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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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장3리 몽탄면 양지촌마을 작성
  • 양지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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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20가구가 등록되어 있으나 13가구만 실제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양지촌 성자동 이화동
지명유래
따뜻한 마을이라 양지촌이라 불렀다.
마을형성(입향조)
원래 양장리는 최가들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씨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전주 최씨들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한 가구도 없다. 그러다 1500년대 중반 이후 나주 정씨들이 청계면 송현리에서 이 마을로 들어서면서 정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정몽은(자-경양, 호-모암. 1624-1684)이다. 공은 원래 청계면 송현리에서 살던 丁嵓(정암)의 큰 아들이다. 정암 공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공이 돌아가시자 부인인 전주이씨(이씨할머니로 부름)는 둘째 아들인 몽열을 송현리에 두고 큰 아들인 몽은과 몽득 몽신을 데리고 이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터가 양달이어서 울이 짜여있는 것처럼 따뜻하여 예부터 선비들이 기거하기에 알맞은 터이며 당시 鄕內의 선비들이 지초를 심어 遊樂을 하면서 마을 이름을 陽芝村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988년에 세워진 마을 앞 표지석에도 같은 글이 쓰여져 있다. 마을의 형세를 보면 승달산의 맥을 이어 국사봉 장군봉을 거쳐 매봉 아래에서 터를 잡았다. 우측에는 참새재 아래에 만석군 터가 있으며 좌측으로는 비장골이 있다. 비장골은 현재 양장1리에 해당되지만 그곳에는 원래 5가구가 넘어서 살 수가 없다고 한다. 5가구가 넘게 살면 반드시 넘는 가구는 폐가를 당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성씨
도림산과 양지촌 마을은 장군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또한 같은 입향조의 나주丁씨 마을이다. 월산 마을은 매봉재를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나주鄭씨가 살고 있다. 500년 자작일촌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이 지역은 본래 무안군 박곡면에 속 했던 곳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 월산리 청계리 양지촌 도림산 일부를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양지촌과 비장동의 이름자를 따서 양장리라 했으며 도림산 월산 양지촌 등 3 개의 마을로 이루어졌다. 행정구역상 도림촌과 한 마을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면서 1987년 무렵 분리되어 양장3리가 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한국전쟁 때 주민들은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으나 주민 중 몇 사람은 의용군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주민들의 양반 행세가 대단하여 타지 사람들이 마을 앞을 지날 때에는 복장을 단정히 해야 했고 거동은 물론 말소리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성자동까지 영산강물이 들었다. 달산, 청용, 명산, 당호 학생들은 몽탄남교에 다녔다. 영춘동 아이들은 생계가 어려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는 했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마을에 두 개의 샘이 있다. 골샘과 중샘인데 골샘은 철분이 많아 주민들 말대로라면 물의 무게가 무안에서 가장 많이 나갔던 물이라고 한다. 중샘은 중들이 오가면서 사용했던 물이 아닌가 한다. 지금은 두 샘 모두 사용하지 않고 있다. 도림산 마을은 들샘을 이용했다. 회관 앞에 있는 샘터는 빨래터로 이용했고 67, 68한해에 물이 나지 않으면 비장골 샘을 사용했다.
전통식품/특산품
약초를 재배한 마을이다. 풋마늘을 재배해 가락시장에 판매한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앞으로는 언골에서 발원한 칠류천이 흐르고 있다. 칠류천은 버드나무가 많아 이름붙여졌다. 월산, 양지촌 골을 따라 흘러가는 물이 파군다리 저수지로 모인다. 이 저수지는 자방포들의 농업용수로 사용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양지촌과 성자동 사이에는 쇠묏등이라는 둔덕이 있으며 그곳에는 정씨들의 선조 무덤이 있다. 마을에서 월산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소뭇재라 한다. 마을에서 월산마을로 넘어가는 길목을 불통목이라 한다. 장군봉 아래 장군재가 있는데 마을에서 약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예전에는 이곳에 주막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갔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월산마을과 불싸움도 하고 관계가 좋지 않았다.
유물, 유적
마을 옆 도림재에 문중 묘 단지를 조성하다 조선초기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발견하여 한국방송공사의 진품명품에 출품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자기 파편과 고대 생활 용기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화동에 문중의 제각인 보유재가 있다. 보유재는 만선선생이 후학양성을 했던 장소로 서당 역할을 하였다. 후학들은 성공하여 출세하였다. 파군다리는 나무다리였다. 다리밑에서 소도 잡고 말도 잡고 했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정씨 문중에서 [만선선생유집]을 번역하고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성자동은 공부하기 좋은 곳이어서 그곳에서 공부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진사급제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수맥파 차단판(대한민국 특허 20-04225815호)을 국내 최초로 발명하여 2011년에 대한민국 기술혁신 대상을 수상한 정철표씨가 살고 있다. 이분은 17대 몽탄면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신지식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민 중에 정광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일제강점기 때 공부를 많이 하고 만주에서 활동하였는데 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활약하였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주민들 중에는 그 사람이 자랑하면서 보여주었던 사진 중에 김일성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았다고 한다. 또한 그 사람이 내려오면서 돈을 많이 가져와 주민들 말대로라면 파군다리에서 마을까지 돈을 깔아도 남을 만큼의 돈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돈을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도박을 해서 탕진했다고 하니 아쉬울 뿐이다. 현재 그 사람은 고인이 되었으며 후손도 살고 있지 않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일제강점기 때 지형을 따라 마을 옆으로 철도 건설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를 할 수 없었다. 또한 비장동 옆에 있는 동아실에 초등학교를 세우려고 했으나 부지가 좁아 이 또한 짓지 못하고 파군다리 쪽으로 갔다. 지금은 폐교된 몽탄남초등학교가 그것이다.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미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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