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원목은 일로읍 산정4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우
데미,아래데미,모퉁아리,산속마을을 포함하고 있
다. 산속마을은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원래는 산정 3리 도덕지 마을과 한 구역이었
으나 산정4리로 分里된 것은 20여년에 지나지 않
는다.
지명도 원래는 신언목이었다. ‘-목’이라는 지
명은 중요한 길목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새로 만
들어진 간척지의 중요한 길목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는 ‘新興目’이라
포기되어 있는데 이것도 잘못된 표기이다. 산정
리를 포함하여 광암리 상신기리 복룡리 등 4개리
에 펼쳐져 있는 간척지는 조선시대에 세 차례의
간척을 통해서 형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교 앞
마을에서 학두리까지 1차 제방을 쌓고 2차는 복
룡촌에서 용호동까지, 3차는 양호도에서 선창목
까지 둑을 쌓으면서 현재의 넓은 들이 만들어졌
다.이때 용호동에서 복룡촌으로 가는 다리 부근
을 선창목이라 하고 복룡촌 마을의 안산 뒤를 장
구목이라 부르는 지명이 나온다.
신언목도 새로 형성된 간척지의 주요한 길목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에는 신언목이란 지명이 빠지고 월곡과 반곡이
나온다. 현재 쓰여지고 있는 신원목은 反谷(밀양
박씨 비문에는 한자 표기가 盤谷-마을의 형국이
소반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이란 지명대
신에 붙여진 이름이다.또한 마을회관 앞에 있는
표지석에는 ‘이곳 신원목 마을은 옛적에 소뿔을
닮았다 해서 반곡으로 불리우다 일제강점기 때
영산강을 막아 간척을 하여 농지가 확대되고 연
꽃 방죽이 생기면서 새로운 들녘마을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원래의 지명유래
와는 다르다.
지명유래
미기재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朴重愛(자-영수, 호-묵암. 1735 –1821)이다.
아래까끔이라 부르는 마을 뒷 동산의 묘소에 있는 묵암
공 비문에는 공은 천품이 총명하고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
하였으며 매사에 공명정대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흠모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박씨 족보를
볼 수 없어 확인할 수 없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이 마을은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주민들은 행정구역이 분리될 때 주민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당시 이장 한 사람의 의견만 반영이 되
면서 마을의 역사성이나 현실이 무시되었다고 주
장한다. 즉 신원목은 역사적으로도 오래 전에 형
성되었고 마을의 뿌리도 깊은 반면에 도덕지는
1920년대 영화농장이 조성되면서 형성된 신흥마
을인데 도덕지가 3리가 되고 신원목이 4리로 된
것은 잘못된 행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당시 이장
이 도덕지 사람이어서 마을의 오랜 역사나 문화가
배제된 채 한 사람의 의견만 따라 행정구역이 지
정된 것은 분명 잘못된 행정이었다고 지적하는 것
이다.
행정구역 변경
문헌을 통해서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
에 노촌면 新言目리로 기록되었다. 이후 1912년의 자
료에는 일로면 月谷동 反谷동으로 나오고 新言目리가
빠졌다. 이후 1917년의 자료에는 일로면 산정리 월곡
동 반곡동으로 나온다. 그리고 1987년의 자료에는 행
정구역명에 월곡과 반곡은 빠지고 일로읍 산정3리 道
德地로 나온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이 방죽에 처음 백련이 나타난 것은 구 원둑이 막아
지면서인데 지금은 없어져 버린 저수지 옆 덕애 마을
주민들이 가꾸어 오면서 현재까지 이어졌다. 주민들
에 따라서는 일본인들이 하나 둘씩 심었던 것이 넓게
퍼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연(蓮)은
물을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방죽을 관리하던 농지조
합에서는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물이 부
족해 농업용수가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해서 농조에
서는 70년대부터 몇 차례에 걸쳐서 경상도 대구 사람
들에게 연을 팔았다.
벼농사와 밭농사를 하며 로컬푸드에 3분정도 납품하고 있다고 한다.
주요시설
마을 입구에 시온영광교회가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왔다.
마을변화
마을 앞은 동양 최대라고 일컬어지는 백련단지가 들
어서 있다. 회산 백련지(또는 복룡지 라고도 불렀음)
는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축
조된 저수지로 의산리의 돈도리 앞에 원둑이 쌓아지
고 영화농장이 만들어지면서 간척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막아놓은 방죽이었다. 주민들이 회산방죽 또는
영화방죽으로도 불렀던 이 방죽은 몽탄면의 당호 저
수지에서 물을 끌어와 영화농장에 사용하였다.
면적은 10만여 평으로 두 개의 저수지가 합하여져 인
근 농장 25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농작
물의 젖줄 역할을 하였으나 1981년 영산강 하구 둑이
건설 된 후 사실상 농업용수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부녀회와 노인회가 있고 동계를 지낸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미기재
동/식물
팽나무가 개인소유로 있다. 할머니가 산에서 당산나무가 있어 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당은 제사 모시는 곳으로 우데미와 아래데미에 우물이 두 개 있었다. 당(영풍할매)이 물을 떠가야 물을 기를 수 있었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뒤 묘지가 많은 곳을 욋골이라 하고 그 뒤를 안
골이라 부른다. 안골에 대한 내용은 수정을 요구하였다.. 조금나 들이라는 지명도 있다. 조금
때가 되면 물이 들어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뒤 묏등이라고 부르는 지역에 광주시 지정 인간
문화재인 서창순선생 묘지가 있으며 옆에는 2000년
12월에 세운 추모비가 있다. 원래 용산리 농장 마을
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 밖을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
로 주민들이 화합이 잘 되고 협동심이 강했다. 해서
한국전쟁 때는 주민 중 한 사람의 피해도 없었음을
자랑하기도 한다. 협동심이 좋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영산강이 막히고 지방자치체가 실시되면서 연방죽이
군 소유가 되고 백련이 각광을 받으면서 백련단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방죽이 들어서면서 마
을 인심이 사나워졌다고 한다.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소득은 별로 없고 주변만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기껏
해야 주민 몇 사람이 축제 기간 동안 노점상을 벌여
농산물 판매 등으로 얻는 소득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있다고 한다. 마을길이 넓어지고 포장이
잘 되어 다니기에 편한 점이다.
영화 농장 주변 마을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마을도
농장이 조성되기 전에는 무척이나 어려운 생활을 했
다. 그러다 영산강이 막히면서 비로소 주민들이 잘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