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면은 예전에 큰 고을 터였다고 하나 이를 설명하는 배경과 역사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기록상으로는 ‘해제면 일대에 백제시대 때 이미 도제현(道際縣)이라는 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나와 있다. 이처럼 백제시대부터 현이 설치될 정도로 지리, 역사적으로 중요성이 인정되었던 해제가 사료나 유물 부족으로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양간리는 해제면소재지로 현경면에서 신안군 지도로 향하는 24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
지명유래
양간이란 지명은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 다리를 중심으로 동쪽은 개니(가양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변화, 개웅의 끝이라는 개미의 뜻을 지니고 있음), 서쪽은 「고읍내」라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시 마을의 중심인 현재의 동아약국 앞에 나무다리가 있어 양간이라 하였다. 주민들은 「다리독」으로 부르기도 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양간1 마을은 양매 4리에 속한 마을로 20여 년 전에 분리 되었다. 점등의 옹기를 굽던 사람들이 처음 마을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나 ,정확이 알 길이 없다. 이후 파평윤씨 윤판중씨가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해제면의 각 마을에서 주민들이 소재지로 몰려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조성된 마을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행정적으로 해제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양간리라 불러왔으나 점차 인구가 많아지면서 분리하게 됐다. 즉 30여 년 전부터 구 도로를 중심으로 양간1, 양간2, 양간3, 양간4로 나눴다. 현재는 별도로 양간리라는 법정리를 두지 않고 양간1 양간2는 양매리로, 양간3 양간4는 신정리에 속하게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해제중학교 앞에는 질 좋은 점토가 대량으로 묻혀있었다. 이 점토를 이용한 옹기등 질그릇은 주변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해서 질그릇을 가마에서 내는 날은 이곳에서 성포까지 항아리를 이거나 지고 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둑이 막히면서 점등마을도 시들해졌다. 실지로 얼마 전까지 사거리 주변에는 가마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예전에는 다리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던 포구였다.
마을에는 엽연초 수매장이 있었다. 신안군 지도까지 관할하는 잎담배 수매장은 80년대까지 존재하였는데 당시에는 벼 소득보다 엽연초 수입이 더 많아 마을경기가 좋기도 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 노인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예전에 점등이라고도 불렀다. 광산리 성포와 용학리 이방마을 간에 둑이 막히기 전에는 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양간의 한자는 양간(兩間, 兩干, 兩澗) 등으로 표기되나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나 다른 자료에는 양간(兩干)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렇게 쓴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치진이 있는 해제의 지리적인 특성으로 군사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양간(兩間)으로 쓴 이유는 개니와 고읍내 사이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간(兩間)은 봉대산에서 내려오는 물과 개니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진다는 의미에서 쓰인 한자이다. 예전에는 개니 고랑에서 「양간다리」를 거쳐 성포 앞까지 사금채취가 붐을 이룬 적이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처녀귀신을 달래기 위해 매년 보름날 지신밟기를 통해서 원한을 달래주어야 한다고 주민들이 전한다.
유물, 유적
마을에는 전국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는 개인 박물관이 있다. 약 20,000여점의 각종 유물과 고서 그리고 사진 등을 보관하고 있는 아리랑박물관이다. 주인인 윤근택씨는 30여년이 넘게 각종 유물들을 수집해왔는데 개인이 수집하고 보관하기에는 엄청난 물량으로 군(郡)에서 위탁을 받아 보관 및 전시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악암골이란 지명이 있으며 예전 한전 사옥 앞에 ‘윤천중송은비’가 서있다.
설화
마을에서 해년마다 거르지 않고 지내는 지신밟기 행사가 있다. 파출소에서 이뤄지는데 풍물이 사라져가고 있는 시기에 끊이지 않고 정월 보름이면 지신밟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950년대 중반 해제지서 지서장으로 부임했던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 때문이다. 당시 지서장에게는 애지중지하는 딸이 있었다. 관사 앞에는 우물터가 있었는데 어느 날 지서장 딸이 두레박으로 물을 뜨다 우물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후부터 지서에 알 수 없는 현상들이 자주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데 문에 모래를 뿌린다거나,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린다거나, 물이 저절로 나온다거나 종이 울리는 등등의 소위 귀신의 장난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었다. 지서 직원을 포함한 해제면 사람들의 고민이 깊어갔다. 그럴 즈음 원갑사를 가려고 지나가는 스님이 지서 앞을 지나다가 지서 주변에 살기가 어려 있는 것을 보고 지서장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스님은 한이 맺힌 처녀귀신이 지서 주변을 맴돌고 있어 달래주지 않으면 곧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님의 말대로 지신밟기를 하자 그해부터는 지서에 이상스러운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 해라도 거르면 반드시 그 해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등 대형사고가 발생한다고 한다. 현재는 우물터는 메워지고 그 자리에 파출소 가 들어서 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점등은 근대사의 불행한 장소이기도 하다. 1950년 추석 다음날 불량분자로 찍힌 27명의 해제면민들이 점등에서 집단 학살을 당한 현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