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마을은 여사몰이라 불렀는데 언제인가부터 여시몰로 바뀐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월보름날 외분 마을 감동샘으로 ‘물 타러 갈 때’ 외분 사람들 모르게 물길을 터 마치 여우같은 짓을 했다 해서다. 또 하나는 예전에 마을 청년들이 마을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텃세를 부려 주변에서 시샘하며 불렀던 이름이다. 세 번째는 마을 주민들이 재빠르고 재주가 있어 주변 주민들이 여시 같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여사몰은 마을 오른쪽에 있는 둔덕으로 상감고랑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다. 성적골로 불리기도 하고 육충뫼라고도 했다. 이 마을은 토치와 토치삼거리 그리고 육충뫼(할머니들은 육철뫼라 부른다)로 이루어졌다. 상감산을 주산으로 하고 왼쪽엔 니성산이 있으며 앞에는 길 건너 망월산이 자리하고 있다. 상감산은 양매리의 주산인데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변엔 코끼리를 뜻하는 캐코리라 부르는 지명도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금령김씨 김경태(자-예원, 호-운암, 1698~1786)다. 해제에서 금령김씨가 살고 있는 곳은 학송리 학암과 이 마을이다. 해제의 금령김씨 입향조는 김예화(金禮曄, 자-四明, 호-新齋, 1550~?)로 충의공 김문기의 6세손이다. 본래 금령김씨는 경북 상주에서 세거하였으나, 김문기 공이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면서 친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예엽공도 상주에서 진안으로 옮겨 와 숨어살다가 은거 생활 4년 만에 학송리 학암마을로 들어와 일가를 이뤘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옥토망월(玉免望月) 형(形)
마을성씨
금령김씨 등 복합성씨 마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토치(兎峙)마을은 지형이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옥토망월(玉免望月)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헌데 대부분의 주민들은 토치(土峙)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담양전씨 족보나 다른 기록에는 토치(兎峙)로 나온다. 이렇게 한자표기가 변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 쓰기 쉬운 한자로 표기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이 마을 역사를 보면 1789년 《호구총수》에는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912년에 가서야 토치동으로 나오고 1917년에 양매리 토치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가난했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이렇다 할 농지가 없어 주변 마을에 품을 팔아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다 간척이 되고 농지를 확보함으로써 어느 마을 못지않은 부자 마을이 되었다. 실지로 이 마을은 빈집이 없다. 마을을 떠나는 주민도 없지만 설령 비었다 하더라도 바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두 개의 샘이 있었다. 쇠주막샘과 토치앞샘인데 주막이 있었던 곳의 쇠주막샘은 물이 좋아 해제에서 생산되었던 막걸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현재는 두 샘 모두 메워져 흔적만 남아있다. 예전에는 고구마와 양파를 많이 재배했던 마을 주변에 현재는 양배추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주민들에게 ‘왜 소득이 많은 양파를 놔두고 양배추를 심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양파는 노동력이 많이 가지만 양배추는 재배가 단순해 노인들이 재배하기 쉽기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심는다’고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니성산은 일제강점기 때 금광이 개설되었으며 해방 후에도 강원도의 삼중광업소에서 금을 10㎏ 정도 채취했다고 한다. 이 산에는 지금도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고 주민들은 믿고 있다. 당시 채굴되었던 굴 터가 4~5개 정도 남아 있는데 천연기념물인 황금박쥐가 서식하고 있는 굴도 있다. 금광이 성업 중일 때 대부분의 주민들이 채굴작업에 나섰다고 한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예전에는 마을 앞 들판 곳곳에 해충퇴치기가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인데 마을이 바다 옆에 위치하고 있고 들판이 간척지로 형성되어서 깔따구와 모기가 많이 있기 때문에 설치했었다고 한다. 또한 친환경 농산물 생산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라고도 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여름에는 시꺼먼 모기가 극성을 부려 애를 먹었다고 한다. 원래 마을 앞으로는 만풍리나 유월리 사람들이 해제를 갈 때 지나다니던 길이었다. 마을 앞으로는 아름드리의 소나무가 있는 영감산과 할매산으로 부르는 두개의 동산이 있었다. 이 동산으로 마을은 아늑한 느낌을 받았는데 개발이 이뤄지면서 밭으로 변했다. 주민들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솔밭이 없어져 많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동/식물
니성산 황금박쥐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상(象)감산, 상(象)감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이렇다 할 역사나 문화는 마을에 전해오는 것이 없다. 예전에 농악이 성할 때는 이 마을도 건너 마을 창등 사람들과 어울려 농악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옆 마을인 외분 마을과는 심정적으로 조금 거리를 두고 있는 듯 했다.
유물, 유적
마을 앞들을 상감들이라고 하는데 50여 년 전에 간척으로 형성된 들이다. 토질이 좋아 이곳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의 소득이 높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화염(火鹽)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예엽공의 증손인 김경태가 학암마을에서 분가하여 상감고랑으로 옮겼다가 이 마을에 정착한 것이다. 족보에 나타난 것을 보면 공은 통정대부에 승정원 좌승지를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증직으로 보인다. 현대 인물로는 김한영(군인, 대령예편) 김종중(전 조선대 교수)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길 건너에 있는 망월산은 무덤이 많기로 유명하다. 달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망월산을 용학리 사람들은 동산뫼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초분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도 혼자 지나가기가 으스스 하다고 한다. 원래 육충뫼는 다박솔이 많이 있었던 솔밭이었다. 그런데 지형상으로 파출소와 가까이 있다 보니까 한국전쟁 때 좌우익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