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리(松石里)는 해제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7㎞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함해만을 사이에 두고 함평군 손불면과 마주하고 있다. 서쪽은 평야지대로서 5개의 저수지가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또한 삼면이 바다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해태와 어패류 등의 수산물이 많아 소득이 높은 지역이다.
지명유래
이 마을에는 선돌(立石) 세 개가 있어 입석이라고 하였는데 지명 유래로 세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호랑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선돌을 세우면서 붙여졌다. 두 번째는 마을의 주요 성씨인 홍, 나, 강 세 성씨가 힘을 모아서 사람 모양의 돌을 세워 맹수의 화를 막았다고도 한다. 세 번째는 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쥐머리산(鼠頭)이 활 형국이라 화살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방패가 필요했다. 해서 방패용으로 돌을 3개 세운 것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죽산안씨다. 죽산안씨는 기러기가 떨어진 명당이라는 지금의 재모실이라 부르는 곳에 안락동(雁落洞)이라는 이름으로 터를 잡았다.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연산군 대(代)에는 남양홍씨(풍산홍씨라고 보는 사람도 있음)가 들어왔으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다. 마을의 입향조로 거론되는 성씨는 남양홍((洪)씨, 금성나(羅)씨, 진주강(姜)씨 등 삼성(三姓)씨이다. 당시의 홍씨는 남아있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지만 금성나씨 입향조는 나천기(자-기지, 호-석봉,1676~1725)이며 진주강씨 입향조는 강필성(자-군필, 1676~1722)이다. 진주강씨 강필성 공은 대호군 강여의 후손으로서 함평 원나산에서 대대로 살았으나 흉년으로 가세가 점점 빈곤해지자 아버지인 강이재 때에 신안군 지도로 이주했다. 이후 1700년대를 전후해서 강필성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으로 들어왔다. 강필성 공은 남달리 학문이 뛰어나 후세 사람들에게 높이 추앙을 받았으며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무안세적지》나 《무안유래지》 등은 강이재를 입향조로 기록하고 있으나 확인해 본 결과 강이재는 강필성의 아버지였으며 지도에서 이미 별세하였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는 홍 , 나, 강 삼성(三姓)을 받드는 당골이 살고 있었다. 궂은일이나 좋은 일에 늘 뒤치다꺼리를 해온 사람인데 주민들은 문하인(門下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러 성씨가 들어오면서 그 사람은 종적을 감췄다. 또한 나좌수, 강별감으로 부르는 세도가가 있어 주변 마을에 위세를 부린 때도 있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천마산을 주산으로 말 형국
마을성씨
남양홍씨, 금성나씨, 진주강씨 등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자료를 보면 입석이란 마을이름도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름이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입석리로 나온다. 1912년에는 무안군 해제면 입석리로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엔 해제면 송석리 입석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입석(立石)리, 송계(松溪)리, 도리포(道里浦)리, 저도리’가 나오며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입석리, 삼봉리, 송계동, 도리’로 표기되었다. 1917년의 자료에는 해제면 ‘송석리, 송계,동 삼봉리, 입석리, 도리’로 나온다. 1987년에는 현재와 같이 해제면 송석리 송계와 입석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예전부터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우선 입향조들의 학문이 높았으며 지금도 웃서당의 강선생 아랫서당의 나선생이라는 말이 남아있을 정도로 주민들이 교육을 중시해왔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중앙에 간이학교가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중학교에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인 보수과가 운영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해제중학교 전신인 동양대학교 부속중학교의 출발점이 이 마을이기도 하였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광주여자대학교 수련원
전통식품/특산품
곱창 김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니성산의 줄기인 천마산을 주봉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옆으로는 방아다리산이 있다. 또 마을 앞으로는 함해만이 보인다. 해제지역에는 지명에 석(石)이나 암(巖) 자가 들어간 마을은 물이 부족했다. 실제로 학암마을, 석산마을, 입석마을은 지하수개발이 되지 않아 주민들 간 어려움이 많았다. 해서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도 마을의 발전이 되지 않았다. 마을에는 매미샘(또는 매라주샘)이 있는데 여름에 매미가 울면 물이 나온다는 신비한 샘이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온 겨울철에도 나오지 않는 물이 매미가 우는 때가 오면 물이 나와 주민들이 신비하게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 샘물은 시원해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주민들이 욕심을 내어 확장하느라 샘 주변을 파면서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지형이 천마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어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송계마을 앞 강변이 깔등, 해제북교에서 삼봉 마을로 가는 길인 챗길, 마을 앞 외얏골, 교회 앞 핑경, 꽃방울, 방장골, 왕겨산 등이 있으며 삼봉 마을 앞 바다 속에 안장바위가 있다. 특히 왕겨산에는 길이가 70여 미터 정도인 성터로 여겨지는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매년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지내지 않으면 마을에 큰 피해가 있다고 한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큰할매 당산에 매년 입혔던 옷을 요즈음엔 나일론으로 입혀 놓아 시대 변화 추세를 반영하고 있다. 당산제를 처음에는 정월보름에 지냈으나 지금은 2월 초하루에 모시고 있다.
유물, 유적
입석패총이라 부르는 패총 무더기가 현재는 폐교가 된 해제북초교 뒷산인 천마산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남쪽의 바다를 향해 경사지게 형성되어 있으며 크기는 대략 동서 10m 남북 5m 크기다. 이곳에서 출토 유물은 회청색 경질토기편, 적갈색 연질토기편, 골편 등으로 보아 철기시대 이후의 패총으로 보인다. 해제북초교는 1970년 해제동교 송석분교로 개교하였으며 1998년에 해제초등학교와 통합되었다. 지금은 폐교된 자리에 광주여자대학교 수련원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에는 비석이 많다. 1946년에 건립한 금성나씨효열비, 1958년에 세운 진주강씨삼강비는 충신 강서 , 효자 강종옥 열부 나주 오씨를 모셨다. 1968년에 세운 남양홍씨열효비가 있으며 1989년에 세운 유인무안박씨열효비도 있다. 1973년에 세운 석당처사강공유적비와 1975년에 세운 묵헌나선생유적비가 있다.
설화
예전부터 이 마을은 호랑이의 피해가 잦았으나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처럼 대책이 없어 주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는 어느 해 한 스님이 마을을 지나가다 마을 전체에 어려 있는 호환(虎患)의 기운을 보고 ‘마을에 무슨 변고가 있는가?’고 주민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주민이 ‘호랑이 피해가 너무 많아 걱정이다’고 말하자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을을 둘러보고 방책을 알려 주었다. 마을 어디를 파면 돌이 세 개가 나올 것인데 그 돌을 세우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옷을 입히면 화를 면할 수 있다고 알려준 것이다. 주민들은 스님의 말대로 스님이 지적한 곳에서 돌을 파서 세우고 각각 하나씨당산, 큰할매당산, 작은할매당산(아기당산이라고도 함)으로 이름 붙이고 제사를 지내니 그 다음부터는 호랑이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나명운(전 광주지방법원서기관, 목포고~조선대법대 졸업), 강용기(전 전남대 영문과 교수), 김선창(전 목포항도초등학교 교장), 변창윤(전 서울시 중구 구의원), 김원중 현 무안군의원(3선), 김용국 전 해제농협조합장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물 때문에 주민들 간 싸움도 있었다.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에 두 개의 저수지가 있어서 농사를 편하게 지었으나 지하수 개발이 진행되면서 이 마을은 지층이 암반이라 물을 확보할 수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