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석마을은 도림 6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선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입석이란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경부터다.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정문 옆에는 승달산 자락의 안골과 물맞이 골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국도 1호선이 지나면서 그곳에 다리를 놓게 되었다. 그때 만들어진 다리 이름이 입석교이며, 그 이후 입석교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입석마을 또는 선돌마을로 불렸다.
마을형성(입향조)
처음 들어온 성씨는 국씨지만, 현재는 살지 않고 ‘냉골’이라 부르는 곳에 일부 묘만 남아있다. 이 마을에 살았던 국씨의 후손은 현재 망운면 장재동 등에 살고 있다. 이후 청주한씨 한번인(韓番仁, 자-기옥, 호-둔암) 선생이 들어와 입향조가 되었다. 둔암공은 장흥군 장도면 북교리에서 세거하다가 임진왜란 때 피난을 와 이곳 도림리 유점동에 자리를 잡았으며, 그는 영달을 꿈꾸지 않고 후손들의 교육에 힘쓰며 자연과 벗 삼아 일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청주한씨 이후 전주이씨와 무안박씨 등이 들어와서 살았지만, 현재는 외부인이 더 많은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도림리는 1986년에는 선돌과 연곡 2개의 마을이었으나,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도림리가 선돌, 연곡, 백련동 등 3개 마을로 나눠진다. 이어 1993년 도림1리를 1, 4리로, 도림3리를 3, 5리로 나누고 다시 2000년에 도림1리를 1, 6리로 분리하고, 2011년에는 2리를 2, 7리로 분리했다. 현재는 청림, 연곡, 백련동, 월암, 문화촌, 입석, 격양동 등 7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땅에 자갈 등이 많은 박토였던 곳이라 전통적인 농사를 짓기도 쉬운 곳이 아니었지만, 근대기에 국도 1호선이 마을 앞을 통과하고 버스터미널, 파출소, 우체국 등이 들어서고 목포대학교가 이전해 오면서, 대학교 배후 주거지로 빌라와 아파트가 지어져 청계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마을이 되었다. 도림 2리와 더불어 도림리의 중심 마을로 자리하고 있다. 상권이 활발하고 직장인이 많다.
주요시설
우체국, 파출소, 경로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원래 청계면 노인정이었다.
마을변화
도림리 일대는 원래 모래, 자갈밭이어서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예전에는 매우 어렵게 살던 곳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국도 1호선이 지나가고 1982년 목포대학교가 들어오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물맛이 좋아 지역 막걸리의 대명사가 되었던 ‘청계막걸리’의 주조장도 이 마을에 있었다. 초기에 막걸리 양조를 시작했던 사람은 돈과 명성을 모두 얻었다. 대학교와 인접된 대학가 마을로 상권 활성화 및 학생들의 숙소로 인구 유입은 물론 인구 이동이 많은 상황이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주민들은 원주민을 중심으로 동계, 노인회, 부녀회를 조직하여 상부상조하고 근면한 생활을 하며 화목한 마을 생활을 하고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경로당, 청계제일교회, 국립목포대학교 외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입석마을은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사자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국립목포대학교와 연계하여 매년 음악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유물, 유적
마을에 선돌이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선돌에 관련된 유래는 네 가지 설이 전해져 온다. 첫째는, 한양에서 8개의 바위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칠성동에서 7개가 멈추고 나머지 하나가 현재의 자리에 멈췄다는 것이다. 둘째는, 마을이 음기가 강해 비보를 위해 마을 입구에 세웠다는 것이며, 셋째는, 어떤 장사가 성을 쌓으러 가다가 이미 성을 다 쌓았다는 말을 듣고 가져가던 돌을 버렸다는 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기를 못 낳는 여자가 점을 치러 와서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를 묻자, 점쟁이가 오늘 정성을 드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키면 원하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했는데, 여자는 집으로 가다가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그만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되면서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겨 바위로 변했다는 설이다.
칠성바우 또는 미륵바우라고도 불려지는 입석은 목포대학교 정문 왼쪽의 다세대주택이 늘어선 골목 안쪽의 <선돌원룸> 안쪽에 있다. 원래 길옆에 있었는데 땅을 돋워 주택가가 자꾸 생성되면서 지금은 선돌이 지면보다 아래에 자리해있다. 선돌의 총길이는 약 3m 50cm, 폭은 대략 1m 60cm 정도로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다. 예전에는 선돌 앞에 상석이 있었고 주변에는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어린 동백나무가 자라서 선돌을 일부 가리고 있었다.
선돌 앞면에는 희미한 글자로, ‘縣監金侯日省 恤民善政碑’ 後代康熙 乙丑 1685년 六月’(현감김후일성 휼민선정비 후대강희을축 6월)라고 새겨져 있다. 즉, 1684년 7월 무안현감으로 부임해 1688년 2월까지 4년 동안 근무했던 김일성 현감의 선정비였다. 그러므로 입석은 고인돌이나 거석 숭배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선정비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원래 고인돌이었거나 또는 마을의 비보(裨補)를 위한 장승이었을 수도 있다. 대개의 선정비와는 다른 사람 형상의 돌장승에 현감의 선정내역을 뒤에 새겼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외에 목포대학교 학군단 옆 대암동이라 부르는 곳을 비롯하여 청계파출소 앞에도 3기의 묘를 안고 있는 고인돌묘역이 있다. 주민들이 압해도 김씨 땅이라 일컫는 이 묘역에는 현재 5기의 큰 고인돌이 놓여 있다. 예전에는 10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5기만 확인되고 있으며, 그중 2기는 고인돌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고 3기는 고인돌의 일부가 땅에 묻혀 있다. 가장 큰 고인돌은 길이가 약 3m 80cm, 폭이 2m 90cm로 대형 고인돌이다. 얼마 전까지 묘역 앞에는 족히 수백 년을 넘는 소나무가 있어서 역사와 연륜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또한, 목포대학교 정문에서 선돌로 이어지는 좁은도로 옆에는 1991년에 세운 <효자무안박공봉규기행비>와 <효부달성배씨행적비> 등 두 기의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확인할 수 없었다.
무안박씨 제각인 <매월당>은 마을 중앙에 있는데, 애한정 박익경의 증손인 매월당 박문용을 모신 제각으로 정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1993년에 중수하였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1932년 강대원(姜大元) 선생에 의해 일본으로부터 처음 무안으로 양파가 들어왔는데, 이처럼 무안양파의 최초 재배의 역사에 대해서는《문화무안-2004년, 통권 4호》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이 당시에 벚나무가 많이 심어졌다가 없어졌으나, 목포대학교가 건립되면서 교정에 많이 심어졌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6.25 한국전쟁’ 때는 이 마을이 좌․우 세력의 대립으로 엄청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웃 마을에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이 있어서, 주민들은 낮에는 태극기를 달고 저녁에는 인공기를 달 정도로 사상의 혼란을 가져왔음은 물론 오직 살기 위해 치열한 몸부림을 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쟁의 중심지에 있던 청계파출소는 ‘대나무로 감싸듯이 보호해야 했다.’라고 전한다. 또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청계버스터미널까지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시민군들이 내려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