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촌은 신흥마을이라고도 불리며 1971년에 월암리가 1,2구로 나뉘어지면서 형성된 마을로 대부분의 주민이 시장 상인들이다.
지명유래
신흥마을은 1구에서 분구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시장통, 시장촌이라고도 불렀다.
마을형성(입향조)
미기재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일로 장날(1일, 6일)이 되면 근방의 걸인패들이 판을 치고 다니며 각설이 타령도하고 시끌벅적하게 흥청거렸던 곳이다. 특히 이곳은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영암군 미암과 삼호에서 청호리 주룡나루를 통해 장을 보러 오고 나주 동강, 무안의 청계 몽탄 삼향과 목포 등 4개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으니 일로 장날은 그 자체가 큰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어찌나 사람들이 많았던지 마치 개미들이 우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일로장이 컸었던 것은 영산강이라는 지리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난장판이 되었다. 시장 곳곳이 움푹 패이고 진흙 뻘땅이 만들어져 장화가 없이는 생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인정이 있었고 웃음과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장이 형성된 곳은 운송로가 좋고 물산이 풍부한 영산강 주변의 나주와 무안이라 한다. 하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나 흔적이 없어 확인할 수 없지만 영산강 주변인 일로에서 처음으로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하지만 주민들과 대화에서도 삼향장 이전의 장터는 모른다는 것이다.원래 시장촌 자리는 농지였으며 군유지였다. 군에서 시장을 형성하면서 이곳에 국민주택을 지어 보급하였다. 그러다 1970년대 광주세무서 직원이었던 이석호에게 땅을 빼앗겨 군에서 재판을 통해 다시 찾아오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현재는 개인들이 군으로부터 불하를 받아 군 소유의 땅이 많이 줄어들었다
주요시설
일로장
중앙교회는 40여년 전 무전산쪽에서 이사를 왔다.
마을변화
일로장은 영산강의 영향으로 당월촌에서 시작했다가 지장리 송태(삼향장, 세명장이라고도 함)로 옮겼다. 이어 일제강점기에 일로역이 개설되면서 일로역 후문과 연결되는 강남산 마을에 장터가 이전되어 형성된 것이다. 그러다 장소가 좁아 1956년(1960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시장상인의 30%가 주민이며 피복이나 잡화상은 외지인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원래 이곳은 뻘밭이었다. 지금도 조금만 깊게 파면 뻘이 나온다. 그러다 물이 빠지면서 농지가 되었고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시장터를 조성할 때 무안군에서는 일로 지역 아녀자들을 동원하여 민속놀이인 강강수월래를 하면서 터 다지기를 하기도했다. 또한 터가 좁아 우시장이 활성화 되지 못할 때 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정학남(82세. 털보식당 운영)씨가 478평을 아무 조건 없이 무안군에 희사했다. 무안군은 그 땅을 축협에 매도해 일로장의 대표적인 상품인 우시장이 활성화 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일로장에 오는 길은 영암에서는 영산포로 우회하여 온다.
목포에서는 일로를 거쳐 신작로 길로 왔다.
몽탄은 열차가 다녔다. 걸어다니는 길은 명산쪽으로 걸어다녔다.
청호가는 길은 좁고 풀이 많았다.
영암쪽에서 주룡마을에 배를 타고 왔는데 월출산에서 약초를 캐서 가지고 와 팔았고 설모초는 겨울에 갱엿으로 만들어 먹었던 풍습이 있다.
망월리와 청호에서 돼지새끼를 지고 올 때는 설망태에 지고 오거나 아이를 업듯이 업고도 왔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일로시장 터를 다질 때 일로읍에서 강강술래 대회를 개최하여 저녁에 강강술래 대회를 하였다. 백오동(용산4리)가 1등을 하였고 죽산리가 2등을 하였다.
유물, 유적
미기재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인의예술회 – 1978년 김시라씨가 고장을 학문과 예술, 사랑의 진원지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대학생을 중심으로 조직한 문화단체로 인의연극제(향토연극제)의 제2회 공연작품으로 <품바>를 일로읍 공회당에서 초연(1981.12)한 후 6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1,500회 공연을 하였고 미국, 일본 등 해외공연을 하여 3,000회 공연을 하였다. 1996년 한국 최장기, 최다공연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자료제공 인의예술회 품바학개론) 현재 인의예술회는 축협 2층에서 지역사회를 위한 문화예술행사와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진흥사업과 작은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시장에는 두 개의 명물이 있다. 하나는 일로 국밥이다. 국물 맛이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난다. 국밥집 주인인 장영자씨는 시어머니 때부터 해온 장사로 처음엔 영산강과 남창촌에서 잡아 올린 가물치회로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영산강과 남창천이 오염되고 가물치의 명성이 사라지자 국수집과 국밥집을 했는데 시어머니의 음식솜씨가 뛰어나 맛있기로 널리 알려졌다. 시장이 썰렁해진 지금도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전의 맛을 찾아서 온다.
두 번째는 품바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로 장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난 손님이 각설이패들이다. 장타령으로 불려지는 각설이 타령은 세명장에서부터 있어왔으며 품바는 이 각설이패들의 가락과 사설을 발전시킨 것이다. 각설이의 주인공 자근이는 원래 남창천의 큰강다리 밑에서 거주하다 의산리 천사촌으로 이주하였으며 키가 작았지만 의리가 있었다. 남을 속이지도 않았으며 도둑질은 물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한테는 거지였지만 인기가 있었다. 또한 그는 마케팅의 전략가였다.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얻어먹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 거기다 등에는 아이를 업고 입으로는 장타령을 잘 불러 인기도 있었다. 후일 이 장타령은 사위인 김광진에게 전수되었고1980년대에 김시라를 만나면서 품바라는 예술로 발전한 것이다. 자근이는 땅꾼이기도 하였다. 장날이면 손님을 끌기 위해서 직접 잡은 뱀들을 가지고 뱀장사를 하기도 했다. 해서 인근의 시장 군수 서장 등 권력가들이 뱀탕을 먹기 위해서 자근이를 찾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결핵 환자들에게는 구세주이기도 하였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현재 시장촌 주민들은 불만이 많다. 시장이 흥청거리고 우시장에서 소는 150마리, 돼지가 50마리 정도 거래가 될 때는 주민들이 살기 좋았다. 하지만 현재는 도로의 발달과 인근의 대형 상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2년 전 일로시장의 큰 축이었던 우시장이 구일로 역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시장의 위상은 대폭 축소되었다. 뿐만아니라 인근 지역인 남악에서 운영되고 있는 대형마트는 상인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또한 전통시장 현대화의 일환으로 건설했던 시장촌 안의 각종 구조물이 오히려 시장의 발전에 저해가 되어 난처한 지경이 되었다. 실지로 8시만 되면 일로 거리에는 불 켜진 가게가 거의 없다. 유령의 도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우시장이 이전하면서 무안 축협이 소유하고 있었던 시장터 일부를 주민들에게 희사해 그곳에 마을회관을 지어 주민들의 쉼터로 사용하게 된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고 있다. 주민들은 시장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님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먹거리를 특화시켜 물건을 파는 것보다 보여주고 먹게 해주는 것이 일로시장을 살리는 길이라고 한다. 해서 현대화된 건물보다 간소한 비가림 시설로 노점상들이 들어서고 엿장수를 비롯한 각종 길거리 장수들도 자리를 잡아 흥청거릴 수 있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마을사진을 찍으러 다니던 중 중앙이발관에서 구 역사전경사진을 액자에 걸어두신 것을 발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