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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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로 1리 청계면 구로마을 작성
  • 구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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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마을 세대수는 119세대, 총인구수는 203명(남 99명, 여 104명)이다.
자연마을 구성
미기재
지명유래
'구로(九老)라는 지명은 옛날부터 9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매년 9명 이상이 살아가는 장수마을이라 해서 구로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원래 구로(龜老)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마을이름으로 ‘구(龜)’자를 쓰기 어려워 ‘구(九)’로 표기했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구(龜)와 구(九) 모두 장수를 의미하는 뜻이기도 하지만 장수하는 분들이 인근 마을에 비해 많은 편이다. 기름진 갯벌의 수산물과 북풍을 막아주는 부섬산 기슭의 밭농사를 지으며, 또한 글을 배워 충, 효, 예를 행하며 살아가는 마을 구성원이 주변 환경과 어울려 살기 좋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정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마을이 형성될 때는 나주오씨, 전주이씨, 나주정씨 등이 살았는데, 성균관 교리를 지낸 정수신 공의 영향으로 나주정씨의 집성촌으로 되었으며 현재는 귀촌한 이들도 함께 사는 복합성씨 마을이다. 나주정씨의 입향조는 정립(丁粒,. 1601-1639)으로, 병자호란 때 한양을 떠나는 임금을 식음 전폐하며 호종하였다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근신하다가 의병을 모아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갔는데, 이때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바로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갈마산(부섬산. 부사산)에 들어가 벽해상에 집을 짓고 살았다. 정립 사후 경흥부사를 제수받아 사람들은 갈마산을 부사산(府使山)이라 하고, 그 마을을 벽해동(碧海, 비가동이라고도 부름)이라 불렀다. 후일 규장각의 직제학을 지낸 민경호는 정립공의 묘비에 ‘벽해(碧海)물은 상전(桑田)으로 변하지 않고/ 부사(府使)산빛 끊임없이 푸르도다/ 의(義)를 중히 여기어 중화를 받들고/ 정성은 나라에 간절하도다/ 일을 마치지 못하고/ 필마로 고향에 돌아와 39성상을 마감 하도다.’ 라고 썼다. 시조로부터 26세손인 무안 입향조 연안부사 정대흥은 단종조에 급제하고 형조정랑 및 집현전 학사를 지냈고, 연안부사부터 32세손인 구로리 입향조인 정립의 38세손이자 성균관 교리(정 5품)를 지낸 정수신 등 6대마다 벼슬을 지낸 조상들의 영향으로 양반마을로 인정받았다. 나주정씨뿐만 아니라 당시의 세도로 인근 마을에서 함부로 범접하지 못했다고 한다. 벽해동은 바닷가에 동백이 있었던 마을로 현재 나주정씨 구로동 시조묘가 있다. 벽해는 ‘짙푸른 바다’를 말하며, 상전벽해(桑田碧海)는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라는 뜻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학두봉에서 이어진 마을 모습이 어머니 팔베개 같은 능선 아래 남향의 타원형으로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다. 동쪽으로 부사산이 품어주고 서쪽으로 청계만의 비옥한 바다와 갯벌이 풍요로운 어촌마을이다.
마을성씨
이곳에는 119세대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나주정씨일 만큼 자작일촌 마을의 성격을 이루고 있지만, 현재는 다양한 성씨들이 어울려 사는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행정구역명으로는 청계면 구로1리 구로동 마을이다. 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벽해동이라고 했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벽해동은 보이지 않고 구로동과 관동이 나타난다. ‘구로리’라는 마을명은 근대에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일서면 대암리와 벽루정으로 되었으며, 1912년 자료에는 일서면 관동리 구로동으로 나오고, 1919년 저료에서 청계면 구로리 구로동과 관동으로 된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지방도 825번 도로가 마을 옆을 지나 구로 2리 관동마을과 강정1리 마을과 연결되어 있다. 건너편에는 운남면 영해마을과 마주 보며, 앞은 수산자원 풍부한 기름진 갯벌과 바다인 청계만이다. 갯벌의 다양한 생태계는 주민의 삶도 변화시켰다. 1980년도 초반 창포만 간척으로 해류 흐름에 변화가 생겼고, 간척지에 조성된 골프장으로 청계만이 오염되어 예전과 같이 미생물이 많거나 유속이 빠르지 않아 김양식 등을 할 수 없어 소득이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낙지 어획으로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게 된 계기가 되었고 경제적으로 풍부해진 황금어장이라고 한다. 낙지 어선이 40여 척이 넘을 만큼 주민들에게 청계만은 천혜의 어장이 되었고 맨손어업으론 굴과 바지락 등을 채취한다. 청계면 내에서는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반농반어(半農半漁) 지역이자 밭작물의 주소득원은 양파이다.
주요시설
농업법인회사 행복한 농부, 구로중앙교회 등
마을변화
마을 앞에는 1962년에 바다 물길을 막은 530미터 길이의 제방이 있다. 이 간척지는 3년여 동안 주민들의 울력으로 이루어낸 것인데, 농토가 적은 마을에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이 마을의 화목함을 알려주는 것이 향우회이다. 이 지역에서는 드물게 마을 향우회가 서울에서 열리는데, 그날이 되면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올라가 모임에 참여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마을의 발전을 위해 의견을 모은다. 또한, 노인회, 부녀회, 영농계 말고도 1930년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내려오는 동계(마을 공동으로 굴 양식장을 운영하여 수익금으로 마을 기금조성)가 있고, 주민들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갈 때 장학금을 주는 축산장학회, 그리고 1965년에 설립된 어촌계가 있다. 영농자금을 활용해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어촌계를 설립했다는 정균영 옹은 이 어촌계가 청계만에서 도대, 강정, 관동을 포함한 상당히 큰 계였다고 한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정자. 구로중앙교회, 공연무대
전통식품/특산품
낙지.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부사산(부섬산. 상곡봉, 학두봉, 갈마산), 청계만(비옥한 바다와 간척지 논밭)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 주변에는 많은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생활자기를 구웠던 점등, 활을 쏘는 사장등, 청계만 ‘물길의 망을 본다.’해서 망불재(망볼재), 사또가 머물렀던 자리라 해서 사또자리, 용이 목이 마른 형국이라는 갈용동(또는 가랑굴)이 있다. 또한, 당나라와 원나라 등의 중국배가 드나들었던 땅재(당재, 당고개)와 러시아배가 정박했다고 하는 코재이 등은 구로동이 오랜 항구였음을 나타낸다. 3개의 공동우물(갸두리, 웃샘, 아랬샘), 솔배미, 갸두리, 인내잔등, 개어덕, 군산앞, 딸건네(돌건너), 서너바뀌, 갯물, 코재이, 산골, 짝굴(적굴, 절골), 땅골, 물만동골, 비가동(벽해동), 바람재, 장골 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매년 진행하고 있는 <153 구로마을 열린음악회>는 2016년 당시 마을주민 153명의 친목도모와 살기좋은마을만들기 일환으로 구로중앙교회 김종수 목사의 기획으로 시작했다. 구로열린음악회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구로리 개발위원회가 주관한 행사는 2024년 7월 16일 제6회 음악회를 성대하게 마쳤다.
유물, 유적
금성나씨 열부비각은 1969년 건축된 시멘트 구조물이다. 16세에 정해창에게 시집온 나씨는 혈육을 갖기도 전에 남편이 불치의 병을 얻었다. 남편의 병이 쾌차하길 지극정성 보살피고 매일 목욕 재개하고 기원하였으나 남편은 회복하지 못했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6세)을 키워 성혼시킴은 물론 그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후일 아들이 양모의 갸륵한 정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열녀각이다. 마을 동쪽 갈마봉 기슭에는 1920년에 지어진 나주 정씨의 재실인 영모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1, 5칸의 팔작지붕이며 기둥마다 5개의 주련이 있고 안에는 16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특히 주련의 글씨체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체가 아닌 독특한 필체의 글이다. 이 영모재에는 후손인 정규한의 시가 있다고 《면성지》에 나온다. ‘명기를 택하여 길일에 이루었으니/ 천만의 기상이 강성을 눌렀도다./ 이슬에 느끼어 주저하니 풀이 나옴에 가련하고/ 서리를 밟아 슬픈데 기러기 울음 한스러워라/ 솔 그늘 울울하고 하늘 날은 저문데/ 비 기운 어둡고 바다 바람 불어오도다./ 춘추로 잔을 올리고 향사(享祀)를 받으니/ 성심이 있어서 정을 모두 발하도다.’ 영모재 옆에는 열부은진송씨의적비, 열부전주최씨행적비 그리고 문중묘 아래에는 낙헌나주정공효행비, 백아나주정학진효행비(행적비), 강사정해준(선생)기적비 등이 있다. 벽해동에도 나주 정씨 재각인 연향재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1, 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이 있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이 재각은 관리가 되지 않아 주련이나 현판은 모두 분실되었다.
설화
이 마을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을 채록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획을 그었던 동학혁명에 참여하여 의로운 뜻을 부르짖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후퇴하는 동학군에게 주민들이 관군 몰래 식량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을 뿐 사실 확인이 어렵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성균관 진사의 배출로 마을 한가운데에는 솔대미라는 지명이 있다. 마을 중앙 금성나씨 열부비각의 옆을 솔대미라 부른다. 솔대미는 솔대배미의 줄임말로 조선시대 마을 주민 중에 진사 급제자가 있으면 기념으로 조성했던 곳이다. 주인공은 1800년대 성균관 직강으로 활동하다가 귀향한 정수신(丁秀臣, 1787–1844)이다. 이외에 정대흥(丁大興, 1428-1498, 통훈대부, 형조정랑, 집현전 학사), 정립(丁粒, 1601-1639, 구로리 입향조, 호조좌랑, 한성서윤), 정여석(丁汝錫, 1618-1691, 입향조 정립의 큰아들로 명리와 공명을 멀리하고 가학으로 고향을 지킴)
거처/생가/묘소
마을 입구에 마치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는 묘가 있다. 비석에는 ‘성균진사 정수신의 묘’이다. 마을의 역사와 전통을 나타내고 있는 곳이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이 마을은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지금까지 주민들이 비명횡사를 당한다거나 궂은일을 당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민들은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2000년대 들어서 아름다운 청계만 갯벌과 노을을 조망하는 경관과 깨끗한 마을환경이 자랑이다. 마을만들기 사업으로 선정된 “나눔으로 행복한 얼쑤! 9988 구로동 마을”만들기를 통해 문화교실, 문화광장, 황금바다길, 마을환경정비 및 문화나눔 공동체만들기를 하여 문화동아리, 마을소식지 제작, 국내 선진지견학 등을 시행하고 마을 브랜드 개발. 문화축제 등을 진행하고 있는 무안군 마을활성화의 대표적인 마을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구로리의 포구, 바다 뱃길이야기(등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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