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峙라는 지명은 몽탄에서 무안읍으로 가려면 내리를 거쳐 마을 옆으로 해서 넘어 가는 큰 재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봉암이란 지명의 유래는 마을의 지형이 벌을 닮았을 뿐 아니라 마을 옆에 벌집 모양의 큰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정면에서 보면 알 수 없는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펴보면 벌의 형상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해서 마을 옆에 있는 바위를 벌바위[蜂巖]라 하고 마을 이름도 봉암이라 했다.
마을형성(입향조)
입향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천서씨가 임진란을 피하여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16대 가량 이어져 오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고씨와 최씨들이 살았으나 현재는 한 가구도 없다. 이후 옆 마을 한재에 살던 이천서씨들이 200여년 전에 들어오면서 서씨 집성촌이 되었다. 서씨의 입향조는 서상묵(자-후백, 1767-1831)이다. 이후 나주 김씨 김종연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면서 복합성씨의 마을이 되었다.
풍수지리(마을형국)
피난지로 알려진 西出東流형의 지형을 갖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 앞산의 모양이 학모양의 형세를 가지고 있다.
마을성씨
이천 서씨 집성촌이 유지되고 있으나 김씨 오씨 정씨 등 성씨가 섞여가고 있다. 나주 김씨는 자제분들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 집만 남아있다. 한재마을과 같은 파이지만 자손 대에 이르러 나뉘어져 산다.
마을변천
마을 명칭 변경
문헌을 통한 지명의 변화를 보면 1789년의 자료인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대치리, 탑동리 화표정리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인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대치동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로, 1917년의 자료인 조선면리동일람에도 대치리 대치동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 장동으로 나온다. 이어 1987년의 자료에는 몽탄면 대치리 한재 봉암 장동으로 표기되었다.
문헌으로 살펴 본 마을이름의 변화는 다양하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석진면 청룡리만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청룡은 빠지고 석진면 봉암리와 문암리가 나온다. 1917년엔 석진면 대치리 봉암리 문암리로 기록되어 있다. 1987년에는 몽탄면 대치리 봉암으로 나온다.
행정구역 변경
대치리는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암리, 문암리, 송정리, 적치리, 장동리를 합쳐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봉암은 대치2리에 속한 마을로 원래 봉암 청룡 총지 장동이 대치 2리였으나 2009년에 봉암과 청룡은 2리로, 총지와 장동은 3리로 분리되었다.
마을 성격(주업/주민의 삶)
맑으내재를 넘어 청천리에서 버스를 타고 무안장에 다녔다. 한재는 된길이고 맑으내재는 평탄한길이었다. 그래서 두 개의 잔등을 넘어야 했지만 평탄한 맑으내재로 가는 길을 많이 이용했다.
몽탄역을 통해 기차도 많이 이용했다.
마을은 빈촌이었다. 전답이 없어서 가난해 남의 집 시제 모셔주고, 벌초해주면서 생활을 이어나갔다. 마을 인근에 묫자리가 많았다.
주요시설
미기재
마을변화
미기재
생활환경
마을조직
미기재
공동이용시설
벌바위 아래에 기름바위[油巖]가 있다. 바위 사이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물에 기름기가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지질학자들이 자주 와서 바위에 관련된 조사를 많이 해가기도 했다. 또한 이 바위 밑에 장승거리 샘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었는데 67년 대한해 때도 물이 마르지 않아 주변 마을 사람들도 마셨던 물이다.
전통식품/특산품
미기재
자연환경
생태환경(무생물,산‧강‧들)
이 마을은 승달산 줄기인 마협봉을 주산으로 하고 마산을 앞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대치천이 흐르고 있다.
기름바위라 불리는 곳이 있다. 물에 기름기가 보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질학자들의 연구가 많았다. 벌바위 밑 옹달샘으로 경지정리를 하면서 메워져 없어졌다.
동/식물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태풍에 쓰러져버렸다.
지역에서 사용하는 명칭들
장승거리라 불리는 곳에 총지사의 석장승이 있었는데 오래 전에 주민들이 현재의 총지 마을 앞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장승거리는 벌바위 아래를 말한다.
벌바위, 봉암, 솔대봉은 모두 같은 봉우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마을 뒤에 벌과 관련된 암벌바위 벌멍덕 등의 지명도 있다. 일반적으로 봉암이란 지명을 갖고 있는 산은 정기가 서려있다고 한다. 또한 벌바위의 봉우리는 솔대봉이라 부르고 있다.
괭이골, 다박골, 민등, 고불안경, 중산골, 먹골, 장승거리(석장승 있던곳)-벌바위 아래
가잿재, 맑으내재, 큰골, 고부랑쟁이, 따박골, 민등, 한새꼬재, 고불안경, 먹골, 중산골, 괭이골, 말봉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민속환경
축제/제전/의례
미기재
유물, 유적
마을 앞 고래실골이라 부르는 농지에 고인돌 群이 있었다. 10여개가 넘게 있는 곳과 커다란 바위 1개가 있는 두 군데가 있었다. 그런데 1989년 경지정리를 하면서 일부 주민들이 보존하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땅을 파고 묻어 버렸다. 깨거나 가져간 것이 없이 모두 묻어버려 지금도 파면 온전하게 복원할 수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현재도 밭일하다 보면 그 태가 난다고 말한다. 그 고인돌 위에서 참도 먹고 했었다고 한다.
청룡마을 뒤에 달성배씨 제각인 연익재가 있다. 정면 5칸 측면 2,5칸의 팔작지붕이며 삼문이 있다. 1927년에 건축했으며 안에는 3개의 현판이 있다. 제각 뒤에는 배씨들의 문산이 있다.
※정씨 제각이 관리 되지 못하고 마을 뒷산을 오르는 길에 방치되어 있었다.
(기존 자료에 없었음)
설화
이춘자님
(시아버지가 딸 묫자리 왜 안 들르고 가느냐며 따지는 군인 귀신들을 만나서 밥을 해 먹여서 보냈다.)
기록물, 문헌
미기재
인물
장인/명장/기능보유자/예술인
미기재
유명인/역사인물/고위공직자
서삼석 국회의원 조부의 고향이다.
(현 노인회장님 조카뻘)
거처/생가/묘소
미기재
특이사항 및 추가내용
주요사건사고
미기재
마을자랑거리(경승지, 공원, 경관, 풍경)
동학의 후손이 살고 있었다. 마을 노인회장이셨던 김정국 옹의 조부 김종연(자-성우, 1859-1932)공이다. 공은 인내천의 사상을 바탕으로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깃발 올라가자 주저 없이 동학의 대열에 합류했다. 친족인 차뫼 마을의 김응문 형제들과 함께 참여한 공은 고막원 전투 이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수 군수로 있던 동생 종휴(자-문국, 호-추정. 1868-1945)씨를 찾아가 몸을 의탁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동학 토벌군의 추적이 잠잠해지자 공은 가족들을 이끌고 피난지로 알려진 西出東流형의 지형을 갖고 있는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공의 후손들도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참여해 고초를 겪었다. 공의 자제인 안기와 종휴 공의 자제인 철기는 기미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투사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서로 협조하고 근면할 뿐 아니라 화목해 다른 마을에서 부러워하고 있다. 마을에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모든 주민이 나서서 한마음으로 처리해 주민들의 목소리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해서 한국전쟁 때 다른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서로들 죽이는 일들이 발생했지만 이 마을에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고시합격자가 둘이 나올 정도로 산과 지세의 기운도 좋다.
현재 젊은 이장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꽃길 가꾸기 등 마을 정화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마을을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주변개발사업, 기업체
만남의 도로는 주민들은 이용하지 않는데 오토바이나 자전거 등이 다녀 불편하고 주민들이 마을 앞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위험해졌다.
오래 전 봉우리 두 개를 막아 저수지를 만들려 했으나 배씨들이 선산이 수몰된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배길도 국회의원이 반대를 주도했다.)
마을 개천을 복개하여 길이 되었다.
주민요구사항
마을에 CCTV가 있었으면 한다. 만남의 도로가 개통되면서 외지인들이 마을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어서 혼자 거주하시는 어르신들의 안전이 우려된다.
넓은 지역, 타지역이야기
태봉에 골프장이 들어올 때 반대가 심했다.
찬반으로 나뉘어 마을이 쪼개졌고 그래서 진입로가 동암으로 만들어졌다.
기타사항
마을 뒤에는 1990년대에 들어선 건양교회가 있다. 상당한 규모로 점차 커져가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과는 교류를 하지 않고 있다. 교세가 커지면서 마을을 가르고 지나는 길에 교회 차량의 통행이 많아지면서 주민들이 불편해 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가 목포 등 외지에서 오는데 이 마을 주민을 포함한 주변 마을에서 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없다.