復興亭은 월암리 6리에 속하는 마을로 9리의 숲돌이와 연소동과는 한 마을이었다.
일로읍에서 청계 방면으로 문화로를 따라 200여 미터 가면 나오는 마을이다.
지명유래
復興亭이란 지명의 유래는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마을이 형성될 당시 피폐했기에 다시 일어나라는 뜻으로 부흥정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잘못 알려진 지명유래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원래부터 간척등 넓따란 농지를 갖고 있어 마을이 풍족한 마을인데 가난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해서 주민들은 다르게 지명유래를 말하고 있다. 지금은 교도소가 들어선 마을 뒷산의 지형이 반달형이다. 반달도 지는 반달이 아니라 보름달이 되어가는 반달형이다. 해서 주민들은 뒷산으로 달이 뜰 때마다 마을도 저 달처럼 다시 일어서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 부흥정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마을 시조가 입향하여 제례를 올릴 때 부엉이가 울었으며 집을 지을 때도 부엉이가 상량보에 앉아 울었다고 해서 부엉마을로 불려졌다. 이후 이것을 길조라 여겨 마을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 생각해 한문으로 마을 이름을 쓰면서 부흥정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주민들도 마을의 주산인 뒷동산에 부엉이가 많이 살고 있어 저녁이 되면 ‘부엉 부엉’ 하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고 또한 벙쟁이 벙개 마을로 불리기도 했는데 지금도 주변의 어른들은 벙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자료와 증언들을 바탕으로 살펴 볼 때 부흥정이란 마을 이름은 부엉이 소리를 음차 하여 지은 지명으로 추정된다.
벙쟁이는 부엉이로 이장님 어렸을 때도 벙쟁이마을로 불렀다. 벙개마을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금령김씨 金恒秋(1636 - 1727, 자 - 鳴義)다. 공은 조선 세조 때 충신인 충의공 김문기의 8세 孫으로 남원에서 세거하다가 아버지 代에 영암군 아산으로 이거했다. 이후 1689년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은 거주지를 벗어나 이곳 일로읍 부흥정에 자리 잡고 이름을 숨긴 채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보냈다. 또한 풍류를 즐기면서 후손들의 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주민들은 성주 都씨와 금령 金씨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하나 都씨의 입향 연도나 족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이장님의 증조할아버지때 성주도씨는 영암에서 이주해왔으며 청호에서 배타고 영암을 오고갔다고 한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자료로 지명의 흔적을 찾아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부흥정이란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고 1912년과 1917년의 자료부터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광암 마을과 함께 당시 일로면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마을이었다. 인물도 많이 났을 뿐 아니라 주민들이 얼마나 근면하고 성실했던지 식민지 토지 수탈의 앞잡이였던 동양척식회사가 이 마을 주민들의 근면함과 선진화된 영농기술을 보고 상을 준 일이 있을 정도였다. 실지로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5-60년대에도 앞서가는 농촌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주민이었던 김재규씨는 목화씨를 가져 와 목화밭을 일구어 많은 소득을 올리자 목화재배 시범지구마을로 선정되었으며 주변 마을에 보급하기도 했다
1950년대 60년대에는 왕골을 심어서 모자를 만든다거나 돗자리를 만들어 많은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일로에서 전깃불이 이 마을에 빨리 들어오기도 했다.
왕골재배는 60년대 후반에 87호 정도가 재배하여 모자, 가마니, 돗자리 등을 만들었고 70년대 초까지 재배하였다.
목화재배는 1980년까지 재배했다.
벼농사와 옥수수, 고추, 갓 등을 재배하고 있다.
주요시설
마을 뒤에는 1989년 11월에 들어선 목포교도소가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장항포 간척으로 조성된 농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마을 오른쪽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와 호남선 고속철도가 지나고 있어 조금은 시끄럽기도 하다. 또한 마을을 가르고 가운데로 문화로가 지나고 있어 마을이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마을변화
1989년 11월 마을의 주산인 뒷동산의 일부인 숲돌이라 부르는 지역에 9만여평의 목포교도소가 들어섰다. 숲돌이란 지명은 숲이 울창하게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목포교도소는 주민들을 많은 어려움에 빠지게 하였다. 교도소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좋지 않은 이미지와 교도소 주변이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이면서 주민들의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학혁명이나 한국전쟁 등 나라의 변란기에도 주민들의 피해가 하나도 없었던 마을이다. 또한 일찍부터 대부분의 주민들이 송태마을 바우동에 있는 서당에 다녀 문맹자가 없으며 주민들의 학습 열의가 높아서 관공서 등 공무원의 배출이 끊이지 않았던 마을이기도 하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다. 예전에는 마을 계모임으로 부흥회를 운영하였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일제강점기 때 장항포가 막히면서 마을 앞의 남창천이 농지로 변하는데 그때 갯벌을 농지로 조성하면서 주민들은 암거(지하에 설치되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도랑 또는 통수로)를 만들어 그곳에 대나무 다발(쑤기라고도 함)을 묻어 염분을 제거하였다. 이러한 간척지 염분 제거 방법은 장항포 들 주변에서 많이 시용되었는데 광복 이후에는 마을 주민들이 암거 속의 대나무를 파내어 집을 짓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정각 앞 샘터는 마을 샘터로 빨래도 하고 물을 길어 먹었던 곳이다. 마을회관 앞을 복개했는데 그 전에는 빨래터였다.
도마강을 사이에 두고 맥포랑 견제하며 놀았다고 어르신들은 회고하였다.
동/식물
팽나무 당산이 김씨 문중 선산과 도윽한씨 탯자리의 경계에 있었다.
간척 전 개웅에서는 참게도 잡았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교도소 자리로 편입된 보자기골과 짓쿠테이, 행기방천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짓쿠테이는 한쪽귀퉁이라는 말로 마을 삼거리 쪽 위치가 짓쿠테이라고 한다.
보자글은 지장리 저수지 위쪽으로 다랭이 논으로 되어있었다. 천수답으로 둠벙을 만들고 농사를 지었던 곳으로 현재는 교도소에 편입되었다.
돌캐뜰은 철길 밑을 말하며 모래가 많이 나왔다.
싯두리는 작은 마을로 7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숲돌지역에 포함되었고 지금은 소실되었다.
숲돌은 교도소가 들어선 지역을 말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에서 감돈리 방향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농협창고 앞에 성주 도씨 ‘도지삼의 妻 김소지’의 정절비가 있었다. 원래는 마을 앞 돌캐뜰에 있었던 것인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비문을 보면 내용에 김해김씨나 달성배씨가 아닌 여인의 이름이 직접 나타난 것도 흥미롭고 1910년(명치43년. 경술년) 일본통감의 표창을 받은 기념으로 세운 비인 것도 관심을 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뿐만 아니라 주민 중 일로면장을 역임했던 분이 있었다. 김용균이라는 분으로 면에 나갈 때는 늘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마을 앞에 돌캐뜰이라는 간척지가있는데 이 간척은 서울 사람이 해서 마을 주민들은 소작을 해야 했다. 그런데 소작료가 워낙 비싸 불만이 많았다. 이때 김용균은 주민들로 농지위원회를 조직하여 지주와 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서 소작료를 인하하기도 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일로제일교회는 일로에서 처음 교회가 생겼던 곳으로 100여년 정도 된다. 도로가 나면서 옮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