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 마을의 이름을 놓고 말이 많았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 유래지에서 기록한 것처럼 ‘마을 뒷산 모양이 배형[舟形]과 같다하여 舟山으로 부르다가 일제강점기 때 利山으로 개칭되어 어원상 梨자에 따라 ‘배뫼’라 부르게 되었다‘는 의견과, 예전에 이곳에 전선창과 강정포구가 있어서 배를 매었다는 뜻의 ’배매’ 가 ‘배뫼‘로 변해 이를 한자로 써서 ‘梨山里’로 했다는 의견, 또 일본인이 순수한 우리 말인 ‘배뫼’를 한자로 바꾸었다는 의견 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1차 탐방에서 주민인 임종중님의 자상한 해석으로 이러한 여러 가지 說들을 잠재울 수가 있었다. 해석인 즉 이 마을의 뒷산에 천하바위가 있어서 이 산을 천하봉이라 부르는데 예전에는 그 산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강을 이루고 있었다. 배꽃이 피어있는 봄날에는 어느 절경에 부럽지 않을 정도였을 거라고 회상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인 한호(閑湖) 임연(林堜 1589-1648)이 영산강을 따라서 머무를 곳을 찾아다니다가 이 절경을 보고 당시 이 마을에 살고 있던 방씨들에게 남원에다 代土를 마련해주고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 방씨들이 살았던 곳은 신선봉 기슭으로 주변에 집성촌을 이루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풍수적인 이점을 살리기 위하여 마을 왼쪽 즉 좌청룡에 해당하는 부분에 영산강물이 안보이도록 흙을 쌓아올린 흔적이 있다. 지금도 방씨들의 묘가 주변에 많이 남아 있다. 또 다른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입향조가 원래 위쪽 마을인 내리 마산에 정착 하려고 했으나 인동 장씨들이 이미 살고 있어서 이곳으로 정했다’고도 한다.
당촌은 나주 오씨의 자작일촌 마을로 입향조가 배뫼 마을로 장가를 가서 형성된 마을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특이 하게도 모두 동쪽으로 문을 냈다. 주산인 천하봉이 서쪽에 있어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마을의 주 통행로가 동쪽으로 나있어 동구테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
背山臨水의 자리에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오묘한 혈처임을 느낄 수 있는 좋은 터이다.
마을성씨
배뫼(나주 임씨), 당촌(나주 오씨)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지명의 변화를 살펴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이호리 당촌 강정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이호동 강정리 당촌 어오지리 등으로 나오며 1917년의 자료에는 석진면 이산리 어오지 강정리 이호동 당촌으로 나온다.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이산리 이산 당촌 어오지 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는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속했다가 1914년 어오리 강정리 정호동 당촌을 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32년 박곡면에, 1939년 몽탄면에 속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영산강이 막히기 전에는 집집마다 배가 있었다. 옹기 흙을 퍼서 몽강리까지 배로 날랐다.
이 마을은 주변에 토지가 없어 공부만이 희망이었다. 그 덕분에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무원이 많이 배출되었다.
나주 임씨 양반촌이었기 때문에 일은 하지 않고 양반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요시설
이 마을의 지형을 보면 U 자형이다. 도도히 흐르던 영산강의 물이 이곳으로 들어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대해로 나가는 지형이다. 군사적으로 보면 천혜의 요새로 보이기도 한다. 해서 조정에서는 1481년 이곳에 戰船을 만드는 전선창을 세워 영산강의 해로와 서해 무역항로를 아우르는 군사 요충지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관리하는 병영이 있었으며 무안읍지의 기록을 보면 전선창의 인원이 408명, 혹은 224명이라고 기재되어 있어 한때는 크게 붐볐을 것으로 보인다. 실지로 전선창이 있었던 주변에서 일제강점기 때 투구가 나오고 나무를 잘랐던 활과 화살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어렸을 때 비래봉 주변에서 투구와 화살을 봤다고 한다. 해서 ‘귀신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근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전선창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 이곳에는 포구가 형성되었다. 강정포구라 부르는 이곳은 목포항이 개발되기 전에는 포구 주변에 비동이라는 마을이 있어 100여 호의 인가가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또한 주막도 여러 군데가 있어 굉장히 흥청거렸던 곳이었다. 포구 앞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배 모양의 농경지가 있었는데 주민들은 배가 가라앉으면서 형성된 농경지라고 믿고 있다. 현재는 경지정리가 되어 그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마을변화
어촌마을이었으나 농촌으로 변화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마을에 대밭이 있어 죽제품, 대나무 울타리 등을 만들었다. 당시 죽제품들은 인기가 있어 대밭이 있는 분들은 부자가 되었다. 죽제품들은 전국에서 사러왔었다.
영산강이 막히기 전 이 주변은 숭어와 장어 등이 많이 잡혔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배뫼 마을은 천하봉을 주산으로 하고 신선봉과 깃대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래봉 아래는 강이 깊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명주실 몇 타래를 넣어 봐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해서 물살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당재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그 옆에 두 아름이 훨씬 넘는 도토리 나무가 60년대까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에 재를 지냈던 것이다.
마을에 금굴이 있었다.
동/식물
입향조가 심었다는 당산나무가 마을 좌우에 심어져 있다.
당촌에는 재를 지냈던 도토리나무가 있었다.
영산강을 막기 전까지는 마을 앞에서 숭어와 장어가 지천으로 잡혔으나 현재는 강물 자체가 오염돼 예전의 다양한 고기들을 볼 수가 없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이 마을에는 여러 개의 지명이 남아 있다. 비래봉 기슭에 있다 하여 비등이라는 곳과, 늘 푸른 골짜기라는 청곡(靑谷), 그리고 쇄석굴, 식영정 정자 아래 마을인 너문들이 있으며, 당촌, 강정포구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는 당촌 마을은 예전에 서낭당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마을 뒤 고개 이름을 당치(堂峙), 또는 당재라 한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과거에 영산강을 오가는 대부분의 배들은 당치에서 제를 지내거나 특별 한 의식을 행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유물, 유적
이 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息營亭이 있다. 영산강변에 우뚝 서있는 이 정자는 원래는 1630년대 비래봉 위에 입향조인 한공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불이 나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무등산에 있는 같은 이름의 息影亭이 풍류적이고 서정적인 정자라면 이곳의 정자는 큰 뜻을 품은 정치인들이 잠시 몸을 쉬고 후일을 도모하는 공간이다. 특히 이곳의 식영정은 영산강변 제일의 정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으며 영산강과 닿아있는 비래봉 아래의 바위에는 무안에서 유일하게 四言의 암각시가 새겨져 있다.
마을 입구에 1993년에 세운 기금례 여사 효열비가 있다.
설화
비래봉 주변에서 투구와 화살이 나와 귀신이 나오는 곳이라 하여 근처에 가지 않았다.
기록물, 문헌
종가집 다락에 옛 서적이 많이 있었지만 고물상이나 아는 사람들이 다 가져가 버렸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이 마을에 영산요 김정규 도예가가 있다.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동사회강(東史會綱 - 고대의 강역(江域)과 단군에 대한 사실을 고증하고 있는 역사책)을 지은 노촌 임상덕(1683~1719)이다. 당시에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했으며 그가 식영정에서 글을 읽으면 그의 글 읽는 모습을 보려고 주변의 양반 자제들이 일부러 찾아 왔다는 구전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또한 총지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의 일생을 기록한 노촌연보를 보면 어려서 총지사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거처/생가/묘소
문화재로 등록은 안 되었지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古宅이 있다. 나주 임씨 정자공파의 종가인 임복의 유택이다. 기록에는 중종 26년(1531)에 병조판서를 지냈던 임복이 건립했다고 했으나 주민들은 입향조인 한호공이 정자공파의 종가로 지었던 집이라고 한다. 사실 기록대로라면 나주 임씨의 입향 시기가 달라진다.
안채와 근래에 중건한 사랑채만 남아있으며 안채 뒤편에 있었다는 사당은 없고 현재는 기단과 초석만이 남아있다. 또한 우물도 그대로 있지만 대문간은 역시 없다. 현재의 집은 세 번째로 지어진 집으로 안채는 1984년에 대대적으로 보수를 하였다. 예전에는 사랑채로 여겨지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고택을 관리했는데 현재는 뚜렷한 관리자가 없어 방치되고 있다.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허브장어 식당은 특이하게 영산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장어 양식장이 먼저 만들어지고 마을 관광과 관련된 예산으로 가공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몽탄노적에는 데크길이 조성되어 유채꽃과 코스모스를 활용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영산강 하구언을 막으면서 쌀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좋았다고 하신다. 옥토를 얻었지만 어업은 소멸했다고 한다.
현재 구산마을과 연결되는 산책로가 조성되고 있다.
주민요구사항
석정포에서 식영정을 넘어 느러지에 이르는 데크길 조성 등을 통해서 관광 활성화가 되었으면 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이산 2리 늘어지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기타사항
한가지 눈길을 끄는 사실이 있다. 한때 이 마을은 나주 관할에 속한 적이 있었다. 해서 지금도 밭 1마지기를 나주와 같이 100평으로 하고 있다. 논은 그대로 200평을 한마지기로 한다. 이는 옛날 不事二君의 忠 사상에서 비롯된 발상으로 드물게 쓰여 지는 단위이며 흥미 있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