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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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로2리 청계면 관동마을 작성
  • 관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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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마을 세대수는 57세대이며, 총인구수는 98명(남 49, 여 49)이다.
자연마을 구성
관동마을 한 마을로 구성되었다.
지명유래
관동(館洞)이란 마을 이름은 마을 유래지에서 ‘관아 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예전에는 벼슬관(官)이었는데 집관(館)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청계면에 관아가 있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관동마을에 활을 쏘았다는 ‘사장등’ 그리고 사또가 살았다는 ‘사또자리’가 있으며, 이는 또한 예전에 주막이 있던 자리로 이곳에서 사또가 묵어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웃 마을인 구로1리와 함께 구로리가 옛 포구로서의 청계만, 승달산 등의 서남해 지역을 관장하던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기능과 의미가 담긴 마을이름으로 짐작된다. 마을 동쪽의 산에 지석묘 13기(현재 11기)가 있으며, 무역의 중심지로 3.000여 년 전부터 사람이 정주했다는 자료도 있다. 약 80여 년 전에는 돌칼, 돌석기 3점이 출토되어 청계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으며(확인 필요), 기타 자료는 목포대박물관 등에서 확인 가능하다.
마을형성(입향조)
마을의 입향조는 정수삼(호-경암, 1823-1889)이다. 옆 마을인 구로에서 살다가 주변 환경이 수려하고 군자가 가히 살만한 곳이라 여겨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며, 마을 입구에 있는 ‘경암처사유허비’에는 1868년에 입향했다고 표기되어 있다. 정수삼 공은 박학다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어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하며, 그의 묘는 삼향읍 지산리의 돌마산(마장)이라고 부르는 곳에 있다. 후손들이 이장하려고 파묘를 하니 그곳에서 두사충(杜思忠)이라는 명패가 나왔다고 한다. 두사충은 명나라 장수로 임진왜란 때 명군(明軍)의 선봉장이었으나 왜란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고 귀화하여 대구에서 산 사람이다. 그는 풍수지리에 밝아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각 명당자리에 자기의 이름을 새긴 명패를 묻었다고 한다. 그 명당 중의 하나가 이 마을의 입향조가 묻혔던 자리이며, 지금도 후손이 그 명패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복룡마을 뒤 범바우산에서 봉수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주민들은 ‘중국묘’라 부르고 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이씨, 김씨, 함씨 등이 있으며 나주 정씨가 가장 많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의《조선면리동일람》에는 관동(官洞)으로 나온다. 지금의 관동(館洞) 표기는 1917년의 자료부터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원래 청계면은 무안군 일서면 지역이었다. 1910년 목포부 관동으로 편입되며, 1914년 코제이, 벽해동을 합하여 무안군 청계면 관동으로 편입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학문을 했던 입향조를 비롯한 선대 분들의 학구열로 교육열이 높은 마을이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자 서울, 광주, 목포 등으로 유학을 많이 하여서 높은 직책에 오른 이들이 많다. 마을 동쪽 위에 관동제가 있고 아래쪽으로는 논, 야산 중턱에는 밭이 있다. 청계만에 접해있어 맨손어업 등을 하기도 했지만, 어선이 뒤집혀 사상자가 나온 후론 갯벌에 거의 안 나간다. 축사와 벼농사, 마늘, 양파, 시금치 등을 생산하고 있다.
주요시설
‘사장등’이라 부르는 곳에 1995년에 폐교된 구남분교가 있으며, 1978년에 세운 구남교회가 있다.
마을변화
최근들어 외부 유입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편으로 주민들 모두가 화합하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특히, 청계만을 바라보는 바닷가 전망이 좋아 여러 곳으로 늘어나고 있는 숙박업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최근 <치유의 황토갯벌걷기축제>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걷기동호회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해변공원처럼 다녀간다. 현재 무안공항을 통과하는 호남철도 신선의 교각 건설작업 중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를 비롯하여 영농단(1981), 부녀회(1972)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구남교회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부사산 또는 상곡봉이라 부르는 갈마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좌로는 동산이 있으며 우로는 가란봉, 그리고 마을 앞으로는 청계만이 펼쳐져 있다. 동산에 고인돌이 있과 저수지인 관동제가 있다.
동/식물
가란봉 밑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있었던 ‘설욱’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 솔잎혹파리병이 널리 퍼져서 이를 예방하고자 마을에서 소나무를 다 베어버렸는데, 이를 주도적으로 나서서 진행했던 마을 이장이 후에 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현재 남아 있는 지명으로 각골 대퍼리, 말배미, 바람재 복개동, 등재, 맷골, 방죽골, 사곡봉, 사구배미, 서당터, 선독거리, 앞샘, 역짐모시, 절골봉, 점등, 정답, 한새바우 등이 있다. 몰무덤 잔등이라는 곳은 마을에서 벽해동으로 넘어가는 능선에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여름 삼복(초, 중, 말복)에 경로잔치를 겸한 마을주민간 회식을 매년 진행하고 있다.
유물, 유적
관동마을 앞 김씨 문중 동산에서 11기의 고인돌을 확인했다. 주민들이 ‘동산바우’라고도 부르는 고인돌은 갈마봉에서 동산으로 내려오는 줄기에 많이 있었으나, 밭을 개간하면서 깨거나 가져가 버려 지금은 동산에만 남아 있다. 대체로 고인돌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큰 것은 길이가 4미터 50센티가 넘기도 한다. 또한 주변에서 돌칼, 돌도끼 등이 발견되었으며, 고인돌이 있는 이곳을 ‘부섬’이라고도 부른다. 부섬이란 깔따구를 많이 부었다는데서 유래된 말이다. 또한, 마을에는 두 기의 선돌이 있다. 마을회관 앞의 예전에 아름드리 넘는 당산나무가 있었던 자리다. 그곳에서 주민들은 제상을 차리고 당제를 모시기도 하였으나, 70여 년 전에 태풍이 불면서 넘어져 죽고 난 뒤에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그 자리에 선돌을 세우고 마을 입구에도 선돌을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년 농사를 기원했다. 그리고, 마을 입구의 선돌에는 신사년 10월이라고 새겨져 있다. 신사년(1941년)은 커다란 태풍이 불었던 해로, 포구가 있는 복길에서는 모든 배들이 전부 파손되었거나 떠내려갔고, 마을에서는 당산나무가 뽑히는 등 피해가 극심했다. 이 선돌은 이런 자연의 폐해를 줄여보고자 세운 액막이였다.
설화
갈마봉의 바위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자손이 없던 부인들이 이 바위에서 기도하면 자손을 얻는다고 하여 많은 여인이 찾아왔다고 한다. 남자의 생식기 모습인 이 바위에서 기도 하고 물을 마시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며, 그뿐만 아니라 이 바위에서 나오는 물은 태산붕알 치료에 즉효였다고 한다. 태산붕알이란 고환이 비정상적으로 커진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의 물은 솜으로 찍어 바를 수 있을 정도로 조금밖에 나지 않는다. 마을 앞 바닷가 <코쟁이>는 작은 포구로 오래 전러시아 선원이 그곳에서 쉬어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봤던 러시아인의 커다란 코를 보고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곳에서 작은 고개를 넘으면 갈룡동이 나온다. 주변에는 묘가 많이 있다. 그 외에 선창터, 묘골, 망불재, 간대정, 수랑골, 병목아지 등이 있다. 병목아지(병목재)는 마을에서 상마리로 넘어가는 길목인데 구로리 1번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병따개에 해당하는 고인돌 1기가 있다. 상마리 주민들이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이 돌을 건드렸다. 그때부터 마을주민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피해를 봤다고 한다. 즉 젊은 사람들이 술과 관련해서 비명횡사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다. 주민들은 ‘병목재의 큰 돌이 술병을 막고 있었는데 병의 뚜껑을 열어버리니, 마치 술병이 마을을 향해서 흘러넘치는 형국이라 주민들이 술로 피해를 본다’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병목재의 돌을 제 위치로 옮겨 놓았더니 그 후로부터는 궂은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민들 사이에 이런 노래가 전해온다. ‘병목아지에서 병을 갔다가/ 수랑거리에서 술을 받아서/ 복개봉에서 복개를 가져다/ 먹어지배미에서 술을 먹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는 마을 단위로는 드물게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같은 동족 마을인 구로동 마을이 경제에 힘썼다고 한다면, 이 마을은 교육에 힘써 두 사람의 면장과 전남병무청장 제주 항만청장 그리고 2명의 사법고시 합격자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 출신자도 5- 6명이나 된다. 이처럼 많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의 가르침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명치대학을 다니고 5명이나 목포상업고를 다닐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이러다 보니 주민들이 ‘자손들을 부처별로 진출시켜서 국가 운영에 큰 역할을 하자’는 욕심을 내기도 하였다. 최근의 인물로는 정해운(교통부 사무관), 정병호(국방부 사무관), 정봉환(전 면장)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청계만 등 바닷가인 마을에서는 아픈 일을 겪었다. 오래전에 주민들이 마을 앞 대섬 주변에서 굴을 채취하다가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이 참변을 당했다. 그 이후로는 주민들이 기름진 청계만 어장을 외면해 바다에 나가 수산물 채취하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 시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으로 마을주민 약 20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마을 앞 정자에 있는 연자방아는 현재 모형만 있지만, 원래 1970년대까지 운영되었고 마을에서는 이를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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