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명으로 해제면 신정1리에 속하는 「응양」마을은 자연마을인 응양과 정촌으로 이루어졌으며, 해제면소재지에서 대사리 쪽으로 2㎞ 정도 진행하여 왼쪽으로 꺾어 들면 나온다. 남양홍씨의 자작일촌으로서 마을 뒤 장수샘 주변에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지명유래
「응양(鷹揚)」이라는 이름은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 한 스님이 지나가다 마을이름을 응양으로 하면 자손 대대로 큰 부자가 나오고 큰 인물이 배출될 것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스님의 말대로 이 마을은 세 명의 고시 합격자와 경찰서장, 박사 등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다른 해석은 마을의 지형이 매와 꿩의 형상이어서 「응양(鷹揚)」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남양홍씨가 해제에 들어 온 때는 1598년 홍순경이 함평에서 송석리로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지금은 함평향교가 자리 잡고 있는 함평군 대동면 강운리에서 원래 남양홍씨들이 살았는데, 그곳의 전답을 향교 터로 기부하고 반대로 관(官)에서 해제면 만풍리와 송석리 일대를 기증받아 이주하였다. 홍경순은 송석리에서 홍빈(洪賓)과 홍자(洪宇)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자(宇)의 아들 덕인이 신정리 「응양」마을에 들어 온 것은 1650년 무렵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형국을 보면 봉대산 기슭에 주산인 산짓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를 갖추고 있다. 특히 마을 뒷산인 산짓등이 매(鷹)형국의 산이어서 마을 앞에 있는 촌중산(村中山)은 매의 먹이인 꿩(雉-치) 형국으로 매가 먹이를 앞에 두고 있는 지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촌중산에는 꿩바위가 있었는데 길을 확장하면서 훼손되어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촌중산을 자세히 보면 풍수설에 맞추기 위하여 주민들이 일부러 흙을 쌓아 만든 산으로 꿩을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은 것으로 보인다. 옆 마을인 신흥에도 꿩방이라는 지명이 있다.
마을성씨
남양홍씨가 많은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조선시대의 《호구총수》와 1912년의 《지방행정명칭일람》에는 「응양」이란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서 「응양동(鷹良洞)」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이 지역은 백제시대 도제현에서 시작해 고려시대 해제현, 조선 태조 9년(1390년) 함평현에 병합되었다가, 고종 3년(1866년)에 함평군에서 무안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해제면으로 재편되어 오늘날 신정1리 「응양」마을로 이어지고 있다. 이를 문헌으로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 함평현 해제면 고읍내리, 중촌리, 가여백리, 정촌리로 나온다. 이어 1912년의 자료에는 신흥리, 고읍내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해제면 신천리, 응양동, 신흥리, 고읍내, 정동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신흥리와 정동의 이름 첫 자를 따서 신정리(新井里)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어 1987년의 자료에서 해제면 신정리에 속한 응양, 신흥, 고읍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 남양홍씨와 석용리의 해주최씨는 서로 간에 결혼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팔학사가 우리나라에 왔는데 홍 씨와 최 씨 두 성씨가 팔학사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청혼하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갑오동학혁명 때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서로 간의 오해와 다툼으로 두 집안 간에 원수가 져서 결혼하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이 마을은 최근 급속한 농촌 고령화와 인구 감소 속에서도 경로당 중심의 공동체 활동이 유지되고 있으며, 해제면 도시재생 사업과 연계해 생활환경 개선이 추진되고 있다. 특히 도로 정비, 주거환경 개선, 주민 참여형 프로그램이 확대되면서 마을의 정주 여건이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및 경로당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뒤 장수샘 주변에는 거대한 동백나무 군락지가 있다. 심은 지가 오래되어 둘레가 150㎝가 넘는 나무들이 있을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가진 동백나무가 수십 그루 넘게 자생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하는데, 마을의 무관심과 칡넝쿨 등 잡초가 많아서 대부분이 말라 죽거나 외지인들이 분재용으로 파갔다고 한다. 현재 마을 뒤에는 개간하여 대부분 감나무를 심었는데 원래 동백나무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마을 이장의 이야기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 세 가마니의 동백씨를 주어서 짭짤한 소득을 올렸다고 하니 그 동백나무숲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해제면에서는 이곳과 백학산의 동백나무 숲이 잘 알려져 있다. 초의선사 생가터에 있는 네 그루의 동백나무도 이 마을에서 희사하여 옮겨 심은 것이라 한다. 물론 초의선사 생가터 주변에 많이 조성된 녹차나무도 이 마을에서 이식해간 것이라 한다.
동/식물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당산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수형이 잘 잡혀 있어 매우 귀하게 보호되던 나무였다. 예전에 동네 주민이 자기 집 지붕 위로 당산나무가 뻗쳐 들어오자 무심코 가지를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 후 생각지도 않은 우환을 당해 그 집은 물론 마을에서도 당산나무에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도 당산나무의 가지치기를 할 사람이 없어 군(郡)에다 의뢰하는 일이 있을 정도로 당산나무를 어려워하고 신성시했었다. 하지만 시멘트로 도로포장을 하면서 당산나무도 고사 되어, 현재는 조그마한 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앞을 ‘한샘들’이라고 부르며,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를 ‘외등’이라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현재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2월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무안의 《마을 유래지》에서는 망제(望祭)를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주민에게 혹시 ‘당산제’를 ‘망제’라고도 부르냐고 물어보니 모르는 일이라고 한다.
유물, 유적
현재 이 마을에는 <양촌선생유적비> 등 5개의 비석이 있다. 또한, 예전에 봉대산 자락에 있는 마을 뒷산 정상 부근에는 특이하게도 빠돌과 조개무더기(대부분 백합)가 꽤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산에 등산로를 내기 위해서 땅을 고를 때 나온 것들인데, 파헤쳐 놓은 언덕의 단면을 보면 30㎝ 두께로 조개층이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높은 곳까지 조개층이 있을까 하는 이유는 물론 이를 학술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마을 어르신들이 어렸을 때 봉대산으로 소풍 가면 현재보다 더 많은 빠돌과 조개껍질을 증언하고 있다. 이에 이번 탐방에서도 옆 마을인 「고읍」에서 발견된 고분군과 지석묘군 등을 합쳐 「응양」마을에서도 선사시대의 어떤 흔적이나 설화가 있지 않을까 여겨서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듣거나 발견치 못했다. 그렇지만 봉대산의 백제산성과 해제가 처한 지리적인 위치 등으로 봤을 때 분명 이곳이 고대시대 어떤 역할을 했거나 중요한 터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해제지역의 유일한 면지(面誌)인 《내고향 해제고을》에서는 1984년 2월에 남양홍씨 문중(門中)에 의해서 경기도 광주에 있던 홍순손과 아들 홍률 장군의 묘소를 응양마을로 이장해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마을에서는 1970년대 성남시에서 이장해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무덤의 좌우에 문인석 3기씩 배열해 있는 모습을 볼 때 주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위풍당당함이 과거 남양홍씨 가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마을 앞 촌중산에는 1980년대에 서울에서 옮겨왔다는 홍순손 부자의 묘와 그 후손들의 비가 있다. 홍순손(洪順孫)은 세조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이 된 사람인데, 형인 홍달손과 함께 세조의 상대 세력인 안평대군과 김종서를 척살할 때 동원되었던 인물이다. 결과로 홍달손은 1등 정난공신으로 좌의정까지 올랐고, 홍순손은 3등 정난공신으로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현대에 와서도 다수의 인사들이 있다. 현대 인물로는 홍봉주 인천시의원, 홍기환 의정부지청장, 홍성의 경찰서장, 홍봉주변호사 권익위원장, 홍용석 경기대교수, 홍용수 교수 등이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에는 자랑할 만한 샘이 있다. 홍의철 선생 댁에 있는 샘인데, 샘 주위에는 바위로 된 언덕이 있고 그 위에는 동백나무들이 심겨 있다. 주민들은 이곳을 동북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물은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홍수가 와도 넘치지 않는 그러한 물이다. 이 물의 주인인 홍수천 씨의 집안은 3대째 100세가 넘게 장수하여 마을에서는 이 샘을 장수샘이라고도 부른다. 특히 이처럼 이 마을을 포함한 신흥, 고읍마을이 물이 좋은데, 해제의 명산인 봉대산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마을에 상수도가 들어오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은 수도관을 사용하지 않고 봉대산 물을 먹는다. 마을 뒤에는 물탱크 3개가 있는데 봉대산 중턱에서 나오는 물을 받았다가 각 가정으로 보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