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면 소재지에서 동재를 넘어 마을을 지나가는 해안로를 사이에 두고, 아랫마을은 ‘광석’, 윗마을은 ‘망산’, 오른쪽 마을은 ‘새터미’라고 부른다. 따라서 세 개의 마을이 합해진 마을이라고 하며, 앞으로는 청계만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지명유래
‘광석’이라는 마을이름은 마을 앞 해안가에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음식상을 벌여놓고 잔치를 해도 여유가 있을 만큼 큰 돌이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전에 밭의 땅을 많이 차지한다고 밭주인이 돌을 깨서 쪼개어 버려서 지금은 자취도 없다. 그런데 이 돌이 깨어지면서 마을에는 불구자들이 많이 나왔고, 젊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우환을 당했다고 한다. 정작 《마을유래지》에는 ‘마을의 지형이 지하 3m 아래에 광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어 넓은 박독이라는 의미에서 광석(廣石)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망산’은 청계면에서 두 번째 높은 산으로 일컫는 망매산(望梅山, 순흥안씨 족보 표기)을 마을의 주산으로 가져서 비롯된 마을 이름이다.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뒷산이 웅장하여 산에서 풍겨 나오는 정기로 소원을 성취한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망산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광석마을의 입향조는 동복오씨 오수현으로, 입향조의 아버지가 무안현의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식솔들이 고흥에서 청계면 복길리의 텁석골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무안의 입향자료에는 ‘조선 중종 때 동복에서 거주하던 오수현이 살기가 어려워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닦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망산마을의 입향조는 순흥안씨 안창효(1745-1814)이며, 이어서 제주양씨 양광묵이 함평군 학교면 금송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혼합성씨(오씨, 양씨, 안씨, 박씨, 성씨, 김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마을의 지명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일서면 광석리(廣石里)로 나타나며, 1912년에는 일서면 남성동, 가양동으로, 1917년에는 청계면 남성리 남성동, 가양동으로 나온다. 1987년엔 청계면 남성리 남성동, 망산, 광석이었으나, 현재는 남성리 남성동, 광석, 망산, 상석촌으로 구분되었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일서면 광석리로 기록되었고, 1912년의 자료엔 일서면 남성동, 가양동으로, 1917년엔 청계면 남성리로 나온다. 1987년에 청계면 남성리로 망산, 광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남성리 광석, 망산, 새터미로 되어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육지와 해로가 열려 있어 문물과 학풍이 발전한 청계지역에서 6.25 한국전쟁시 피해가 없는 마을은 우리 마을뿐이라고 한다. 그만큼 예로부터 주민들이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고 있는 마을이다. 생업으로는 청계만 연안에서 주로 꼬막. 고동. 낙지. 새하잡이 등의 맨손어업을 하며, 고기잡이배 예닐곱 척은 낙지어업을 한다. 또한, 밭작물 농사로는 시금치. 양파 등을 주업으로 한다.
주요시설
청계서부교회
마을변화
청계만이 마을 앞에 있어 주민들이 시기에 따라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마을인 새터미에서 광석, 망산마을로 재유입되기도 하였다. 현재 KTX 호남고속철신선 무안국제공항-임성역 철도구간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추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공사를 위한 사전지표조사에서철도연변 밭의 무안분청도요지가 발견되어 발굴조사 중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교회, 마을정자
전통식품/특산품
시금치, 양파, 새하(마을 앞 개웅의 새하는 인근에서 일품으로 쳤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청계만, 망매산, 고인돌 10여개, 광석마을 정자 옆 큰샘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소중한 식수로 사용되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망산마을 뒤에 ‘서당골’이 있으며 마을 앞의 산은 ‘각시봉’이다. 남아있는 지명으로 ‘개양골’과 마을 동북쪽의 골짜기인 ‘남석골’이 있다. 또한, 새터미 앞에 있는 샘으로 ‘다리독샘’이 있으며, 망산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로 ‘사장등’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1991년에 세운 동복오씨 제각인 ‘서호재(西湖齋)’가 마을 뒷산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삼문을 갖추고 있으며, 서호재 건립공로자를 기록한 현판 1개가 걸려있다.
마을에는 ‘제주양씨3세효열려(제주양씨효열문)’가 있다. 제주양씨 후손들이 1940년에 세웠으며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의 구조이다. 안에는 양광묵, 양병순, 양재선의 처 강릉함씨의 정려가 3개 있고, 6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현판은 효자인 양광묵, 병순 父子와 열부인 며느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듯이 망산마을의 제주양씨 입향조인 양광묵은 학문뿐 아니라 효성도 지극하였다. 부친의 병환을 구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부친의 사후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또한, 효자 양병순은 해은공 광묵의 아들로 부친의 본을 따라 부모를 지성으로 섬겼다. 모친이 병환에 들 었을 때는 단지(斷指)를 하여 병구완을 했고, 그래도 돌아가시자 얼마나 슬피 울었던지 눈에서 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한 정성 때문인지 시묘살이할 때는 호랑이가 공을 도왔다고 한다.
또한, 열부인 강릉함씨는 해은공 광묵의 손부로 양재선(자 두순, 호 화성. 1880-1944)의 처로 출가 후 몇 해 되지 않아 남편이 병이 들었다. 오랜 투병 끝에 완쾌되었으나 남편은 성불구자(어렸을 때 개에게 성기를 물려 성불구자가 되었다는 설도 있어서 고자대감이라 불렀다고 함)가 되었다. 그렇지만 함씨부인은 끝내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가정을 지키며 양자를 들여 가문을 잇게 하였다.
마을에는《무안문화유적분포지도》에 따르면 두 군데의 지석묘군이 있다. 하나는 남성마을에서 복길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복길교를 지나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고인돌 1기가 있다. 또한 망산마을 입구에서 남성마을 쪽으로 나 있는 야산에 고인돌이 무더기로 있는데, 묘와 함께 묻혀 있거나 깨져 있어 정확히 셀 수는 없으나 11기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바로는 망산부락에서 동쪽으로 300미터 떨어진 야산에 10여 기의 지석묘가 흩어져 있었다. 몇 기는 상석이 지면에 접해진 관계로 지석이 보이지 않으며, 나머지는 지석묘군 옆을 통과하는 도로가 있어 도괴 상태에 있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망산마을의 제주양씨 입향조이자 효자인 양광묵(해은, 1839-1894. 12) 선생은 일찍이 동학에 가담했다가 관군에게 쫓겨서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이 마을에 살면서도 마을 뒤 남성제 옆 골짜기에 굴을 파고 은신해 있으면서, 어머니가 몰래 갖다준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하지만, 서남부지역 최후의 동학농민항쟁이었던 고막원전투에 참여했다가 관군에게 붙잡혀서 고막원 잔등(현 함평천지 휴게소)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현재 청계면 노인회 분회장인 양성인 회장의 고조부이며, 주민들의 주장에 따르면 새터미 함씨네 밭에서 동학농민항쟁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자루의 칼을 발견했다고 한다. 1960년경에 발견했는데 안타깝게도 관리 소홀로 물건은 없고 기억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