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매는 산정 2리에 속한 마을로 방매 학두리 당사촌 동매 잿등 비와등 화산동핑핑(병풍) 수퉁목 서당동 등의 10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이중 현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방매 학두리 당사촌 동매 잿등 화산동 등 6개 마을에 해당된다.
지명유래
산정2리의 중심 마을인 방매는 매화가 많이 피었
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근래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학두리는 이웃마을인 상신기리의 환학동과 관련
이 있는 마을로 지형이 학의 머리에 해당된다 해
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북쪽
에서 남쪽을 향해 날아오던 암수 두 마리의 학이
환학동 마을을 지나면서 풍광이 수려해 수컷 학은
환학동에 주저앉고 암컷 학은 학두리에 머물며 살
았다. 두 마리의 학은 서로를 바 라보며 오가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학두리 마을의 학이 마치 환학
동 마을의 학을 찾아 머리를 들어 바라보는 형국
의 지형이다.
당사촌은 원래 당산나무가 있었던 마을로 당산촌
으로 불렸는데 주민들이 선비가 사는 마을의 이름
인 당사촌으로 부르는 게 좋겠다 하여 바꿔 부르
는 이름이다. 飛 蛾등은 벌레가 날아다니는 형국
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꽃이 있으면 날아드는
벌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쓰여진 것
이다. 비화등 또는 비학등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冬梅는 방매 앞에 있는 마을이다. 화산동은 꽃뫼
마을인데 일로로 가는 큰 길이 있어 한때는 주막
이 있기도 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가 않다. 주민들의
의견도 일치하지 않는다. 300여 년 전에 형성되
었다고도 하고 마을이 들어선지 200년이 못된다
고도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항으로 보아 조선
조 말 무렵에 김해김씨와 밀양박씨가 들어와 마을
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호구총수에 나오
는 당산촌이나 학두리 화산동 마을에 는 주민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주민들은 이렇게 지명이 변하게 된 이유를 매화나
무가 많이 있어서 또는 풍수적으로 매화낙지의 지
형이어서 바꿨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매화나
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주변 마을에서는 일로의 3
뫼 중의 한 마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용산리
인동 마을의 왕뫼, 산정리 입구의 딴뫼 그리고 이
마을을 방뫼라 하여 3뫼로 부르는 것이다.
마을성씨
이 마을에는 중심 성씨가 없이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 마을의 이름이 처음 기록으로 나올 때는 조선
시대가 아닌 일제강점기인 1912년이다. 그때의
이름은 防山동이었으며 1917년에도 防山동으로
나온다. 防山을 우리말로 부른 것이 방뫼다. 그
러다 1987년의 자료에서는 현재의 이름인 芳梅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으로 산정2리에 속한 마을 이름의 변화를 보
면 방매는 제일 나중에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현 노촌면 鶴頭리와
堂山리 그리고 花山리만 나온다. 1912년의 자료
에는 무안군 일로면 堂山촌 防山동 서당동 학두리
등 으로 기록되었다. 1917년에는 일로면 산정리
防山동 당산촌 학두리등으로 나오고 1987년엔 일
로읍 산정2리 芳梅만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마을에는 중심 성씨가 없이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지만 서로 협조하고 양보하여 화목한 생활
을 가꾸고 있다.. 이 마을의 주된 소득원은 시금
치와 담배 농사이다. 주민들은 사계절 중 농한기
가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주민들은 영산강 둑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 왜냐
하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주 었기 때문이다
일로에는 큰 산이 없어 물을 가둘 수 있는 저수지
가 없다. 해서 1967년도 대 한해 때 이 마을을
포함한 주변 마을 주민들이 대단히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없어질 것이라고까지 했다.
주민들에게 물은 그만큼 절절한 대상이다. 그런
데 영산강을 막고 농업용수로 물을 얼마든지 쓸
수 있게 되자 가뭄의 고통에서 해방 된 것이다.
주요시설
마을 에 보건지소와 성령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변화
마을 앞을 구언장이라 하는데 예전에는 광암 상신
기 마을 앞까지 영산강 물이 들어갔다. 지금의 농
지가 조성된 것은 조선시대에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형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교 앞 마을에
서 학두리까지 1차 제방을 쌓고 2차는 복룡촌에
서 용호동까지, 3차는 양호도에서 선창목까지 둑
을 쌓으면서 현재의 넓은 들이 만들어 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막아진 마을 앞 둑은 수통목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때 되어서야 조그마한 농지를 마
련할 수 있었다. 수통목은 포구 역할을 해서 사람
들의 왕래가 많아 주막도 있었다. 수통목은 학두리 가는 쪽에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 부녀회가 있고 이순례여사의 제사와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성령교회 옆에 소나무가 있는데 개인소유지에 있어 보호수 지정은 되어있지 않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미기재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방매 마을 앞 광장에 두 개의 표지석이 있다. 하
나는 학마당이라 쓰여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
례여사선적비이다. 학마당은 학두리에 사는 주민
임병길(호-松鶴) 씨가 135평의 광장 부지를 마을
에 희사했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표지석이다.
마을에서 만든 돌은 없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학마당이라고 쓰지 않았다고 마을 주민들은 기억한다. 현재의 학마당 글씨는 자녀들이 다시 쓴 것이라고 한다.
이순례여사선적비는 이 마을이 고향인 이순례 여
사가 마을 앞에 동각을 세우고 마을에 토지를 희
사한 것에 대한 주민들의 보답에서 세운 비다. 사
실 후손이 없었던 이 여사는 자신의 전 재산을 마
을에 맡기면서 주민들에게 자신이 죽은 날에 제
사를 당부하였다. 지금도 매년 이여사의 제삿날
이 되면 주민 모두가 모여 이 여사 를 회상하고
그의 고향 사랑의 정신을 기리기도 한다. 4월달 좋은 날을 받아 제를 지낸다고 한다.
마을 주변에 고인돌이 많다. 서당동에 2개의 고
인돌이 있고 학두리 뒷산에 1개가 있다. 그리고
잿등에는 2개의 고인돌이 있었으나 길을 넓히면
서 없어졌다.
학두리 마을에는 1928년에 세운 가암거사 임조
석시혜기념비가 서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특히 혼란기인 한국전쟁 때도 전쟁 발발 전 3 명
의 희생자 외엔 한 명도 피해자가 없을 정도로 마
을 분위기가 좋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 마을에는 행복택시가 다닌다. 이 마을은 버스
가 다니지 않는 오지마을로서 일로읍에서는 지장
리 청금성 마을에 주민 복지 차원에서 군에서 행
복택시를 운영하는 것이다. 차가 없는 주민은 1인 6장의 이용권을 주고 부부가 사는 집은 9장의 이용권을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