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학리(龍鶴里)는 동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해제면소재지로부터 현경면 쪽으로 2㎞떨어진 곳에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기룡동, 도성동, 장성동, 이방리, 학천동을 합하였으며 기룡과 학천의 이름을 따서 용학리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용학리는 도성, 장성, 이방, 기룡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도성마을은 해제면소재지에서 현경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따라 2㎞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지명유래
마을은 지명에서 보는 것처럼 성이 있었다고 하지만 주민들의 이야기나 마을과 관련된 어떤 자료에도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주민들과 대화 속에서 마을의 위치가 길보다 아래에 있어 길이 마치 성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하고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무안군 《지명 유래지》에 의하면 장성마을 동북부에 위치한다. 마을형성 당시 기룡마을 앞에 질그릇을 만드는 진흙이 있어 무점이라 했다고 전하며, 기룡(騎龍)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 후 마을 이름은 길도(道)와 제성(城)을 따서 도성(道城)이라 불러오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오씨와 장수황씨라고 전하나 정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몇 해 전까지 마을 뒤에 오씨 무덤이 있었으나 신안군 지도읍의 사람들이 이장해갔다고 한다.
이 마을 입향조는 죽산안씨, 함평모씨, 나주정씨, 인동장씨 등이다. 그중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죽산안씨 安起國(자-정학. 1660–1752)이다. 공은 1600년대 후반에 현경면 수양리 두동마을에서 살다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 마을로 이주했다. 이어 나주정씨 입향조는 정대후(鄭啓后, 영조대, 자-化甫, 호-海享. 성재의 후손)이다. 자료집 《내고장해제고을》에 따르면 ‘공은 함평군 월야면 우치에서 세거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살림이 어려워지자 1700년대 초에 도성마을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함평모씨 입향조는 모찬경(자-시숙. 1722–1832)이다. 공은 함평모씨 22 세손으로 1700년대 중반에 양매리 외분마을에서 이 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 인동장씨 입향조는 장지성(張志成, 자-덕윤. 1801-1847)이다. 공은 동몽교관조봉대부를 역임하였다. 《무안세적지》에는 도성마을 입향조로 장준택(호-道隱)이 나오나 인동장씨 족보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의 풍수적 지형은 조리형이다. 마을 전체가구의 생활 정도가 비슷하며 20년은 잘 살고 20년은 못 산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지형대로 차면 넘치기 때문에 마을에 큰 부자는 없다고 한다. 해서 주민들은 이러한 지형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마을 주변에 소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마을성씨
안씨, 모씨 등 혼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얼마 전까지 용학4리인 기룡마을과 한 마을이었으나 1988년에 분리되면서 용학1리에 속하게 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도성리(道城里)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성(城)이 아닌 무안군 해제면 도성동(道成洞)으로 1917년의 자료에도 해제면 용학리 도성동(道成洞)으로 나온다. 이후 1980년의 자료부터는 다시 해제면 용학1리 도성(道城)으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주민들이 단결심이 강하다. 마을에 궂은일이나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모든 주민들이 한 마음으로 나서서 힘을 모았다. 특히 공동으로 벼와 밭곡식을 경작하니 다른 마을보다 훨씬 먼저 일이 끝나고 생산성도 높았다고 한다. 주요 생산물로는 쌀, 고구마, 마늘, 고추, 양파가 생산된다.
주요시설
마을회관.
마을변화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며 전해오는 말에 마을이 피난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마을 주변의 밭이나 논에서 기와 조각이나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한국전쟁 때는 주민 중 한 가족이 몰살(16명)을 당한 일도 있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에 일제강점기의 교육기관이었던 간이학교가 있었다. 주민인 장정남씨 댁 마당에 있었던 학교인데 4칸의 제법 규모가 있는 학교였다. 현경면의 가입리에서까지 아이들이 배우러 왔던 이 학교는 해방 이후 해제초등학교로 합해졌다.
마을회관이 언덕 위에 있다. 주거지와는 떨어져 있어서 날씨가 춥거나 비가 올 때는 주민들이 모이지 않는다. 주민들의 사랑방이어야 할 회관이 이렇게 외면 받는 이유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원래 마을 앞이나 마을 가까운 데에 세우려고 했는데 당시 같은 행정구역이었던 기룡마을과 중간지점을 찾다보니 언덕 위에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동산. 용구렁.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용학리 곳곳에는 옹기를 구웠던 흔적과 점등 무점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 마을에는 ‘용곡’이란 골짜기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용구렁이라고 부른다. 용이 살고 있던 골짜기란 뜻이다. 지금은 메워져 주택(정두환씨 소유)이 들어서 있지만 예전엔 그 연못을 메꾸려고 해도 메꿀 수가 없었다. 많은 흙을 들여서 메운 후 이튿날에 가 보면 흙들은 온 데 간 데 없고 다시 시퍼런 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연못에는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상스럽게도 다음 날 날씨가 좋으려면 물이 흐려지고 궂으려면 맑아지는데 이는 용이 물속에서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해인가 용이 승천한 이후부터는 연못이 자연적으로 메워졌다. 현재는 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닥나무골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서는 매년 당산제를 지내왔으나 근래에는 지내지 않고 있다. 주민수의 감소와 급격한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산제를 지낼 때는 음력 2월1일 지냈는데 마을의 평안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거리굿과 마당 밟기로 이루어졌다. 마을 옆 닥나무골에 아름드리가 넘는 닥나무 당산이 있어서 그곳에서 제를 지냈으나 오래 전에 태풍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마을에서 당산나무를 새롭게 심어 지내기도 하였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1970년에 세원진 효자조봉대부동몽교관안공비가 있다. 비의 주인공은 죽산안씨 입향조인 안기국의 손자인 안기관(자-중석. 1741-1801)이다. 또한 1995년에 세워진 성곡 장판수선생 공적비도 있다. 24번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금산김문평공덕비’가 있다. 김문평은 해제면 앞의 넓은 농지를 제공한 금산간척지를 조성한 사람으로 재일교포였다. 주민들은 농사를 짓게 해준 그의 공덕을 기려 1984년에 자발적으로 세운 비다.
설화
용곡 주변에는 총각묘와 처녀묘가 두 기가 있었는데 총각묘는 묘 주변의 주민이 택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없애버리고 현재는 처녀묘만 남았다. 처녀묘 주변의 주민은 지금도 묘에다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이 묘에 관련된 설화가 있음직한데 주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한평 기룡마을 앞 바닷가에 옛날에 우물이 있었는데 물이 깨끗하고 물맛이 좋아 문둥병 등 불치의 병을 낫게 하는 효험이 있었다는 전설이 잇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주변 마을에 장사로 알려진 안성익(安聲益, 자-종선. 1874-1948)이 있었다. 언젠가 아래 마을인 기룡마을에 있었던 모씨 제각을 마을 앞 마실산으로 옮기는데 주민 8사람이 들어도 들지 못하던 기둥을 안성익은 혼자서 들고 옮겨서 그때부터 주민들은 장사 안성익이라 불렀다. 뿐만 아니라 7사람이 나누어서 간신히 옮겼던 고기잡이용 발을 만들기 위한 대나무 짐을 그는 혼자서 지고 옮기니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