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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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정1리 일로읍 구정 작성
  • 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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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미기재
자연마을 구성
이 마을은 매봉과 병풍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앞뫼라는 산이 있으나 앞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구정동은 마을에 아홉 개의 우물이 있다 해서 九井洞 이라 했다하나 마을 전체가 바위로 이뤄져서 우물은 없다. 큰 샘은 현재도 있다. 집집마다 샘을 팠는데 물이 없어서 파보았다고 한다.
지명유래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구정리는 9개의 우물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 마을에는 우물이 없다. 원래 이 마을은 물이 귀한 곳이다. 마을이 암반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오래 전부터 허드렛물은 물론 식수도 무척 귀했다. 얼마 전까지는 마을에서 3㎞ 이상 떨어진 의산리 산두마을에서 지하수를 파 마을까지 옮겨온 뒤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상수원시설이 되어있어 수돗물을사용할 예정이다. 지금은 어려움이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물 때문에 생긴 일이 많았다
마을형성(입향조)
구정마을의 입향조는 ‘전주 최씨 최희창(1656-1734.호-鳩停)으로 대대로 살아왔던 남원군 주천면 주천리에서 이곳 구정동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입향시조와 성씨자료에 나온다. 또한 이 자료에 의하면 ‘입향조는품성이 좋고 문장력이 뛰어나며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니 향당의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地名의 변화도 입향조가 처음 이 마을에 들어 올 때는 마을의 풍수적인 지형이마치 매봉산의 매가 비둘기 지형을 닮은 마을을 보고 있어 비둘기가 날아가지 못하고 멈춰있는 형국이라 해서 鳩停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성씨
전주최씨가 많이 산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전주최씨 입향조의 호도 鳩停이다. 하지만 곧이어 九井으로 표기되었다. 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九井으로 변했다고 하나 사료를 보면 1789년 자료인 호구총수에 벌써 九井으로 나온다.마을 뒤에 있는 입향조의 묘비를 보면 처음에는 鳩亭으로 표기했으나 1992년에세운 비에는 鳩停으로 나온다. 이러한 이유로 봤을 때 鳩亭으로 표기하지 않고 샘이 없는데도 九井으로 표기한 것은 주민들의 샘에 대한 바람이 이렇게 표기되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1910년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두무동 정관동 죽산동 일대를 병합하여 다시 무안군에 편입하였다 .문헌으로 살펴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노촌면 구정리 정관리로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구정동 두무동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서는 일로면 구정리 두무동 정관동 구정동 죽산동 각 일부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서는 현재처럼 일로읍 구정리 구정과 두무동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이 가난했다. 나덕명에 의해서 소포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이렇다 할 농지가 없었다. 마을 앞에 있는 소포들은 소포선생이 덕치 마을에서 구정 마을까지 막은 둑이다. 소포는 주룡 마을의 입향조 나덕명(자-극지, 호-소포. 1551-1610년)으로 공이 1589년 정여립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에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공을 세워 사면을 받자 나주로 귀향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청호리 주룡 마을에 부친을 모시고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 농지가 부족한 일로 주민들의 상황을 보고 사재를 들여 구정리와 의산리 사이를 막아 들을 형성한 것이다. 아쉽게도 주민들의 배고픔을 구원했던 소포공의 활동을 적은 공적비나 소포들을 확인할 수 있는 표지석 같은 것들이 없어 안타까웠다 영산강에 위치한 일로의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지만 일본인들의 강요에 의해이 마을도 일제시대에는 목화재배를 많이 하였다. 1960년 ~1963년 까지 재배했다. 일로가서 목화솜을 타서 사용하였고 배를 짜기도 하였다. 또한 주민들은 영산강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영산강물을 이용하여 김장을 하기도 하고 장을 담그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표정이 매우 밝고 편안하다. 신앙심을 갖고 있는 이유도 있겠지만 생활에서 오는 넉넉함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내것을 주장하기보다 서로 양보하고 협조해서 화목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고 자랑한다. 벼와 고추 참깨를 주로 재배한다.
주요시설
이 마을에는 일로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가 있다. 1910년에 교회가 들어섰는데 이는 서남부 지역에서 목포의 양동 교회와 무안의 제일교회 다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무안제일교회는 1908년에 세워졌다. 이는 당시 이 마을에 독실한 신자인 강인숙이 있어 가능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에서 목포 양동교회까지 걸어 다녔다. 목포의양동교회는 1899년에 설립된 교회로 서남부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다. 그는 목포까지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주민들의 전도가 절실했다. 해서 1908년에 마을 앞 두무동에 교회를 세워 전도활동을 하다 191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현재는 주민의 80% 이상이 신자가 되어있다. 1903년에 강인숙씨가 목포양동교회를 어머니랑 다니다가 선교사들이 와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고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몇 년 전까지 마을에 공동샘이라 부르는 큰샘이 있었는데 그곳에 뚜껑을 달아각 가정별로 물 배급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물을 다려먹었다고 한다. ‘다려먹다’는 ‘기다려서 떠 먹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지역 사투리다. 또한 농사를 지을 때는 마을 옆 숯골에 있는 삼천동의 삼천저수지 물을 끌어다 사용했는데저수지의 저수량이 적어 물 때문에 늘 말썽이 일어났다. 특히 농사철에는 이 저수지의 물을 사용할 수 있는 6개 마을의 대표자가 모여 회의를 하고 조를 편성해 물지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물이 부족하다 보니 비가 조금만 오지 않아도마을 주민들간 감정이 격화되어 싸움을 하기도 하였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매봉산 너머에 소당이 있다. 소댕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영암으로 건너는 나루가 있어 소댕이나루로 많이 알려져 있다. 영암군 서호면 일대의 사람들이 나룻배를타고 일로장에 가거나 일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이나 목포 등을 왕래할 때 주로이용하였던 나루이다. 나루 사이 물길에는 소댕이샘이 있는데 이를 돌아 건넜다. 소댕이샘 옆은 구수나무 옆으로 몇집이 근처에 살았다. 조선 시대 지리지 기록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지도에서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일제 강점기 후기에 등장한 나루로 보인다. 영암에 사는 사람들이 일로장을 가려하면 소댕이나루를 건너 마을 앞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마을길은 큰길이었다. 당산나무는 팽나무가 있었고 우산각(정자)가 있었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두무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산중에서 숯을 구었다 해서 숯골[炭洞]이 남아 있으며 영산강에서 산을 바라보면 바위가 병풍처럼 생겼다 해서 병풍산(평풍산)이 있다. 두무동 서쪽에는 매 형국의 매봉산이 있다. 또한 온난골(따뜻하다), 각골(까골), 들 끝(소댕이 가는 곳), 너벙바위(마당바위)(매봉과 마주봄), 선바위(소댕이 가는 길), 언머리(소댕이 둑 수문역할을 했다), 앞뫼(병풍산 옆), 처장골(초분골)(대나무가 많다. 제각 근처), 한새머리(두무동과 갈라지는 삼거리, 동네 입구 주차장, 표장 입구)), 중성골 달걀배미(비가오면 침수가 되어 한새머리 돌아오는 곳) 복아실(외관 입구로 북아실아라고도 했다) 모새초리(돌아가는 길) 등이 있다. 그리고 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호남골이 있다. 호랑개비라는 명칭은 뻘등 옆에 쓰레기를 버리던 곳으로 소댕이 가는 길쪽에 있었다. 예전에는 배로 어업을 했는데 마을 사람 중 3분이 어업권을 가지고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뒤에는 전주 최씨의 재각인 鳩停齋가 있다. 1937년에 지은 것으로 측면 1칸 앞면 3칸의 팔작 지붕이다. 안타까운 것은 재각의 담장을 따라 철망이 쳐져있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4월 5일제를 지낸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곳에는 조선 광해군 때 의병대장이었던 소포 나덕명(1551 - 1610년)이 쌓은 것으로전해지는 길이 150미터 폭 3.5미터 가량의 소포제(구정리와 의산리 사이)가 있어 소폿들로 불리는 농지가 많이 조성되어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소포들의 관리는 강형기씨 동생 봉구씨가 관리를 하며 주민들이 소작하였다. 쌍안경으로 볏단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바닷가에서 게, 맛, 운저리, 장어, 서른기, 짱뚱이, 대가니를 잡았다. 맛은 회판과 국으로 많이 먹었고 맛과 애호박을 넣은 된장국을 많이 끓여 먹었다. 대가니는 말려서 두드린 다음 불에 굽고 마늘쪽에 무쳐서 먹는 요리법으로 가장 많이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고구마와 서숙밥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소포들의 불하는 호당 1500평씩 제비뽑기를 통해 나누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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