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리(大士里)는 해제면소재지에서 봉대산 일주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4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칠산바다를 경계로 영광군 낙월면, 염산면과 마주하고 있다. 백학산(白鶴山, 126.3m)을 주산으로 하며 신사마을과 백학마을로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대사2리에 속하는 백학마을은 2km 정도 더 들어오는 외진 마을로 학이 잠자는 형국의 수학(睡鶴), 우데미라고 부르는 윗백이, 아래데미인 아랫백이 마을로 이뤄졌다.
지명유래
마을의 주산으로 병풍 구실을 하는 백학산의 지명을 따서 백학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으로는 자연환경과 관련된 설로써 마을 일대에 예로부터 ‘흰 학(白鶴)’이 많이 날아들어 서식했던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와 함께 마을의 지형이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과 닮았다는 지형적 특징에 따른 지명으로, 이는 마을 주변의 구릉과 평야가 어우러진 지세를 비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형성(입향조)
이 마을에 최초로 들어온 입향 성씨는 보성선씨(寶城宣氏)이며, 입향조는 보성 웅치에서 온 선진서(1685-1735. 자-인서, 호-매당)이다. 이어 김해김씨, 신안주씨가 들어왔다. 신안주씨(新安朱氏)들은 수학마을에 살고 있다. 이 마을 출신 주민 중 주길남 씨는 해방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차점으로 낙선하기도 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이 마을은 해제의 8명당인 화해농주(花蟹弄珠), 추마도강(捶馬渡江), 천마시풍(天馬施風) , 매화낙지(梅花落池), 옥녀탄금(玉女彈琴), 백학귀소(白鶴歸巢), 장군대좌(將軍大座), 구룡쟁주(九龍爭珠) 중 백학귀소(白鶴歸巢)의 명당 터로써 백학이 집으로 돌아오는 형국을 뜻한다. 하지만 백학산의 여러 산줄기에 안겨있는 신사마을과 학암마을도 백학귀소의 터라고 한다.
이와 관련한 풍수 설화에 의하면 백학산에는 예로부터 묘를 쓸 데 석물(石物)을 세우지 않았다. 이유는 오래전에 김해김씨 문중에서 이 산에 묘를 쓰면서 문중의 이름에 걸맞게 크게 석물을 세웠는데, 그 후부터는 후손들에게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나중에 연유를 알아보니 지형이 학이 날아가는 형국이라, 돌을 세우면 새가 무거워서 날 수가 없어 후손들에게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문중에서는 석물을 치워버리니 나쁜 일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든 학(鶴)이 한국 문화에서 장수(長壽), 평화, 청렴함을 상징하는 길조(吉鳥)로 여겨지듯이, 마을 이름에 담긴 자연 친화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생태관광 또는 전통마을 브랜딩으로 활용하려 노력하고 있다.
마을성씨
복합성씨 마을이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미기재
행정구역 변경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해제의 신사내동, 신리에 속했다. 이후 1912년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대치동, 신사동으로 편입되어, 1938의 자료에서 무안군 해제면 대사리 백학마을로 표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원래 마을이 협소하고 농토가 없어서 세 군데로 나눠 있는 마을에서는 주로 어업을 통하여 생계를 유지했었다. 특히, 마을의 오른쪽에 있는 백학 포구 앞바다에서는 30여 년 전만 해도 황금어장이 형성되어 주민들에게 많은 소득을 주었다. 현재는 수산물이 그때의 1/5도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이 포구는 구래포구라고도 불렸으며 한때는 주막이 4곳이나 있을 정도로 성업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철마다 칠산바다 낙월군도 사람들이 찾아와 땔감이며 식량 등을 구입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흥청거렸다고 한다. 현재는 부침이 심한 어업은 김양식을 주로 하며 대부분은 벼농사와 양파, 마늘 등 밭작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시설
서해랑길 코스 둘레길(백학산)
마을변화
2024년 기준 약 50세대 미만의 소규모 마을로서 노인회에 소속된 노인이 절반을 넘는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농사 약 20세대, 김, 새우양식 등의 어업 약 5세대 정도의 생산인구가 활동하고 있는 마을의 취약성을 극복하고자, 최근에는 백학산과 칠산바다를 바라보는 자연환경이 공존하는 농촌 마을로써의 역사와 지역 정서를 체험할 수 있는 마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23년부터 진행된 마을가꾸기 사업은 2025년까지 진행되어 귀촌·체험 관광을 통해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넣도록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생활환경
마을조직
동계, 개발위원회,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어촌계
공동이용시설
백학마을회관
전통식품/특산품
예전에는 염전이었는데, 현재는 새우양식장으로 전환하여 마을 소득이 높아졌다.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전남 무안군 대사리 백학마을은 해양습지보존지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칠산 앞바다와 연결된 갯벌을 포함하고 있으며, 생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습지이다. 해양습지보존지구로 지정된 이유는 이 지역이 다양한 해양 생물의 서식지로서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고, 환경 보존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백학마을의 갯벌은 과거에는 황금어장으로 알려져 주민들에게 많은 소득을 제공했지만, 현재는 수산물 생산량이 감소하여 보호가 더욱 중요해졌다. 이 지역은 관광자원화 계획도 진행 중이며, 백학산과 서해 낙조를 포함한 자연경관을 활용하여 관광 명소로 개발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에는 물이 귀했다. 1968~69년 큰 가뭄이 들었을 때, 관계기관들이 수맥을 찾기 위하여 마을 주변 여러 군데 땅을 뚫었어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앞에 ‘수반창(水盤倉)’이라는 지명이 붙은 자리에 지하공을 뚫자 얼마 파지 않아서 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나왔다. 이를 보고 주민들은 선조들이 지명을 지을 때 괜히 지은 게 아니라 나름대로 지혜와 슬기가 깃든 이름을 지었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동/식물
미기재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백학산 밑에 ‘한아치’라는 마을을 현재는 ‘한아지(寒鴉地)’라고 부르고 있는데 ‘한아치’와 같은 정감을 느낄 수 없다. 한아치는 앞에 보이는 칠산바다 ‘각시섬’과 인연을 맺어 부부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재 각시섬은 영광군에 속해 있으며 이 마을에서는 8㎞의 거리에 있다.
‘한아치’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한아치'를 '한아지(寒鴉地)'라 하는 것은 행정지명을 억지 한자로 합치시킨 결과이다. '한아치'의 '-치'는 지명접미사 '-지'가 격음화(激音化)된 것이다. 한자 '峙'는 우리 말이던 '-치'音에 맞추어 기록된 것으로 '峙'의 訓이 '재'임에서 의미론적 상관이 가능하다.(이돈주, 전남지방의 지명에 관한 고찰, 1964, p.106) 또한 지명접미사로 '-치'는 임진란을 전후로 하여 군영이 있던 곳에 쓰이기도 한다. 솔치(청계 송현), 두무치(망운 두모), 수구치(망운 두모) 등이 전자에 속하고, 임치(해제 임수)등이 후자에 속한다. 따라서 한아치의 경우는 군영이 있지는 않은 지역으로 굳이 해석한다면 '큰 아우가 사는 재'쯤이 될 듯하다.
그리고 백학마을에서 한아지로 넘어가는 고개를 ’된재‘ 또는 ’어렵재‘라고 불렀으며, 학암마을로 넘어가는 재를 ’고개넘이‘이라고 불렀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1980년 이전까지 윗동네인 윗백이에 마을의 당산나무가 있어서 매년 당산제를 진행하였다.
유물, 유적
마을 입구에 1978년에 세워진 ‘석계처사유적비’가 있으며, 최근에 세워진 ‘정서진(正西津)’ 표지석이 있다.
설화
예전의 구래포구 앞에 있는 ‘다드락’이라는 섬은 소와 관련된 전설을 안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의 안산이 ‘소들머리’에 해당되고 이 섬은 소를 매어두는 말뚝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바닷물은 소를 맨 줄이라 여겼다. 하지만 ‘다드락’이란 지명의 유래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장구 장단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백학산은 126m인 작은 산이지만 서해바다와 대각시도, 중각시도 등 낙월군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지점에 있다. 낙월군도는 날씨가 맑은 날엔 멀리 보이다가도 조금 흐린 날에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보인다. 예전에는 동백나무가 많아 동백산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나 백학산이라고 부르는 데는 사연이 있다. 이 산에는 뒷기미(후금동이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곳에 절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에 암자를 짓고 한 고승이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 해 마을에 가뭄이 들어 농작물이 말라 죽고 식수마저 바닥나 주민들이 생사의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별다른 해결책이 없는 주민들은 마을 회의를 통해 수행하는 고승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주민들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고승은 용왕의 승낙도 받지 않고 조화를 부려 비를 오게 하였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용왕은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크게 화를 내고, 벌로 스님을 학으로 만들어 버렸다. 학이 된 스님은 마을에 미련이 남았는지 산 주위를 애처로이 돌다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것을 지켜본 주민들은 스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산 이름을 백학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승이 머물렀던 절을 ‘백림사’라 하는데 현재의 절골에서 기와 조각 등 절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절에서 학암마을에 사는 사람이 입신양명을 위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또한, 이 산에는 굴바위가 있는데 모양이 용머리를 닮아 주민들이 바위를 신성시하고 있다. 그 바위 밑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이 있어 칠산바다 용왕이 즐겨 찾았다고 하는 데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기록물, 문헌
마을회관에 고문헌(금계록, 함평노씨 문집 등, 자료사진 참조)을 다수 보존하고 있다.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미기재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다드락 섬에는 1970년대에 간첩침투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간첩 용의자가 자살하는 바람에 간첩 침투 문제가 더 확대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떠들썩했던 사건이었다. 다드락섬 맞은 편에는 얼마 전까지 군경초소가 있었다.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마을에서는 백학산을 중심으로 일주도로를 신설하여 서해낙조와 칠산 앞바다 그리고 백학산을 묶어 관광지로 개발하기를 원하고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서해낙조는 국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완도의 세방낙조보다 더 아름다운 정경을 볼 수 있다. 또한, 칠산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백학산은 이름만큼이나 고상한 전설을 안고 있어 개발하면 스토리텔링이 좋은 관광 자원이 되리라 생각한다.
2017년 마을사업 대상지로 조사하여 마을사업을 진행하였다. 현재 백학은 서해랑길 코스에 포함되며, 백학산 일대는 둘레길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특히 백학산의 동백나무 숲은 울창했던 예전의 모습은 아니지만 잘 가꾸어 놓으면 관광명소가 될 수도 있다. 도로는 현재 부분적으로 포장이 이루어졌는데 칠산 바다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점에 ‘정서진(正西津)’이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몇 년 전에 해제면사무소에서 세웠다는데 이곳이 군내에서 가장 서쪽에 있음을 알리는 지리적 표지이다. 현재 포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이곳 갯벌은 해양습지보존지구로 지정되어 국가의 보호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