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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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장1리 몽탄면 도림산마을 작성
  • 도림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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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예전 100여 세대가 살았으나 23세대가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마을 오른쪽의 비장동, 마을 아래 쪽의 분토머리, 도림촌 등 세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지명유래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무안군에서 발간한 마을유래지에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은 많지 않으나 한학자나 도술이 능한 사람이 많이 나와서 도림산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민들도 ‘왜 도림산이라 했는지는 모르지만 선비들이 많이 나와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고 한다. 추정컨대 공부하는 선비들이 많이 나오는 마을이어서 도림산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분들은 높은 벼슬은 한 사람은 많지 않으나 한학자나 도술이 능한 사람이 많이 나와서 도림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나주丁씨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丁榮孝(1531-1575. 자-성미, 호-毅菴)공이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지기가 뛰어나며 학문을 깊이 하였던 사람이다. 또한 젊어서 말하기를 ‘남아가 치세에는 文이 없고, 난세에 처하여 武가 없으면 세상에 써 먹을 동량이 아니다’ 하고 무략을 익혀 무관이 되어 養兵과 安民의 계책을 세웠다. 후일 뜻한 바가 있어 이곳 몽탄면 도림산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았다. 아우인 성암 정유효는 청계면 강정리의 입향조이다. 의암의 무덤은 청계면 송현리 長松亭에 있다. 마을 유래지에는 ‘입향조가 도강 김씨인지 나주 정씨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무안지망집에는 1500년대 중반에 자리 잡은 나주 정씨가 입향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도강김씨가 들어왔는데 도강김씨의 입향조는 金命壽(선조대)로 아버지 삼건은 함평 현감을 지냈다. 신미년(1571년)에 家禍를 만나 을해년(1575년)에 강진군 송현에서 이곳으로 이거했다. 공은 일찍이 뛰어난 경륜을 보였으나 불행히 화를 만나 초야에 묻혀 지냈다. 이처럼 두 성씨의 입향 연대를 살펴보건대 나주정씨의 마을에 도강김씨가 인척관계를 맺어 마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 전까지 마을에 도강김씨가 살고 있었으나 현재는 살고 있지 않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원래 마을이 와우형의 아늑한 지형이었으나 현재는 마을 앞으로 서해안 고속도로와 호남선이 지나고 있어 조금은 어수선해 보인다.
마을성씨
도림산과 양지촌 마을은 장군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같은 입향조의 나주丁씨 마을이다. 월산 마을은 매봉재를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나주鄭씨가 살고 있다. 현재는 나주 丁씨를 비롯하여 여러 성씨가 어우러져 살고 있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이 지역은 본래 무안군 박곡면에 속 했던 곳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월산리 청계리 양지촌 도림산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양지촌과 비장동의 이름자를 따서 양장리라 했으며 도림산 월산 양지촌 등 3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이 마을은 곡창지대였다. 당호저수지가 조성되기 전까지는 광활한 농지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 마을이 몽탄면에서 가장 地價가 높을 정도로 문전옥답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에 의해서 일로의 영화농장이 조성되고 농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저수지를 막기 시작하였는데 이 마을 앞의 농경지가 상당부분 들어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던 농민들마저도 강제 이주를 당해 마을세가 상당부분 약화되었다. 지금도 영화농장 주변 마을에 나주정씨가 있다하면 대부분 도림산 마을 출신들로 보면 된다. 주민들은 원래 이 마을이 도예촌이었다고 한다. 도자기를 굽는 陶藝가 아니라 칼과 관련된 刀刈村이라는 것이다(도예刀刈는 벼의 재배 흔적이 나온 것 등을 감안할 때 도예稻刈로 봐도 괜찮을 것 같다-김정섭 선생님). 이유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 앞에 刀刈堤라는 방죽이 있었던 것을 보면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겨지나 알 수가 없다. 명산역을 이용하여 목포로 많이 다녔다.
주요시설
장군봉에서 큰검수와 작은검수가 흘러내려 형성된 비장동은 일제강점기 박곡면과 석진면이 합쳐질 때까지 박곡면사무소가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들 가운데 있던 들샘은 식수 겸 빨래터였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없애버렸다.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마늘, 풋마늘을 생산하고 있다. 가마니도 많이 짰으며 보리, 조 농사를 많이 했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도림산 마을은 양장1리에 속한 마을로 가산재 매봉재 장군봉에 둘러싸여있다. 마을 뒤로는 투구봉과 장군봉이 이어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七柳川이 흐르고 있다. 칠류천은 보유재 앞을 지나 마을 앞으로 흐르는 시내인데 예전에는 7그루의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마을 앞 공유지에 봉분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동산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말맷등이라고도 부르는데 사실은 비보의 성격을 띄고 있는 조산등이다. 마을 앞에 보이는 脈을 송장등(월산 마을에서는 비알등이라 한다)이라 하는데 마치 사람의 시신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假山이다. 예전에는 상당히 큰 동산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든 형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마을 앞들을 최가들이라고 한다.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지명이지만 경지정리를 하기 전까지는 즐겨 부르던 명칭이다. 마을 오른쪽에 漁翁골이 있으며 마을 뒤에 바위재가 있다. 또한 마을에서 청룡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검숫재라 한다. 마치 칼머리와 같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報裕齋 八景 七柳飛絮 七柳 마을에 날리는 버들 솜 憶曾手植學淵明 일찍이 생각하니 버들심어 도연명을 배우고 添得雙林更有名 쌍림을 더하니 더욱 유명하다. 醉中不覺春風到 취중에 봄바람 느끼지 못하고, 認是叢林雪未晴 총림에 눈이 개이지 않았음을 알았네. 道林紡燈 道林에 걸린 등 道林夜色正堪憐 도림의 밤은 하늘을 사랑하여 星落螢飛月一邊 달의 한쪽에 별 떨어지고 반디 불이 날린다. 逸濟勞善敬姜戒 음일을 버리고 일에 힘쓰면 선한 마음 생긴다는 경강敬姜의 교훈 千載寒閨猶有傳 천년의 공규空閨는 아직도 전해오는데. 陽村炊煙 양촌의 밥 짓는 연기 向陽背峽結茅廬 골짜기 등지고 해를 향하여 띠집을 짓고 朝暮蒼烟接太虛 아침저녁 푸른 연기 태허太虛에 이어있네. 桑圃竹籬曾慣識 뽕밭 대울타리 이미 익수하게 알고 있는데 渺茫難辨幾人居 넓고 끝이 없어 몇 사람이나 살고 있는지 헤아리기 어렵네. 開山歸雲 개산에 돌아온 구름 開山名勝擅南州 개산의 명승은 남주를 차지하고 靈氣成雲岩穴幽 영기는 구름 되어 암혈에 그윽하다. 斯間應有神仙宅 이 사이에 응당 신선의 집이 있으리니 蕩滌塵場願一遊 먼지를 씻어내고 한번 놀러가고 싶네. 劒峀行人 검수를 지나는 사람 綠崖一路挾田生 초록언덕에 논을 끼고 길이 생기고 去去來來竟日行 가고 가고 오고 오고 온종일 다닌다. 又有歸人多夜火 돌아가는 이 있어 밤불이 밝은데 錦南怳若富春城 금남錦南은 황홀하게 춘성春城이 넉넉하다. 斗山返照 두모산의 석양 斗山秀色揷天東 두산의 아름다움을 천동天東에 꽂고 全幅羅裳掛樹紅 전폭의 비단치마는 나무에 걸려 붉다. 樵子不知朝暮限 나무꾼은 아침저녁을 모르고 笑言仙女下雲中 선녀는 구름 속을 내려온다고 웃으며 말하네. 夢灘齋月 몽탄의 밝은 달 夢灘江水接天流 몽탄강 물은 천류天流에 닿아있고 一鏡如磨夜始秋 장 닦은 거울이양 가을이 열린다. 灑落胸襟濂老像 흉금이 쇄락하여 주돈이周敦頤를 닮았는데 不須外此更相求 이 밖에 더 구할 것이 없네. 明山汽笛 명산의 기적소리 輕鐵明山夜向晨 명산의 경철은 밤부터 새벽까지 一聲離笛又催人 기적소리는 사람을 재촉한다. 寄語世間豪富客 세간의 귀인과 부자에게 말 하노니 緣何鞭馬費心神 무슨 연고로 말에 채찍질하는데 마음 쓰는가. 謹按梨花洞惟我十世以下衣履所藏而前川七柳道陽二村先世手植也 擇仁也而遠近山川亦莫非平日杖屨所到也 入洞登齋觸目有感敢題八景吟以寓微衷 后孫 奎炳 謹稿 삼가 생각건대 이화동은 우리 십세十世 이하의 옷과 신발이 소장되어있는 앞내의 칠류七柳 도양道陽의 두 마을은 선조들이 심은 것이다. 인仁을 택한 갓은 원은 산천 역시 평일 이름난 사람이 머물렀건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다. 마을에 들어가 재에 올라가니 눈에 띠어 느낌을 감히 팔경八景을 읊어 조그마한 뜻을 부친다. 후손 규병 삼가 쓰다.
유물, 유적
이 마을은 1994년에 서해안 고속도로공사와 호남선 복선화 공사 당시에 청동기 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각종 유구와 유물들이 발견돼 학계를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었다. 분토머리 앞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른바 무안양장리유적으로 이름 붙여진 이 발견은 A.D 4∼5세기경의 농경관련 수로와 수로시설이다. 이 수로에서 많은 양의 목제품과 백제토기편이 출토되었다. 목제농기구로는 가래, 가래날, 낫자루, 괭이, 고무래 등이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의 팔각건물지 등도 발견되었다. 특히 이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볍씨를 포함해 무수한 잡초 종자도 함께 나왔다. 농촌진흥청의 분석에 따르면 모두 습지식물이었다. 이는 2000년 전에도 화전이나 밭이 아니라 논에 물을 대 벼농사를 지었다는 결정적 증거다. 또한 현재 식물과 비교해 기후와 식생이 2000년간 크게 변하지 않은 것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불만이 많다. 유적지가 발견되면서 문화재 보호지역으로 지정되고 주민들의 재산권행사에 많은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매봉재 아래 이화동에 보유재가 있다. 1913년에 지어진 제각은 삼문이 있으며 정면4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보유재라는 간판이 두 개 있으며 5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몽탄남교가 설립되기 전까지는 간이학교로서 역할을 당당히 했다. 마을에 각종비가 있다. 1992년에 세운 정창진공적비 정유진선생기행비 정규병선생숭모비 1993년에 세운 함평이씨추선비 이정본선생시서예기념비 2005년에 세운 월파정공효자비 등이다.
설화
비장골은 원래 5가구가 넘어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5가구가 넘게 살면 반드시 넘는 가구는 폐가를 당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아기장수 전설이 있다. 장군봉 아래 장군재가 있는데 마을에서 약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갔다. 오랜 옛날 장군재 아래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부부에게 이상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방안을 날아다니며 말을 할 뿐 아니라 겨드랑이에는 날개가 나 있는 것이었다. 부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집안이 역적으로 몰릴 것이 두려 워’ 아이를 죽여버리고 말았다는 내용이다. 두 번째 탐방 때는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마을에는 선비가 많았다. 근대에만 해도 대한민국 미군정 시절의 대법원장을 지낸 김용무의 스승이었던 만성 정규병선생이 있었고 우산 정유진선생 등 쟁쟁한 선비들이 있었다. 특히 만성 큰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찾아온 조문 인파는 남도의 선비들을 비롯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만장은 하늘을 뒤덮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마을의 방죽인 刀刈堤는 주민들이 단합으로 지켜낸 승리의 표상이기도 하다. 원래 이 제방은 당호저수지가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 벼농사의 젖줄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당호저수지가 조성되면서 이 방죽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주변의 힘 있는 사람이 방죽을 차지하기 위해서 법적인 절차를 모두 마쳤는데 주민들 특히 부녀자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이를 저지한 것이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일제강점기 때 호남선 철도를 놓으면서 일제는 세 갈래로 구상했다고 한다. 하나는 구릿재를 지나서 무안읍을 관통하는 길과 두 번째는 가산재를 지나서 도림산 마을을 거쳐 몽탄면을 지나는 길 그리고 현재의 철도노선이다. 하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주민요구사항
철도, 고속도로의 소음이 심해 주민들이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본문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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