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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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정2리 일로읍 방뫼 작성
  • 방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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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2가구 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방매는 산정 2리에 속한 마을로 방매 학두리 당사촌 동매 잿등 비와등 화산동핑핑(병풍) 수퉁목 서당동 등의 10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중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방매 학두리 당사촌 동매 잿등 화산동 등 6개 마을에 해당된다.
지명유래
산정2리의 중심 마을인 방매는 매화가 많이 피었 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학두리는 이웃마을인 상신기리의 환학동과 관련 이 있는 마을로 지형이 학의 머리에 해당된다 해 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북쪽 에서 남쪽을 향해 날아오던 암수 두 마리의 학이 환학동 마을을 지나면서 풍광이 수려해 수컷 학은 환학동에 주저앉고 암컷 학은 학두리에 머물며 살 았다. 두 마리의 학은 서로를 바 라보며 오가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학두리 마을의 학이 마치 환학 동 마을의 학을 찾아 머리를 들어 바라보는 형국 의 지형이다. 당사촌은 원래 당산나무가 있었던 마을로 당산촌 으로 불렸는데 주민들이 선비가 사는 마을의 이름 인 당사촌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하여 바꿔 부르 는 이름이다. 飛 蛾등은 벌레가 날아다니는 형국 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꽃이 있으면 날아드는 벌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쓰여진 것 이다. 비화등 또는 비학등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冬梅는 방매 앞에 있는 마을이다. 화산동은 꽃뫼 마을인데 일로로 가는 큰 길이 있어 한때는 주막 이 있기도 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가 않다. 주민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는다. 300여 년 전에 형성되 었다고도 하고 마을이 들어선지 200년이 못된다 고도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항으로 보아 조선 조 말 무렵에 김해김씨와 밀양박씨가 들어와 마을 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호구총수에 나오 는 당산촌이나 학두리 화산동 마을에 는 주민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주민들은 이렇게 지명이 변하게 된 이유를 매화나 무가 많이 있어서 또는 풍수적으로 매화낙지의 지 형이어서 바꿨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매화나 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주변 마을에서는 일로의 3 뫼 중의 한 마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용산리 인동 마을의 왕뫼, 산정리 입구의 딴뫼 그리고 이 마을을 방뫼라 하여 3뫼로 부르는 것이다.
마을성씨
이 마을에는 중심 성씨가 없이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이름이 처음 기록으로 나올 때는 조선 시대가 아닌 일제강점기인 1912년이다. 그때의 이름은 防山동이었으며 1917년에도 防山동으로 나온다. 防山을 우리말로 부른 것이 방뫼다. 그 러다 1987년의 자료에서는 현재의 이름인 芳梅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산정2리에 속한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 면 방매는 제일 나중에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鶴頭리와 堂山리 그리고 花山리만 나온다. 1912년의 자료 에는 무안군 일로면 堂山촌 防山동 서당동 학두리 등 으로 기록되었다. 1917년에는 일로면 산정리 防山동 당산촌 학두리등으로 나오고 1987년엔 일 로읍 산정2리 芳梅만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에는 중심 성씨가 없이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지만 서로 협조하고 양보하여 화목한 생활 을 가꾸고 있다.. 이 마을의 주된 소득원은 시금 치와 담배 농사이다. 주민들은 사계절 중 농한기 가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주민들은 영산강 둑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 왜냐 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 었기 때문이다 일로에는 큰 산이 없어 물을 가둘 수 있는 저수지 가 없다. 해서 1967년도 대 한해 때 이 마을을 포함한 주변 마을 주민들이 대단히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없어질 것이라고까지 했다. 주민들에게 물은 그만큼 절절한 대상이다. 그런 데 영산강을 막고 농업용수로 물을 얼마든지 쓸 수 있게 되자 가뭄의 고통에서 해방 된 것이다.
주요시설
마을 에 보건지소와 성령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변화
마을 앞을 구언장이라 하는데 예전에는 광암 상신 기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갔다. 지금의 농 지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에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형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교 앞 마을에 서 학두리까지 1차 제방을 쌓고 2차는 복룡촌에 서 용호동까지, 3차는 양호도에서 선창목까지 둑 을 쌓으면서 현재의 넓은 들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막아진 마을 앞 둑은 수통목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때 되어서야 조그마한 농지를 마 련할 수 있었다. 수통목은 포구 역할을 해서 사람 들의 왕래가 많아 주막도 있었다. 수통목은 학두리 가는 쪽에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가 있고 이순례여사의 제사와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성령교회 옆에 소나무가 있는데 개인소유지에 있어 보호수 지정은 되어있지 않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방매 마을 앞 광장에 두 개의 표지석이 있다. 하 나는 학마당이라 쓰여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 례여사선적비이다. 학마당은 학두리에 사는 주민 임병길(호-松鶴) 씨가 135평의 광장 부지를 마을 에 희사했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표지석이다. 마을에서 만든 돌은 없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학마당이라고 쓰지 않았다고 마을 주민들은 기억한다. 현재의 학마당 글씨는 자녀들이 다시 쓴 것이라고 한다. 이순례여사선적비는 이 마을이 고향인 이순례 여 사가 마을 앞에 동각을 세우고 마을에 토지를 희 사한 것에 대한 주민들의 보답에서 세운 비다. 사 실 후손이 없었던 이 여사는 자신의 전 재산을 마 을에 맡기면서 주민들에게 자신이 죽은 날에 제 사를 당부하였다. 지금도 매년 이여사의 제삿날 이 되면 주민 모두가 모여 이 여사 를 회상하고 그의 고향 사랑의 정신을 기리기도 한다. 4월달 좋은 날을 받아 제를 지낸다고 한다. 마을 주변에 고인돌이 많다. 서당동에 2개의 고 인돌이 있고 학두리 뒷산에 1개가 있다. 그리고 잿등에는 2개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길을 넓히면 서 없어졌다. 학두리 마을에는 1928년에 세운 가암거사 임조 석시혜기념비가 서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특히 혼란기인 한국전쟁 때도 전쟁 발발 전 3 명 의 희생자 외엔 한 명도 피해자가 없을 정도로 마 을 분위기가 좋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 마을에는 행복택시가 다닌다. 이 마을은 버스 가 다니지 않는 오지마을로서 일로읍에서는 지장 리 청금성 마을에 주민 복지 차원에서 군에서 행 복택시를 운영하는 것이다. 차가 없는 주민은 1인 6장의 이용권을 주고 부부가 사는 집은 9장의 이용권을 주었다고 한다.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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