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동과 산음리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라 부른다.
학동은 양학동 양학울 원학산 등으로 함께 불려지는데 학이 사는 마을이라는 유래를 갖고 있다.
학동이란 지명은 황새봉으로 인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건네골은 마을 건너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고속철로 주변에 마을을 이루었다.
신학동 마을은 재네 또는 방죽몰이라고도 하는데 1982년 취락구조 사업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즉 마을 앞에 커다란 방죽이 있는데 이곳에 토사가 쌓이면서 널찍한 터가 생기자 주민들은 이곳으로 옮겨서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대가 낮아 조그만 비에도 물이 차오르고 생활하기 불편해지자 1980년대 정부의 취락구조 사업에 발맞춰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조성하였다. 새로운 학동이라 하여 신학동이라 한 것이다.
※ 큰 길에서 아홉굽이, 그래서 구리마을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고 큰 마을이었기에 앞의 저수지를 구리저수지라 불렀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은 수성 최씨 집성촌으로 1700년대 중반에 옆 마을인 인평에서 분가한 최치공(崔致恭. 자-恭甫. 1731-1780)이 입향조다. 공이 인평에서 이 마을로 들어왔을 때 마을 이름은 仙巖里로 불렸다. 당시에는 학동이란 지명이 없었다.
인평에 사는 수성 최씨와 같은 파이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마을의 뒷산이 신선봉이다. 신선봉 아래에는 선인무수(仙人舞袖-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추는 모양과 같은 형국)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또한 봉우리 정상에는 말발굽이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신선이 이 봉우리에서 놀다가 말을 타고 승천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기도 한다. 해서 예전에는 이 봉우리가 종교단체의 산상예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의 형국을 옥녀직금형(玉女織金형)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마치 하늘의 선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으로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할 수 있는 명당터로 보는 것이다. 주변의 지명도 이렇게 추정하는데 한몫을 했다. 즉 신선봉이 베틀이며 마을 앞 잉어산이 잉앳대(뒤로는 눈썹줄에 대고 아래로는 잉아를 걸어놓은 나무)이며 구리 마을을 꾸리(북 안에 들어 있는 실)라 했다. 또한 마을 입구를 챗등이라 했는데 이 또한 베틀의 한 부분명칭이다.
마을성씨
원학산에는 수성 최씨 외에 타성이 들어와 버티기 힘들었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수성 최씨 분들은 못 들어본 이야기라 했지만 타성 분들은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이곳은 본래 석진면 지역으로 1789년 호구총수에는 仙巖리 山陰리 鳩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鶴동 仙岩리 鶴仙동 丑岩동 山陰리 九리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학산리 학동과 신학동 그리고 산음 구리 후동이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음리, 구리, 학동을 합해 학동과 산음리의 이름을 따서 학산리라 불러 무안군에 편입되었고 1932년에 석곡면(현 몽탄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학동이 1리이고, 후동은 2리, 산음이 3리이다. 후동과 산음은 고씨가 많이 산다.
구리가 4리로 한씨 등이 살았고 마을이 가장 컸다. 많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한다.
5리는 모래출이었다. 집이 자주 침수되어 주민들이 신학동으로 이주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마을 앞은 예전에는 강물이 들어왔던 지역이다. 지금도 조금만 깊게 파면 갯벌 등이 나온다.
구리마을 인근에 포구가 있었고 철로가 없던 시절 영산강이 마을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영산강변에 만들어진 둑방은 마을 울력으로 쌓았다.
마을 주변이 유적지라서 주변 땅에서 옥이 자주 출토된다. 그것을 씻다가 하수도가 막히기도 했다고 한다.
마을 주변 영산강에는 명주실 꾸리가 들어가도 땅에 안닿는 위아래 물길이 만나 소용돌이 치는 곳이 있다. 그곳을 모르고 지나가면 배가 침몰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배(세곡선)들이 나주 쪽으로 붙어서 지나갔다. 범바위 인근 산의 밑쪽이 영산강 물이 도는 곳이다.
학산리까지의 학생들은 몽탄북초로 다녔다. 마을 주민들은 타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 몽탄역을 통해 기차를 이용했다.
철길이 마을 가까이에 있어 사고로 다친 사람이 많았다.
신학동 입구에는 점방이 있었고 철도 너머에 주막이 있었다.
주요시설
예전 마을 앞에 장터가 있었다. 잉어산 기슭으로 철도와 면한 곳이다. 그곳은 조선시대 일로나 삼향 목포사람들이 한양 갈 때 이용한 길이다. 주민들도 전해오는 말로만 들었을 뿐 확인은 하지 못했으나 이곳을 공수장터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일제 강점기 때 석진면사무소가 있었던 곳과 가까운 지역이다. 면성지에도 ‘고을 남쪽 15리 석진면에 공수장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5년전 만해도 소방감시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무안군이 넓게 둘러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예전에 마을에서 주변 마을 주민들과 맺은 三姓契가 있었다. 이산리의 나주임씨 사창리의 나주김씨 그리고 이곳의 수성최씨 등이 계를 맺어 친목과 우의를 다져왔던 모임이었으나 현재는 없다.
공동이용시설
미기재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마을 뒷산인 신선봉 인근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동자바위가 있는데 동자바위 주변을 문동골[文童谷]이라 한다.
(보통 지역에 신선봉이 있으면 동자바위도 함께 있다.)
말발굽이 새겨진 바위는 여전히 있으나 자연풍화로 태가 옅어졌다고 한다.
신선봉의 중봉을 이루고 있는 것이 황새봉 또는 한새봉인데 이 산이 마을의 주산이다. 이 산은 마을을 향하여 비상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주민들은 황새가 마을 앞 들판의 우렁이를 보고 잡기 위해 일어서는 형국이라 한다.
마을 분들은 범바위에서 보면 월출산 무등산이 확실히 보이고 유달산이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동/식물
구리마을에 아이들 9명이 둘러야 감쌀 수 있는 나무가 있었다. 가지가 30미터에 달한다고 기억하고 계셨다. 마을에 있는 당산나무에 배를 메었다.
저수지에 민물장어가 많았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주민들은 이곳에 농지를 조성하면서 나오는 돌들을 곳곳에 쌓아두었는데 이 돌무더기를 담울이라 했다. 멀리서 보면 이 담울이 우렁이로 보이는 것이다.
마을의 주산인 황새봉(한새봉)은 마을을 향하여 비상하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주민들은 황새가 마을 앞 들판의 우렁이를 보고 잡기 위해 일어서는 형국이라 한다.
북잿등은 이른바 깔끄막길을 나타내는 지명으로 옛날 호남선 열차가 이곳을 지나갈 때면 속력을 내지 못해 이 마을 주민들이나 통학생들이 기차에서 뛰어내린 곳이기도 하다.
북잿등은 인평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때갱이라 부르는 조그만 산이 있었다. 이곳에 초분이 있었는데 귀신소리를 이겨내기 위해서 소리나는 동물을 많이 키워야 한다고 해 주변에 축사가 생겼다고 한다.
문등골(신선이 마을로 내려와 물어본 곳), 조박골(구석기 신석기 토기 출토), 챗등(마을입구 - 베틀의 명칭), 잉어산(잉앳대), 구리마을(꾸리), 재네, 방죽몰이(신학동)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마을에 당산제가 있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유물, 유적
마을에 두 개의 제각이 있다. 이천서씨 제각과 경주정씨 재각이다. 경주정씨 재각인 영남재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시멘트 구조물로 기둥에 4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신학동 마을 입구에 때갱이라 부르는 조그만 산이 있었다. 지금은 개발로 없어졌지만 예전 이곳에는 커다란 고인돌이 있었다. 또한 경주정씨 재각 뒤편에도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
※ 주변 산을 고고학자들이 발굴하는 것을 추천하지만 개인 땅이라 진행하지 못한다고 한다. 구리 쪽 산에 백자, 청자 조각이 많이 나온다. 또한 목포대 박물관에서 발굴해간 유적도 많다. 발굴된 쌍옹관묘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온전히 옮기기 어려운 크기라고 한다. 현지에서 만들어 구운 것이라는 학예연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또한 장터 인근에서는 엽전이 나왔다. 고려장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있고 철도 양쪽에 옹관묘가 있었다. 농공단지에서도 정교한 돌무덤이 발굴되었다.
마을입구에 선유정이 있다.
설화
배도둑이 배를 훔쳐가면서 소도 훔쳐가려고 조판으로 옮기다가 소가 뻘에 빠져버렸다. 밀물이 들어오자 소가 다시 물에 떠올라 소를 찾았다고 하신다.
(이장님 할아버님) 당산나무 3그루가 있었는데 그것들을 베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 제재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67/68 한해 때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뻘 속에서 배가 나왔다고 한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이 마을에서는 행정고시 2명 사법고시 1명 그리고 서울대 의대를 비롯하여 명문대 출신과 박사도 많이 배출하였다. 마을 단위로 보면 가히 기록적이다. 큰 집 뻘이 되는 인평 마을에도 박사를 많이 배출하여 인재가 많았지만 이 마을은 질적으로도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것이다.
이 마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이 있다. 최태주(1907-1964. 호-堅石)인데 1929년 광주농업고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공은 이 마을에서 매일 기차를 이용해 광주로 통학하였는데 무안 나주 함평 등지의 통학생 단장이기도 했다. 공은 11월 3일 1차 학생시위대에 참가하여 식민지 학생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고 11월 4일에도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중 제1호로 검거되어 감옥에 갇혔다. 이후 석방되어서도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인천부두노조에서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그의 행적을 눈여겨보던 일경들에게 감시인물이 되어 신변의 위험을 느껴 일본으로 밀항하기도 하였으나 1931년에 잡혀 다시 송환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민선 면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77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세 번째 기술고시 합격자가 있다고 한다. 무안군 부군수도 있었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장도 배출했다.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이 마을은 황새봉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흔히들 몽탄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이 지역은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나주 김씨 집성촌인 사창과 다산 마을, 수성최씨 집성촌인 인평과 학산 마을이 압도적이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몽탄농공단지는 발굴조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공사가 많이 지연되었다. 당시 유해 공장이 들어오지 않도록 마을의 반대가 있었다. 현재 농공단지에서 저수지로 흘러들어오는 흙으로 저수지 물이 오염되었다고 한다.
농산물 산지유통센터가 주변에 조성되었고 1982년 취락구조 개선 사업으로 신학동이 형성되었다.
주민요구사항
원학산 쪽에 경로당이 있어 신학동에 있는 마을회관에 지원이 부족하다. 마을회관의 도배도 16년 전에 마지막으로 진행되었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선사시대, 나주 건너가 큰집, 몽탄이 작은집이었다고 고고학자가 말했다고 한다.
기타사항
99세 10개월을 사진 어르신이 장수상을 받았었다.(군수상 – 수저, 밥그릇)
고려장으로 추정되는 무덤터들이 있다. 또한 산속에 고인돌들이 많다.
쥐꼬리 명당의 주소는 학산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