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이 넓은 평야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평정이라 했다’고 하나 주민들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마을 뒤에 두 그루의 팽나무가 있는데 팽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정자나무라 하기도 한다. 해서 처음엔 팽정으로 부르다가 평정으로바뀌어진 것이다. 즉 평정이란 마을이름은 평야지대의 위치성과 정자나무의 편안함을 고려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함평이씨다. 마을유래지에는 ‘평산신씨가 경상도에서 남녘으로 와 살 곳을 찾다가 이 마을의 지형을 보고 여기다 터를 잡으면 자손이 번창하게될 것이라 여기고 정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또한 주민들은 이 마을이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하나 훨씬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700년대 후반에 나온 지명자료인 호구총수에 마을 이름이 있고 주민 중 함평이씨가 13대조까지 시제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봤을 때 마을은 400여년이 넘는역사를 갖고 있다. 또한 입향조는 평산신씨가 아닌 함평이씨로 볼 수 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입향시조와 성씨자료’를 보면 삼향면 남악리 안동의 입향조인 함평이씨 이숙항(李世恒. 자-숙첨, 호-독청당, 1521년에 나주에서 태어남)의 기록에서 그의후손들이 일로면 회인동에서 살고 있다고 해 입향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후에 신씨와 나주오씨 김씨 등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은 지형이 조리형국으로 앞은 간척지로 인한 평야지대이다. 1920년대 영화농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논농사보다는 어업이 주소득원이었다. 예전에는 마을 옆으로 호남선 철도와 811번 지방도로가 나란히 놓여있었으나 현재는 호남선 철도가 이전하였고 대신 마을 앞으로 회산 연꽃 방죽으로가는 넓은 길이 나있다.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999년 11월에 월성 마을과 분리(分里)된 평정은 용산3리에 속하는 마을로 일로읍에서 1㎞ 가량 떨어져 있다. 평정이란 마을 이름이 1789년에 발행된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平亭里로 나오나 일본제국주의 시대인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이나 1917년의 조선면리동일람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광복 이후에 다시 평정리가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 이 마을은 가난하게 살았다. 농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쁜 농사철에는 새벽 2시나 3시가 되어야 자리에 누울 수 있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이처럼주민들이 모두 근면하고 부지런해 다른 마을보다 일찍 경제적인 기반을 잡았다. 주민들은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다른 마을의 할머니들처럼 무릎을 수술한다거나 허리를 수술한 사람이 없음을 자랑하고 있다. 그만큼 건강한 마을이란 것이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도로망이 확충되기 전 이 마을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농장이 간척지이기 때문에 비만 오면 질컥거려 다니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간척 초기에는 물길이 닿지 않아 논에 뽕나무를 심기도 했다. 또한 세발 나물을 뜯어 먹기도 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마을의 주 소득원은 잎담배와 시금치로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농경지가 작아 넉넉한 편은 아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뒤에 두 그루의 팽나무가 있는데 팽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목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정자나무라 하기도 한다.
동/식물
뒷등에 있는 두 그루의 팽나무는 2세 팽나무이지만 이곳에서 30여 년 전까지당제를 지냈다.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없어 당제를 계속하지 못하지만 당제를 지낼때는 풍어와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했었다. 원래 있었던 팽나무는 성인 두 사람이 팔을 벌려 감싸 안아도 남을 만큼의 크기와 연륜을 가졌지만오래 전에 고사되고 지금의 나무는 새로 자란 나무이다.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을 보면 이 팽나무는 배를 매어두던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은 개천(똘)을 경계로 아래는 갱골이라 하고 위는 뒷등 또는 똘 너머라고부른다. 대체로 갱골 사람들이 넉넉하게 살았으나 뒷등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고한다. 또한 일로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를 덕앳등이라 하고 회산 연꽃방죽으로넘어가는 모퉁이를 청룡등이라 부른다. 여시골 터진목 장짓등도 있다. 지장리 지장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인동마을에서 만나 똘을 만들고, 마을을 가로질러 무전산으로 흘러간다. 해서 뒷등을 가려면 똘을 건너야 하는데 그때 건넜던 독다리가 마을의 표지석이 되어 길옆에 서있다. 현재 똘은 시멘트로 메워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오래 전에 마을 앞 들에서 고총으로 여겨지는 둔덕을 파다가 동전꾸러미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마을에 꼬막다물(꼬막따물)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꼬막 등 조개껍질 등이 무더기로 발견되는 곳이다. 또한 마을의 지층은 모래 바닥이다. 선사시대에 이곳은 해안가로서 모래벌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에는 두개의 샘이 있는데 박아샘과 통샘이 그것이다. 박아샘은 뒷등에 있는 샘인데 아무리 한해가 깊어도 물이 마른 적이 없었으며 수량이 많아 인근에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주민들은 그 물을 약수로 사용하고 있다. 통샘은 갱골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작년에는 목포소방서에서 주는 ‘화재없는 안전마을’이란 상패를 받기도 했다. 무안군에서 두 개의 마을이 선정되는데 그중 한마을이된 것이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주민들의 근면함과 검소함이 생활화 되어 있어서 일로농협에서 빚을 가장 적게 쓰는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회관 앞 표지석에는 ‘성실, 화합, 단결’이라는 표어가 적혀있을 정도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높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