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소동은 월암9리에 속하는 마을로 일로농협 주유소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목포에서 일로로 들어오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으며 교통상으로도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자방포의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며 남창천이 흐르고 있다. 원래는 월암 6리의 부흥정과 같은 행정구역이었으나 오래 전에 분리되었다. 하지만 마을의 입향조나 성씨의 분포도는 부흥정 마을과 매우 비슷하다.
지명유래
燕巢洞은 마을의 풍수적 지형을 본따서 붙인 이름인 제비집골이다. 강냉기 잔등의 안쪽에 있는 마을의 위치가 臥牛형의 오목한 지형으로 마치 반달형의 제비집을 연상케 하고 있다.
특히 마을 뒷산인 남양 홍씨 門山은 황소안 마을까지 연결되는데 이곳에는 주민들이 제비똥이라 부르는 바위들이 30여 미터에 걸쳐서 놓여있어 지명의 유래를 짐작케 해 준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처음 들어 온 성씨는 금령김씨와 성주도씨 이다. 대체로 부흥정과 한마을이었다가 행정적으로 분리되어서 부흥정의 입향조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흥정 마을의 입향조는 금령김씨 金恒秋(1636 - 1727, 자 - 鳴義)다. 공은 조선 세조때 충신인 충의공 김문기의 8세 孫으로 남원에서 세거하다가 아버지 代에 영암군아산으로 이거했다. 이후 1689년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은 거주지를 벗어나 이곳 일로읍 부흥정에 자리 잡고 이름을 숨긴채 자연을 벗 삼아 평생을 보냈다. 또한 풍류를 즐기면서 후손들의 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다. 금령 김씨보다 일찍 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성주도씨의 입향조는 확인할 수 없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는 물론 1912년 1917년의 자료와 근래에 만들어진 1987년의 자료에도 연소동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봤을 때 연소동이란 마을이 독립된 마을로 자리 잡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의 감자재배는 흙으로 집을 지어서 위에 흙을 덮어 감자보관창고로 사용하였다. 군에서 운영 한 것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주요시설
마을에 일로한우리교회와 노인재가복지원 일로개발청년회 사무실 등이 있다.
마을변화
마을에는 82년도에 취락구조가 형성되고 84년에는 마을 한가운데에 대동아파트가 들어섰으며 86년에는 숲둘이를 포함한 마을 뒷산 9만여 평에 목포교도소가 들어섰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 마을이 농가로서는 주변 마을에 비해 앞서가는 마을이었다. 특히 목화재배에 뛰어나 목화재배 시범지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마을에 커다란 연자방아가 있었으나 교도소 건설 때 묻혔다. 여내기와 쳐다보면서가는 재라는 의미의 보자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뒤에 있는 제비똥 바위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바위가 아니며 바위의 색깔도 마치 제비똥처럼 3색으로 보인다. 지금은 바위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자방포 들[野]의 다리를 놓는데 사용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쪼갠 흔적들이다. 예전에는 이 바위의 영험함을 믿고 이 마을 주민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와서 공을 들였다고 한다.
강내기 잔등 주변은 강이었다고 한다. 즉 개웅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남창천이 아니고 화천으로 불리웠다고 알고계셨다.
동/식물
또한 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는 예전 취락촌에 있었던 산과 연결되어 제비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빨랫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주민들도 마을 자체적으로 역사가 300여년이 되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을회관 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들 수령이 300여년이 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데서 비롯된다. 원래는 7그루의 소나무가 있었으나 몇 해 전에 재선충에 감염되어 고사되었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소나무 아래에서 쉬기도 하고 당산제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인구감소 및 관심이 없어 지내지 않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은 연소동을 포함한 숲둘이(숲두리, 싯돌) 江來汽(강냉기라고도 함) 취락구가 모여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숲둘이는 마을 오른쪽의 골짜기로 숲이 우거진 마을이다. 원래 신안주씨들이 이곳에 살았다고 하나 현재는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골이 깊고 숲이 잘 가꾸어져서 붙여진 이름인데 어휘의 변천으로 싯돌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곳곳에는 기와조각 등 생활도구들이 나와 예전에 주거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강래기는 강냉기라고도 부르는데 예견지명을 나타낸 이름이다. 즉 증기를 내뿜는 기구가 강을 건너온다는 지명으로 마치 기차역이 들어서는 것을 예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입구 사거리에 백범선생추모비와 백범선생추모비건립사실기의 두기의 비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턴가 이 비가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다행히 일로읍의 주민이 영암에 이 비가 있는 것을 보고 일로읍사무소에 연락하여 되찾아온 것이다. 되찾은 비는 일로읍 사무소 앞에 놓여있는데 예전의 비가 아닌 새로 제작한 비다.
이 비는 일로읍 산정에 살던 정재연씨를 비롯한 삼일동지회에서 1979년에 세운비다. 비에는 백범을 존경하는 정재연씨가 다산사를 창건하면서 다산 정약용과 백범 김구를 동배 향사하였는데 풍우로 다산사가 훼손되자 다시 중건하여 모시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이곳에 비를 세워 사실을 기록한다고 쓰여져 있다. 동지회 사람들이 건재했을 때는 매년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