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橋는 복룡3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는 백련로가, 옆으로는 다산로가지나고 있다. 마을 뒤 元驪峰에는 수령이 백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沙橋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는 주민들은 없었다. 미루어 살펴보건데 지형적인 현상으로 모래둑이 쌓이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이 마을엔 나주 임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으나 오래 전 앞 마을인 광암리로이사 가고 현재는 한 가구도 남아 있지 않다. 뒷동산이라 부르는 곳에 나주 임씨선산과 묘들이 남아 있어 예전 이곳이 임씨 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을 입향조는 1700년대 중반에 들어 온 밀양박씨 박한용(1730 - 1792)이다. 박한용은 복룡1리 복룡촌 마을의 입향조인 박세징(1670-1750. 자-서경, 호-돈옹. 난정공의 손자이며 만연공의 아들)의 손자이다. 한때 밀양박씨들은 복룡촌 마을과 합하여 500세대4,000여명에 이르기도 하였다.이후에 들어온 달성배씨는 달성배씨 복룡리 입향조인 배윤우(1691 - 1758, 호 -晩軒)의 후손들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 앞 들의 지형이 소쿠리 형이다. 해서 비가 오면 들 주변에 있는 광암리 상신기리 산정리의 물이 마을 앞으로 모이게 된다. 이때 함께 몰려온 모래들이 쌓이고 쌓여 모래둑을 쌓았는데 이 모래둑을 이용해 건너 마을 학두리를 다니면서 사교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유래지에도 ‘마을이 형성될 당시 마을 어귀에 냇가가 있었는데 이곳에 많은 모래가 쌓여 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마을 이름을沙橋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성씨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달성 배씨 몇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노촌면 사교리로 1912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사교리, 1917년에도 일로면 복룡리 사교리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벼농사를 주로 하며 상신기리쪽은 육묘업을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 앞을 지나 광암 상신기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왔다. 지금의 농지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에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형성한 것이다. 처음에는사교 앞 마을에서 학두리까지 천방둑이라 부르는 1차 제방을 쌓고 2차는 복룡촌에서 용호동까지, 3차는 양호도에서 선창목까지 제3농장이라 부르는 둑을 쌓으면서 현재의 넓은 들이 만들어졌다. 어른들은 ‘천방둑은 나주임씨 상주공 임타가 회산에 거주하면서 막은 것으로 인간이 막은 둑이 아니라 하늘이 막은 둑이라 해서 하늘天을 써서 천방둑이라 했다’한다.해서 마을 앞 들을 천방들이라 부른다. 이 들을 감싸고 있는 지형이 소쿠리 형이라 물길의 입구가 마을 앞 뿐이었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비만 오면 들에 물이 가득 차 천방들이라 불렀으며 커다란 방죽이 형성되어 농사 짓는데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가 노인회가 있다.
공동이용시설
마을 중간에 통샘이 들에 있었다. 최근까지도 사용하였고 2023년 마을사업을 통해 복원하였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마을 뒤 元驪峰에는 수령이 백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의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왼쪽 가장자리에는 낛시가끔이라는 지명이 있다. 잔등 너머 지석묘 옆을 말한다.
옆으로는 잘 자란 소나무들이마을의 해풍을 막아주는 방풍림처럼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개굴이라는 지명이있다. 명산 가는 철도가 가는 굴을 말한다. 지형이 개꼬리 같다는 말도 있고 철도가 계속 나가다가 굴이 하나 있었는데 굴의 크기가 어중간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도 했다. 그 옆으로 몽탄 당호리로 넘어가는 재를 개골재라 한다. 마을회관 앞에는 사교마을 회관기가 있으며 마을 중간에 통샘이라 부르는 공동샘이 있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뒷동산이라 부르는 나주임씨 묘에 5기의 고인돌과 작은 돌 3기, 그리고 입석 2기가 있었다. 가장 큰 고인돌의 길이는 2미터 40 폭 1미터 90이었다. 묘 주변의 경사면에서 유물들을 발견했다고 목포대학교 박물관 자료에는 기록되어 있다. 발견 유물은 회청색경질토기편 등이다.
밭에서 도자기 파편이 나온다. 문화재 등록지로 집을 지을 때는 문화재청에 의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은 몇 해 전에 별세한 우리 지역의 마지막 선비라 일컬음을 받았던 勉窩(면와) 배회두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선생은 주경야독으로 깨우친 학문을 바탕으로 우리 지역 학문을 이끌었으며 무안유도회장과 무안향교의 전교를 역임하기도 했다. 이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면와선생미수시집추진위원회에서 발간한‘면와배회두선생미수시집’은 한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좋은 교본이 되기도 했다. 양두 세거비는 양호단 내에 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새마을 역사관은 새마을 지도자가 관리하는데 박창표씨의 아드님이신 박재용씨가 광주에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55아트센터는 양곡창고를 갤러리로 사용중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있을 때 이 마을은 전국적인 시범 마을이었다. 주민인 박창표씨에 의해서 기획하고 추진하였던 이 마을의 새마을 사업을 본받기 위한 필수 코스가 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재건사업이라 해서 마을 자체적으로 환경정비사업을 시작으로 지붕개량을 포함한 도로 넓히기 하천정비 전기화 사업 그리고 잘 살기 의식 개혁 운동 등을 실시하여 왔기 때문이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마을 자체적으로 마을 노래. 마을 기, 마을 훈, 마을 꽃 등을 제정하여 주체적이고 정체성을 갖춘 마을을 이루었다. 지금도 집집마다 마을기가 있고 마을꽃인 동백나무를 가꾸었다. 마을기는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삽과 붓을 그려 일하면서 배우는 마을 주민들의 기상을 새겼다. 독자적으로 마을 역사관을 갖고 있다. 새마을 역사관이라 이름 붙인 이 자료실은 아직 자료 정리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국적으로 보아도 자체적으로 역사관을 갖고 있는 마을은 드물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우리 지역 최고령의 이장이 마을일을 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젊은 사람들이 없이 노인들만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영산강을 막기 전 맛, 게, 운저리 등을 양두쪽으로 가서 잡았다. 사교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은 양두로 가는 다리까지 생태하천을 만들었다.
마을에 호남축산의 악취피해가 3월 ~ 6월 까지 최고로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