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는 청계면 소재지로부터 무안읍 방향으로 약 6Km 떨어진 광주-목포간 국도1호선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을 중심으로 좌로는 국도1호선, 우로는 무안읍 우회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화설당, 사마동, 전리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사마2리 사마동은 청계북초등학교를 막 지나서 만나는 사마리의 첫마을이다. 오른쪽의 마협봉으로부터 화설당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갈마봉 사이에 안겨있는 마을로써, 사마동마을과 호남동(虎南洞)으로 이루어졌다. 호남동은 사마동마을 앞의 작은 마을로 원래는 정씨들 터였는데 한두 가구가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호남동의 유래는 호봉(虎峰) 또는 호치(虎齒) 남쪽에 있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유래
사마동은 ‘원사마리’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보아서 사마라는 마을지명이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유래지》에는 사마동의 지명 유래에 대해서 ‘입향조가 사마원공 벼슬을 하여 그 직책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사마동(司馬洞)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마(司馬)라는 단어는 벼슬이름인 관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 때의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제도의 하나인 ‘사마시(司馬試)’에서 비롯된 말이다. 굳이 벼슬로 말한다면 백제 때의 외관직 벼슬이었으며, 조선 초기에는 훈련관의 종사품 벼슬을 나타내는 정도였고,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벼슬이다. 중국에서도 동한 및 삼국시대에는 병졸이나 과원을 통솔했던 벼슬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따라서 사마원공 벼슬을 한 사람이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기 보다는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이 살았다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와는 달리 벼슬을 했던 사마동(司馬洞)이 아니라, 말을 관리했던 마을이어서 사마동(飼馬洞)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는 실제로 마을의 입향조인 전주최씨 후손의 증언으로 “선조가 괜바윗등 아래서 무안현감의 말을 길렀다.”라고 해서 더욱 개연성이 높아짐과 동시에,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은 연유로 이해되기도 한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마협봉과 그 아래로 암구마봉, 숫구마봉이 있고 마을의 주산인 갈마봉이 있다.
지금도 마을에는 목마른 말이 물을 마셨다는 갈마봉 아래에 통샘이 있으며, 특히 사마동 옆 아래호치에는 제주도에서 사육된 말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쉬었다 가는 마방(馬房)이 있었다고 한다. 마방이란 마굿간의 설비가 있는 주막집인데 제주도에서 사육된 말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무안현감을 비롯한 무안읍성에서 필요한 말을 기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마협봉 아래 골짜기로 이루어진 협곡으로, 앞에는 창포만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사마동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망운에 있었던 감목관은 나주목 관할로 중앙정부에서 필요한 말을 기르고 운송하는 말목장이었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의 입향조는 전주최씨 최양(崔暘, 1580~?, 자-창덕)으로 1600년대 초반에 마을로 들어와서 터를 잡은 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뒤이어 달성배씨와 진주정씨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마을이 조성된 곳은 현재 수양주유소와 가스저장소 사이의 골짜기인데 주민들은 이곳을 ‘구말고랑’이라고 부른다. 이 주변에 있는 사마저수지 아래에 서당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기도 하다. 지금도 이 주변을 파 보면 기와조각 및 많은 그릇 조각들이 나온다.
또한 가스저장소 옆에는 ‘땀딱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는데, 이 샘은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샘물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그 물로 등목이나 목욕하면 땀띠가 없어진다고 해서 땀딱샘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아래로 내려와 현재의 장소에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난 2016년 정화삼 선생은 진주정씨가 사마리에 정착한 것은 선생으로부터 고조 때라고 증언하였다. 당시 청계면 월선리에서 살다가 마을에 불이 나서 무안읍 도산으로 이사 가던 도중에 사마리에서 멈췄는데, 주변의 산세가 좋고 살만하다고 여겨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의 형국과 풍수지리는 승달산 산줄기에서 흘러내린 마협봉, 호봉, 장뭇등, 옥녀봉 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거문고줄과 같이 여러 가닥으로 흘러내린 지형은 옥녀봉전설을 만들고 또한, 마을 뒤 진주선씨 선산의 거문고혈 자리를 만들어 문중묘역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사마리(司馬里)로 나온 이후 1917년 자료에 청계면 사마리 사마동 으로 표기되어서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무안군 이서면 사마리(司馬里)로 나오며, 이후 1912년의 자료에는 전리를 제외하고 무안군 이서면 사마리와 하청천으로 표기되었다. 1917년 자료에서 청계면 사마리 사마동, 남계동, 하청천, 삼노동으로 나온다. 여기에서 하청천이 화설당으로 바뀌고 삼노동은 무안읍 평용리에 편입되었다. 1987년의 자료에서 현재의 지명인 청계면 사마리 사마동으로 표기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사마라는 벼슬을 했거나 아니면 무안현에서 필요한 말을 기르는 곳이었든지 간에 사마동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으면서 또한 나름의 특성화된 문화가 있었던 마을로 사료된다. 그러나 근세기에 들면서 특히 1980년의 간척으로 유당농원이 들면서 비교적 여유로운 농사를 영위하는 농촌마을로 발전하였다.
주요시설
마을의 주요시설로는 호남농산과 비구니 사찰인 봉불사가 있다. 특히 봉불사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활발한 문화활동을 펴고 있어서 주목된다. 호남동 뒤에 있는 봉불사는 제22교구 해남 대흥사의 말사로 1982년 지륜 비구니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불교신문에서 “가고 싶은 절”로 소개되고 2014년에는 전남교육청으로부터 <학교폭력 예방 및 치유를 위한 기관>으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2024년에 명상심리상담센터인 “사티”를 개원하였다. 여기에서는 청소년명상캠프, 사별가족치유프로그램, 에니어그램, 스트레스클리닉, 어머니의 교실, 부부관계 회복하기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변화
그동안 일반적인 농촌 마을로서 벼농사와 함께 무안의 특산물인 마늘과 양파 등을 많이 재배해왔으나, 무안읍에 인접한 편리한 교통과 지형이 맞물린 물류 거점으로서의 역할이 형성됨으로써 농산물가공업체 및 목재소와 정미소 등은 물론 종합폐차장과 같은 환경 관련 업체들이 들어서면서 마을의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노인회,부녀회
공동이용시설
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양파,마늘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뒷마을인 화설당과 사마동을 가르는 산이 갈마봉이며 마을로 넘어오는 산등성이를 지릿골 또는 질흙골이라고 하는데, 현재 도자기공장이 있는 주변의 골짜기이다. 이 질흙골 주변에는 질 좋은 점토가 많이 나와서 이 흙을 이용해 기와를 굽기도 하였으며, 얼마 전까지 주민들은 이곳에서 나오는 점토를 목포의 행남자기 공장에 팔기도 하였다. 지금은 밭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기왓가마공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 가마공장에는 동학농민봉기 때 동학군들이 피신처로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의 지반은 거대한 석회층으로 이루어져서 땅이 낮은 곳에서 곡괭이로 바닥을 찍으면 “떵~”하는 장구 소리가 나기도 한다고 한다.
동/식물
사마동마을 앞 호남동마을의 오른쪽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동각과 함께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유당농원이 막히기 전까지는 그 아래에까지 창포만의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동각은 1998년에 세운 것으로 그 앞에는 표지석이 있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암구마봉, 숫구마봉, 구말고장, 지릿골, 괜바윗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현재의 폐차장 옆에 있는 ‘괜바윗등’이라는 곳은 ‘고인돌이 있는 능선’이란 의미로 5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다. 주민들의 말로는 예전에는 더 많은 고인돌이 있었는데 새마을사업 등을 하면서 가져갔거나 돌을 쪼개서 사용했다고 한다. 지난 2006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사마동 유물산포지》에서 이를 밝혔다. 이곳은 마을의 북쪽 해발 27m 구릉 일대에 있는 곳으로 마협봉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리는 산자락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유물산포지의 앞으로는 소하천이 흐르고 있다.
현재 이곳은 과수원과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로는 적갈색연질토기편, 회청색연질토기편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호남동에는 진주정씨의 재각인 ‘죽우재(竹友齋)’가 있는데 4칸 팔작지붕으로 1983년에 지은 것이며 다섯 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재각 뒤에는 진주정씨 선산이 있다.
설화
승달산 산줄기의 마협봉, 호봉, 장뭇등, 옥녀봉 등에 안겨있는 마을에는 이러한 지명이 반영된 ‘옥녀봉전설’이 있다. 즉 마협봉 줄기의 백운산에서 흰 구름을 타고 내려오던 옥녀봉의 옥녀가 앞에 떠억 버티고 있는 호봉의 호랑이를 보고 놀라 주저앉아 버렸으며,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던 옥녀는 봉불사 앞에 있는 봉우리의 상좌와 함께, 옥녀는 옥녀소반을 챙겨서 장구를 치고 상좌는 거문고를 켜며 춤을 추며 함께 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정광섭(면장)정규동(면장),류호철(안양대교수)
정인홍(조선대교수)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지난 2008년 조사에서 배태우 선생은, 선조 3년에 ‘배경’이라는 분이 사마시에서 진사에 합격하여 이 마을에서 살다가, 이후 말년에 무안읍 평용리 삼로동으로 이주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생애를 보냈다고 하였다. 현대의 인물로는 정광섭(면장), 정규동(면장), 류호철(안양대 교수), 정인홍(조선대 교수) 등이 있다.
거처/생가/묘소
갈마봉에는 세 개의 ‘몰무덤’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임진왜란 등 난리에 죽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묻어서 몰무덤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중에는 발음이 전이 되면서 ‘말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모두 없어져서 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주민들이 고름장(고려장)이라 부르는 곳이 세 군데나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사마동이 무안현감 또는 무안현의 말을 기르는 곳이었다는 최씨 후손의 증언에 나오는 ‘괜바윗등’은 마을 위쪽의 현재 폐차장 옆을 말하는 곳으로 고인돌이 많이 있었던 능선이다. ‘괜바윗등에는 4채의 기와집이 있었다’는 증언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