 열어 주민 3명을 즉결처분 했다. 이 즉결처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비성골에 간이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는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이후에는 신만 마을의 회관이라 부르는 집에서 공부를 했다. 이후 해제동초등학교가 세워지면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가 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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