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림(平林)마을은 청계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3㎞쯤 가면 나오는 마을로, 행정구역명으로는 청계면 상마3리에 속하며 윗평림, 아랫평림, 장등으로 이루어졌다.
지명유래
평림은 원래 죽림마을로 불린 기록이 있으며, 이는 예전에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았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로도 확인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공사와 개발로 대나무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지명 역시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이름인 평림(平林)으로 바뀌어졌다. 이는 마을 뒤에 있는 12마지기 가량의 동산에 북풍을 막기 위해 커다란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현재 그 동산은 개발되어 농지가 되어 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뚜렷하지 않아,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따르면 ‘조선 말기 여산송씨와 나주나씨가 처음 입향하였다.’라고 하는데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여산송씨와 나주정(丁)씨가 처음 들어온 것은 맞는데, 현재 거주하고 있는 송씨들과는 계열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후에 들어온 성씨가 도림리 청림에서 건너온 무안박씨인데 추정해보면 송씨와 박씨가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승달산의 지맥인 깃대봉과 매봉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매봉산의 밑에는 미래봉이 있는데, 미래는 못자리를 고르는 데 쓰는 농기구로 지름이 두 치 반가량 되고 길이가 다섯 자 가량 되는 곧고 둥근 나무 한가운데 긴 자루를 박아 쓰는 농기구를 말한다. 매봉산의 매가 엎드려 있는 꿩을 보고 있는 형국으로 복치의 자리는 현재 상마 삼거리 주변을 말한다. 여기에서 청계중학교를 복치혈로 보기도 한다. 예로부터 복치의 자리는 천석군이 나올 수 있는 자리라고 하는데, 실지로 그 자리에 수천석의 벼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가 세워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창고가 없다. 하지만 마을 앞에 보살봉이 있어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즉 마을이 보살봉 앞에서 염불을 하는 형국이어서 부자들이 나올 수 없다고도 한다.
마을성씨
복합성씨의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으로 살펴보면 조선시대 자료인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이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의 자료에 일서면 죽림리(竹林里)로 나오고 1917년의 자료에는 청계면 상마리 평림리(平林里)로 나온다. 이후 평림(平林)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본래는 백제시대 이래 무안 일서방 지역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일서면 죽림리(竹林里)로 1910년에 잠시 목포부 일서면에 편입되었다가,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무안군 청계면으로 개칭하여, 1987년의 자료에 청계면 상마리 평림(平林)으로 표기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예전에 이 마을은 빈촌이어서 ‘녹두밭 웃머리’라고 자조적인 말을 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다. 토지가 좁을 뿐 아니라 있는 토질도 박토여서 농작물을 재배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관개시설이 되지 않은 토지들도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평림저수지 등을 만들면서 농사를 짓기에 편리해졌지만, 사실 이 마을은 교통 요지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컸다. 조선시대에 이 마을에는 ‘장송장’이라 부르는 5일 시장이 있었다. 지금도 ‘장등’이라는 지명이 있어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주민들에 따르면 우시장도 겸해서 열렸던 큰 시장이었다. 지형적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지역으로 마을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해상 운송로도 좋았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이 당시 일서면으로 지금의 청계면의 중심지였다. 장등이라 부르는 곳에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었으며 폴리텍대학 자리에는 일본인의 신사(神社)가 있었다. 이후 간척이 이루어지고 뱃길이 도림리 백련동까지만 이루어지자 청계면 소재지가 자연스럽게 현재의 도림리로 옮겨갔었다.
주요시설
마을에는 1930년에 개교한 청계초등학교와 2000년 목포에서 이전해 온 한국폴리텍대학이 있다. 주민들은 청계초등학교가 있는 자리가 참새 형국이어서 아이들이 모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참고로 남안리에 있는 청계북초등학교는 개미형국이라 한다.
마을변화
옆 마을인 대성동에서 진행된 석산 개발 때문에 주민들의 피해가 많았다. 대형차의 잦은 왕래는 주민들을 불안하게 했을 뿐 아니라, 돌가루가 바람을 타고 마을 쪽으로 불어와 빨래를 널지 못하고 여름인데도 창문을 열지 못했다. 문을 아무리 잘 닫아도 아침이 되면 탁자에 뿌옇게 쌓이는 먼지를 주민들은 견뎌야 했다. 이런 고통을 겪은 지 10여 년이 훨씬 넘어서야 간신히 공사가 끝났다.
그리하여 이 마을은 편리한 교통환경을 지닌 도시 근교 마을로 발전하고 있다. 이는 또한, 외부에서 이주해 온 세대와 마을의 선주민들이 잘 어울려서 지내는 평화로운 마을을 자랑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청년회, 노인회, 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경로당,부녀회)
전통식품/특산품
양파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승달산의 매봉(190.5m) 기슭 아래 낮은 구릉지에 펼쳐진 마을에는 깃대봉이 있고 또한 석정지 및 평림저수지가 농사와 생활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동/식물
마을에 수령이 최소한 100여 년이 넘어가는 팽나무 한 그루가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청계초등학교 뒤를 ‘강가울’이라고 하는데 강씨들이 살았던 터로써 현재는 지명만 남아 있다. 마을에서 도림리로 넘어가는 재를 ‘갱기재 또는 떼지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도깨비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송현리와의 경계에는 ‘궁개보’라는 지명이 있으며, 장등 아래에 ‘짜박골’이 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에 있는 팽나무 앞뒤로 고인돌 2기가 있는데, 원래는 3기가 있었다고 한다. 밭을 경작하면서 1기는 치워졌다고 하며, 큰 것은 길이 3.2m, 폭 3m로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옛날에 한 장사가 바위들을 몰고 한양으로 가다가 빠뜨린 바위들’이라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윗평산에는 무안박씨 제각인 원모재가 있다. 1865년에 창건하여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는데 현재의 건물은 1994년에 중건한 시멘트 구조의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인데, 안에는 1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설화
미기재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현재 이 마을은 윗평산과 아랫평산을 나누면서 국도 1호선이 지나고 있다. 국도 1호선이 개통되던 초창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고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어린 학생들도 교통사고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통에 대한 의식이 바뀌어져 교통사고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차량의 피해는 자주 일어나고 있다. 6.25한국전쟁 때는 송현리와 경계를 이루는 장등 아래 짜박골에서 좌익에 의해 두 명의 주민이 희생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