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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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정2리 일로읍 두무동 작성
  • 두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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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정보

기본현황

세대, 인구수
39세대 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 구성
두무동은 외진 마을이다. 구정동도 깊숙하게 자리 잡았지만 두무동의 숯골은 마치 귀양지처럼 적막감이 들 정도로 오지 마을이다. 이 마을은 두무동과 숯골로 나뉘어 있다. 숯골은 숯을 구워서 팔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실지로 매봉산에 안숯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숯가마를 설치하고 숯을 구웠다고 한다. 구운 숯은 재 너머 도장포의 초장골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지명유래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두무동 지명유래를 ‘마을의 형성 초부터 한곳에 모여산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흩어져서 드문드문 살았다 하여 두무동’이라 했다 한다. 원래 한자로 쓴 두무동은斗武洞이라 했는데 주민들이 너무 강한 느낌을 준다 하여 의견을 모아 斗務洞으로바꿨다. 즉 곡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면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지니고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두무동의 입향조는 무안군이 발행한마을유래지에 ‘전주이씨 수춘궁파 이화민이 망월리에서 이거해왔다’고 했는데 현재는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현재는 여러 성씨가 어울러 살고 있는데 그중에서 경주이씨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숯골)의 입향조는 200여년 전에 영암 솔이포에서 건너온 진주강씨 강재우(자-경칠)이다. 마을에 여러성씨가 살고 있는데 강씨가 세 가구나 살고 있다. 두무동에만 이씨가 있었다고 한다.
풍수지리(마을형국)
미기재
마을성씨
미기재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미기재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두 마을 다 모두 가난했다. 나덕명에 의해서 소포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이렇다 할 농지가 없었다. 매봉산 너머에 소당이 있다. 소댕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영암으로 건너는 나루가 있어 소댕이나루로 많이 알려져있다. 영암군 서호면 일대의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일로장에 가거나 일로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이나 목포 등을 왕래할 때 주로 이용하였던 나루이다. 나루 사이 물길에는 소댕이샘이 있는데 이를 돌아 건넜다. 조선 시대 지리지 기록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지도에서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제 강점기 후기에 등장한 나루로 보인다. 영암에 사는 사람들이 일로장을 가려 하면 소댕이나루를 건너 마을 앞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마을길은 큰길이었다. 마을이 가난했다. 나덕명에 의해서 소포 둑이 막히기 전까지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이렇다 할 농지가 없었다. 마을 앞에 있는 소포들은 소포선생이 덕치 마을에서 구정 마을까지 막은 둑이다. 소포는 주룡 마을의 입향조 나덕명(자-극지, 호-소포. 1551-1610년)으로 공이 1589년 정여립의 옥사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에 유배되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공을 세워 사면을 받자 나주로 귀향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청호리 주룡 마을에 부친을 모시고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 농지가 부족한 일로 주민들의 상황을 보고 사재를 들여 구정리와 의산리 사이를 막아 들을 형성한 것이다. 아쉽게도 주민들의 배고픔을 구원했던 소포공의 활동을 적은 공적비나 소포들을 확인할 수 있는 표지석 같은 것들이 없어 안타까웠다. 담배농사를 지었고 서숙과 콩 목화를 재배했다고 한다. 종묘회사에서 위탁을 받아 무씨, 유채씨, 대파종자를 재배하였다고 한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샘은 숯골샘이 있었는데 가뭄에 영화정에서도 와서 길러 먹었다. 68년 한해때도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샘물은 먹는 물로 사용하고 빨래는 저수지나 둠벙에서 했다고 한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두무동 마을에는 두 개의 머리가 있다. 의산리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는 황새머리라 하고 숯골 마을로 들어가는 곳은 방애머리라 했다. 방애머리 밑에는 망태고랑이 있어 방아를 찧어서 망태를 채운다는 우스개소리가 전해지고 있다. 방애머리에 있는 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때 마을주민들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비록 마을이 가난하고 외진 곳에 있다할지라도 주민들 모두 순수했다. 농사철에는모두 들판에 나가 일을 하고 일이 없는 날에는 마을회관에 모여 즐겁게 놀고 있는 것이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남아있는 지명으로 소댕이 뒤에 있는 작은 골짜기인 가는골이 있다. 두무동 뒤에 있는 골짜기는 각골, 소댕이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삭기밋골, 숯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중성골이 있다. 분산은 숯골 앞에 있는 산이다. 매봉산 아래에 절골이 있다. 두무동 뒷산은 담배밭등이라 하는데 담배를 많이 재배했다고 한다. 이번 조사에서 마을 어르신들은 담배밭등 명칭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셨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숯골 아래에는 나주나씨 제각인 모원재가 있다. 1934년에 세운 이 제각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으로 안에 가훈이라는 현판을 갖고 있다. 모원재는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를 지내며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왔으나 지금은 10여명이 오신다고 한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미기재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미기재
주민요구사항
미기재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미기재
기타사항
예전에는 뻘에서 대가이와 맛을 잡았는데 대갱이라고도 했다. 4월에 풋마늘과 함께 무쳐먹으면 맛이 좋았는데 이 지역의 대갱이가 맛있는 이유는 뻘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지금도 대갱이 요리를 해 먹지만 예전의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갱이를 잡아서 마을 마당에 한가득 널어서 말리는 광경이 펼쳐졌는데 박정자어머니의 말씀으로는 어머니들이 잡은 것이 예뻣다고 하며 이는 피가 빠지지 않아 예뻣고 남자들은 다매로 쳐서 상처가 많아 예쁘지 않았다고 한다. 게는 일로장에 가서 팔았는데 마을 수거책이 모아서 장에다 팔았다고 한다. 밭농사가 많아서 어머니들이 일을 많이 했다. 숯 굽던 곳은 밭이 되었고 숯가마터는 두 필지의 밭이었다고 한다. 이 산에는 약초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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