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마을에는 천씨가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천씨와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입향조는 무안 박씨 박무원(자-인여, 1585-1672)의 손자인 박진형(자-승백, 호-낙선당, 1660-1741)이다. 공은 조선 개국의 元勳인 풍정 박의룡의 후예로 선대에 해남에서 일로 청금성으로 이거했다가, 공의 代에 이 마을에 들어왔다. 공은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족보를 보면 하늘의 도움으로 노루피를 구해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주민들은 그의 효성에 대해 하늘이 공의 효성에 감동해 보내준 선물이라고 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현재 무안 박씨가 절반정도 거주하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 본 지명의 변화는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박곡면 약곡리로 나온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구박곡 약곡리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박곡면 약곡리 구박곡 약곡리로 나온다. 이후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약곡리 약식 박실로 표기된다.
행정구역 변경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박곡, 언동 일부를 병합하여 약곡리라 해서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원래는 한 행정구역이었으나 2005년도에 두 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 박실과 약실로 이루어졌다.
이장 선출 문제로 분구가 되었다고 한다. 두 개의 성씨 간에 마을자금도 통합 관리되기 어려웠다. 또한 웃동네 사람들이 양반행세를 하며 아랫마을과 갈등이 있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약초가 많은 산을 끼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잘 몰라서 약초를 캐는 사람은 없다.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약초는 캐지 않았지만 농경지가 부족해 산림자원을 많이 활용했다. 한 때, 몽강1리(옹기마을)로 장작을 공급하기도 했다.
최근 새로 이주한 주민이 있으면 마을주민 모두를 초청하는 형태의 집들이를 진행한다. 이를 통해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온 마을과 화합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마을이 잘 조성되어 있고 청년회 조직이 개방적으로 조율하며 활동하고 있어 인구가 계속 유입되고 있다. 청년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주자들과의 관계가 좋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에는 쪼빡샘이라 부르는 공동우물이 남아있다.
전통식품/특산품
계곡이 깊은 관계로 마을 뒤에는 숯막을 만들어 숯을 구어 목포에 팔기도 하였다. 또한 가는골에서 도자기가 발견되고 주변에 수많은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승달산의 맥을 이어받은 매봉산, 어유치(魚遊峙), 국사봉(일로읍 감돈리의 국사봉과 같은 이름) 등 세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소쿠리 형국을 하고 있어 아늑함을 준다.
주변의 산이 맥반석을 포함한 산이어서 깨끗한 물이 나온다.
예전에는 우산각 근처까지 물이 들었다.
동/식물
주변 산에 산초(山椒.)와 하수오(何首烏)가 자생하고 있다.
삼산정 옆 도지정 보호수인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태풍으로 고사했다.
예전에 마을 주변 산에 호랑이가 살았다고 한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에는 골짜기가 많아 골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지명으로 세작골, 뒷골, 분정골, 시토골, 청라골, 어유치 및 마을에서 달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어계골, 버텅골, 절골(사동), 디딜방아를 닮았다 해서 방에골, 작은 가는 골, 큰 가는골, 된재(마을에서 청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넘기가 되다 해서), 중성골(중이 살았다 해서), 풍덕골, 개라골, 새터, 감난골, 윗영골, 아랫영골, 서당골 등의 이름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당산제는 50-60년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또한 농악이 유명했으나 당산나무, 당산제와 함께 사라졌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는 입향조인 처사 ‘박진형’을 기리는 정자가 있다. 매봉산, 어유치, 국사봉 등 세 개의 산을 의미하는 三山亭으로 이 정자의 주인인 박진형은 학문과 덕행이 높아 주변의 선비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공의 그러한 유덕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그의 7대손인 박민화, 8대손인 박병욱이 중심이 되어 1924년에 처사공의 유지에 지은 정자이다. 그러다 태풍에 파손된 것을 1941년 현 위치에다 재건축한 것이다. 정자 옆에는 성인의 세 아름이 넘는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설화
박진형 공은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족보를 보면 하늘의 도움으로 노루피를 구해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술, 담배를 참아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송아지를 샀는데 그만 호랑이가 물어갔다
낮에도 큰 짐승이 무서워 긴 대나무를 옆에다 놓고 일을 했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최근 들어 세 명의 면장을 배출한 마을이다.
(박금남, 박성옥, 임승철)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맥반석 개발 업체의 개발 시도를 하였으나 마을 주민들의 반대로 개발에 실패하였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2006년도에는 친환경 마을 1등으로 선정되다.
또한 마을 뒷산에는 1시간 코스의 마을을 둘러싼 숲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약실마을은 무안군 지정 1호 한옥마을이다. 현재에도 20채에 이르는 한옥마을(과거 22채였음)이 조성되어 있다.
운수업을 운영 하시는 분이 마을 광장을 조성할 수 있도록 땅을 구입해주어 마을회관 앞에 마을 분들이 이용하실 수 있는 넓은 공터가 조성되었다. 당시 600만원(현 시세 6000만원) 상당의 기부였다.
일치단결이 잘되는 마을 사람들, 다른 마을과 달리 청년회가 활발한 마을, 귀촌가구와 관계가 좋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약초골 한옥마을과 정보화마을 사업 등을 통해서 처음에는 민박, 약선비빔밥 등을 활용한 관광 사업이 매우 잘 진행되었다. 그러나 메르스, 사스,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 시기를 거치면서 방문객 수가 줄어들었고 사업이 어려워졌다. 한창 활발하던 시기에는 연간 체험 활동 인원이 7~8천여명에 달했다.
마을에서 관광자원화를 위해 온천수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20~30여년전)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발될 당시 초안인 터널 형태를 반대하여 현재의 교각 형태로 만들어졌다.
마을 뒷산의 송전탑 건설은 많은 분들이 반대하기도 했으나 보상금을 받고 찬성한 분들이 많아져 건설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