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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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월2리 해제면 용산 작성
  • 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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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총 46세대, 인구82명(남48, 여34) / 2024. 5. 기준.
자연마을 구성
용산은 유월2리에 속한 마을로 현경면에서 해제 쪽으로 24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해맞이 길로 접어들면 만나는 마을이다. 낮은 구릉을 등지고 함해만을 앞에 두고 있으며 야산 개발과 간척 사업으로 논과 밭이 많은 지역이다. 이 마을은 사기점, 작은 용산, 큰 용산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용산뒤에는 가마골이란 지명이 있는데 이곳에서 구운 가마를 사기점으로 옮겨서 배로 운송했다고 한다. 지금도 가마골 주변에서는 가마터가 있었으며 백자와 접시 등이 발견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엄섬과 대섬이 있다. 우리 지역에는 무안읍의 용산 복룡, 일로읍의 복룡리, 청계면의 복룡 마을처럼 마을 이름에 룡(龍)자가 들어가는 것이 많다. 이는 대체로 지형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강이나 바다를 향해 산의 맥이 흐르고 있으면 붙여지는 이름이다. 실지로 이 마을의 주민들도 마을 뒷산의 맥이 용의 형상을 하고 함해만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용꼬리는 물암 쪽이며 용머리는 니성산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지명유래
용산(龍山)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뒤 산의 이름인 용산에서 비롯되었다. 니성산의 한 줄기인 용산은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소유자의 이름을 따 구본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마을의 동편에 있는 바다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다 떨어졌다는 산이 있다는 설에 의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마을 이름을 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최초 입향조는 1870년에 들어온 고성이씨 이재섭(李在燮, 1838-1918, 初諱-재삼, 자-경춘)이다. (내고향해제 고을에는 1904년에 입향하였다고 기록). 그의 선대(先代)는 강원도 고성에서 세거하였으나 이괄의 난을 피해 함평으로 내려 와 살게 되었다. 이후 흉년이 들어 살기 어려워지자 입향조가 식솔을 데리고 살 곳을 물색하던 중 해제 천장리 보천을 거쳐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재섭 공은 고성이씨 족보에 의하면 임인년에 당상관 통정대부에 올랐던 사람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성산에서 흘러내린 용 형상의 형국이다.
마을성씨
고성이씨 외 여러 성씨가 혼합해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본래 유월리는 조선시대에는 함평현에 속했다가 조선조 말에는 목포부 해제면에 속한 지역이었다. 이후 1914년 오류동, 물암리, 월암리, 어은동을 합하여 무안군 해제면에 편입되었다. 오류와 월암의 이름을 따서 유월리라 불렀으며 지금은 오류, 용산, 물암, 언창, 월암, 유투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면 용산리로 나오지만 일제강점기인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1987년의 자료에 용산이란 마을이름이 다시 나온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을이름이 없는 이유는 이 마을은 물암마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장이 일본인 ‘작은 구본’으로 물암마을에 거주하면서 마을 일을 본 결과이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낮은 구릉을 등지고 함해만을 앞에 두고 있으며 야산 개발과 간척 사업으로 논과 밭이 많은 지역이다. 마을의 주업은 어업으로 숭어, 농어, 낙지, 보리새우, 굴, 석화 등이 잘 잡힌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염생 식물과, 저서동물, 조류 등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요 생산품은 마늘, 양파, 양배추이다.
주요시설
무안황토갯벌랜드.
마을변화
예전에 이 마을은 울창한 송림이 자랑이었다. 지금도 주민들은 ‘찍직한 솔밭’이란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칭하는 말인데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때 솔숲으로 들어가면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자리이다. 현재는 대부분 개간이 되어서 예전의 정취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좋은 토질은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외지에서 무안 양파를 사러 올 때 제일 먼저 이 마을을 거쳐 간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농지가 많다. 산림의 개간을 통한 농지조성과 마을 뒤 조심머리에서 원을 막아 농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해서 마을 주민들은 인근 마을에 비해 가구 당 농지를 많이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 때문인지 주민들의 학습열이 높고 화합과 단결이 잘 되어 주변 마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마늘, 양파, 양배추.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 바다는 썰물이 되면 3㎞가 넘는 갯벌이 드러난다. 이곳의 갯벌은 지형의 자연 상태가 원시성을 잘 유지하고 있어, 생물종이 다양하고 청정 환경을 갖춘 곳으로 갯벌의 생성, 소멸과정의 관찰이 가능하여 갯벌의 보전가치가 인정되어 해양수산부 연안습지보호지역 제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으며 전남도립공원과 람사르 습지로도 등록이 되어 있다. 또한 수심이 얕고 모래성분이 우세한 서식환경과 복잡한 해안선은 어류의 서식장소로 뛰어난 여건을 갖추고 있다. 2011년 5월 개관한 마을 앞 백두(白頭)라는 곳에 세워진 ‘무안생태갯벌센터’로 문을 열었다가 현재는 무안황토갯벌랜드로 이름을 바꾸고, 황해 생태계 보전사업의 일환으로 습지환경과 갯벌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자연생태학습장이다. 또한 이 마을주민들에게도 새로운 소득 창출의 기회를 제공해 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민들은 센터가 들어오고 나서 마을에 도움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조심머리 앞에 마을의 공동샘인 ‘샘너머’가 있다. 지금은 메워져 있지만 예전엔 마을 주민 모두가 사용했던 샘이다. ‘샘너머’라 한 이유는 주민들이 고개를 넘어 물을 길러 와야 병이 없이 건강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갯벌센터가 들어선 자리를 백두라 부르는데 사람 뼈들이 하얗게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전염병이 들어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여기에 시신들을 버렸다고 한다. 초분골로도 불려졌다. 마을 뒤 산구릉상에 ‘용골’이란지명도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무안황토갯벌축제가 매년 1회 열리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에는 1970년에 세운 ‘통정대부고성이공유허비’와 1980년에 세운 ‘이준수선생교은비’ 그리고 2002년에 세운 ‘이맹수공덕비’가 있다. 또한 《내고향해제고을》에는 1950년대에 건립한 용산재가 있다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설화
갯벌랜드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우측에 간척하기 위해 둑을 쌓았으나 성난 용이 꼬리를 쳐서 둑을 막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기록물, 문헌
고성이씨 문중에 대대로 내려오는 여러 서적들을 함평으로 가져갔다가 한국전쟁 중에 분실하고 현재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홍씨들이 살고 있던 때에 홍씨집안의 삼형제들이 조심머리에서 놀다가 개웅 속의 간재미를 발견했다. 이중 막내가 간재미를 잡으려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고 깊은 곳에 빠져 버렸다. 이를 구하러 형제들이 차례로 들어갔으나 모두 물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이런 참사가 일어난 후에 홍씨들은 ‘이 마을에서는 후손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없겠구나’ 여기고 마을을 떠나 나주 노안으로 이사를 가버린 것이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출처

각주
미기재
참고문헌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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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2026.11.0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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